메뉴 건너뛰기

close

언어는 그 자체로 의미를 규정하거나 특정한 관념을 갖게 하는 효과가 있다. '폐경'이라는 말이 여자로서의 생이 끝난 것같은 느낌을 갖게 하는 반면, '완경'이라고 하면 임무를 완전하게 마무리했다는 느낌,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을 갖게 만든다.

여성의 몸, 특히 아기집인 자궁 건강을 강조하는 한의사 이유명호 선생은 폐경 대신 '완경'이라는 말을 쓰자는 운동을 시작한 분이다.

폐경이 아니고 완경이다

이유명호 선생에 따르면 완경(完經)은 여성이 재생산의 임무를 잘 마치고 자기의 삶을 준비하는 출발점이다. 재생산의 임무와 양육의 임무를 잘 마쳤으니 이제 한 사람으로 자기의 생을 개척하고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이 완경 이후인 셈이다.

닫는다, 버린다라는 의미의 '폐경'이라는 말은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종말을 강조하는 듯하다. 마치 여성은 재생산을 할 때만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반면, 완경(完經)이라는 말은 한 과정을 잘 완성했다는 느낌이 든다. 더 넓은 사회로 발을 내딛거나 더 높은 곳을 향한 도약의 디딤돌이 되듯이 말이다. 우리가 언어를 골라 사용해야 하는 이유다.
  
낙배법을 합법회시킨 시몬 베유의 이야기
▲ 국가가 아닌 여성이 결정해야 합니다 낙배법을 합법회시킨 시몬 베유의 이야기
ⓒ 갈라파고스

관련사진보기

 
시몬 베유의 <국가가 아닌 여성이 결정해야 합니다>는 낙태법을 바꾼 프랑스의 보건복지부 장관 시몬 베유의 이야기다.

여성은 4명 중 1명 정도는 한 번 이상 '인공 임신 중절'을 경험했다고 한다. 하지만  '인공 임신 중절'은 여전히 불법으로 규정하는 나라가 대부분이다. 여성들이 음성적으로 '임신 중절' 수술을 받는 이유다. 프랑스도 다르지 않은 상황이었다. 여성들은 불법으로 수술을 받다가 사망하거나, 수술을 받았거나 도왔다는 이유로 범죄자가 돼야 했다.

1974년 11월 26일, 시몬 베유의 용기로 임신 중단 합법화 법안인 '베유 법'이 통과된다. 5년이라는 한시적 기간을 정하고 몇 가지 조건을 붙이긴 했지만, 불법 인공 임신 중절로 인한 여성의 사망과 중절 여성을 범죄자로 낙인 찍는 시선으로부터 여성들을 자유롭게 만든 계기가 됐다.
 
입법자가 발효된 법조문(낙태법)을 개정하고자 하는 까닭은 음지에서 실시되는 낙태에 종지부를 찍기 위함입니다.사회적인 이유, 경제적이거나 심리적인 이유로 곤경에 처했다고 느낄 때 여성들은 어떤 조건에 있든 상관없이 임신을 중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는 구체적이거나 모호한 문형으로 정의하기를 거부하고 현실을 마주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여 낙태에 대한 결정이 궁극적으로 여성에 의해서 내려져야 한다는 점을 인정코자 합니다. - 40쪽

'낙태'와 '임신 중단'의 차이

책에서는 '낙태'라는 말 대신 '임신 중단'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디. '임신 중단'이라는 말을 사용하니 의미가 확실하게 전달된다. 임신의 주체인 여성의 임신 지속 여부에 대한 '자기결정권' 을 존중한다는 적극적 의미가 내포돼 있어서다.

'낙태'란 '태아를 떼어낸다'는 의미로 생명을 함부로 한다는 뉘앙스가 강하게 느껴져 죄책감이나 거부감이 들게 만든다. 보수적인 남성들과 종교계에서 '임신 중단'을 반대하는 빌미가 되기도 한다.

여전히 대부분의 나라에서 '인공임신 중단'은 위법이다. 임신은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임신 지속이나 중단의 여부는 남성들이나 타인, 사회법이 결정한다.

임신을 지속할지 중단할지에 대한 결정은 몸의 주체인 여성이 결정해야 한다. 임신은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자기 몸은 자기가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여성을 마치 '아이를 낳는 도구'처럼 인식하는 것은 여성의 인격은 물론 개체로서의 여성 존재를 무시하는 처사다.

피임, 생명에 대한 이해와 존중, 임신 시가나 결정에 대한 서로의 책임도 병행돼야 한다. 강간에 의한 임신 등 원치 않는 임신이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 환경과 조건, 여성의 몸 상태 등이 충분히 고려돼야만 한다. 키울 능력도 없는데 무조건 임신했으니 아이를 낳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최선이 아니다. 여성의 몸과 마음 생명을 존중하는 의미로 '폐경' 대신 '완경'을, '낙태' 대신 '임신 중단'이라는 말을 사용하면 좋겠다.

책의 원제는 '남성들도 기억한다( Les homes aussi s'en souviennet)'다. '베유 법'이 남자들에게도 진보의 걸음을 내딛을 디딤돌이 됐다는 의미다.  '베유 법' 이후 개정을 거듭한 현재 프랑스에서는 '임신 중단'를 방해하는 것은 길게는 3년의 징역 3만 유로의 벌금을 불어야 하는 중대한 범죄다. 여성의 임신 지속 여부에 대한 자기결정권이 확실해진 것이다.

한국에서도 '여성 몸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주장하는 '낙태법 폐지' 운동이 펼쳐지고 있다. 세계적으로도 임신 중단을 찬성하는 단체와 반대하는 단체들의 치열한 논쟁과 활동은 이어지고 있다.

국가가 아닌 여성이 결정해야 합니다 - 시몬 베유, 낙태죄를 폐지하다

시몬 베유 지음, 이민경 옮김, 갈라파고스(2018)


태그:#임신중단, #완경, #재생산권
댓글5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