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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의 친구가 '살면서 감동 깊게 읽은 책' 열 권을 추천하는 릴레이를 이어 받은 적이 있다. 살면서 감동 받은 책이 어디 열 권뿐이랴만 책꽂이에 생존해 있는 책들 중에 열권을 골랐다. 그렇게 열 권을 소개하면서 열흘을 보내고 나서 '나는 이런 이야기에, 이런 일에 관심이 있구나' 싶었다. 그렇게 나의 일부가 읽어졌다.

며칠 전 책 한 권을 선물 받았다. 책을 읽는 이유는 사람마다 경우마다 다르겠지만  이 책은 벅차게 살아온 누구에게나 쉼표 하나를 마련해 주는 듯하다. 어쩌면 처진 어깨를 천천히 투-욱 투-욱 두드려 주는 것 같기도 하고, 말로 나오지 않는 응어리를 아무말 않고 같이 울어주는 듯하다.
  
『행인도감』. 그림 · 글 헌즈. 가르스 출판사. 15,000원. 편안한 차 한 잔과 낡은 책상으로 충분하다.
 『행인도감』. 그림 · 글 헌즈. 가르스 출판사. 15,000원. 편안한 차 한 잔과 낡은 책상으로 충분하다.
ⓒ 김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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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도감』. 그림 · 글 헌즈. 가르스 출판사. 15,000원.
작가 헌즈는 가죽공예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다. <씨네 21>에서 영화 만평 카툰 '헌즈 다이어리'를 연재했고, <똑똑한 식스팩>, <체브라시카 : Cheburashka Friendship>등 책 다수에 그림을 그렸다.


<행인도감>은 그림과 글 속의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 혹은 어떻게 살아왔는지 몰라도 좋다. 또 <행인도감> 역시 내게 이름을 묻지 않고, 학력을 묻지 않고, 어떻게 살아갈지 묻지 않았다. 그저 낡은 의자 하나 빌려 주었다.

인생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고 한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는 행인이다. 이 책의 주인공이면서도 세상의 주인공이 아닌, 그래도 잠깐 빛나는 순간이 있다. 맨날 퉁명스런 얼굴로 인사도 안하던 편의점 키다리 청년이 어느 날 인사를 건냈는데 목소리가 너무나도 근사하다는 걸 안 그 날. 그 때 청년은 세상의 주인공으로 빛났다.
  
『행인도감』행인1. 편의점 키다리 청년.
 『행인도감』행인1. 편의점 키다리 청년.
ⓒ 김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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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졸업하고 취직만 되면, 취직이 되어 삼 년만 버티면, 삼 년만 버티어 장가라도 간다면, 겨우 결혼 했는데 전세라도 마련하면, 아이가 태어났으니 공부 시킬 때까지만이라도 직장 생활을 할 수 있다면… 대한민국 청년의 꿈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자꾸만 쪼그라 들 때, 스파이더 맨보다 울트라 맨보다 훨씬 센 아빠가 있다고 믿는 아이 앞에서 아빠는 세상의 주인공으로 빛이 난다.
  
『행인도감』행인 8. 나는 슈퍼맨
 『행인도감』행인 8. 나는 슈퍼맨
ⓒ 김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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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를 해도 괜찮다. 틀려도 괜찮고, 달라도 괜찮다. 내 나이가 몇이든 오늘은 이 나이로 처음 사는 날이고, 나날이 밝아오는 오늘도 처음 맞는 거니까. 그러니까 말이다, 나는 또 살아가야 하니까 잠시만 부끄러우면 되는거니 좀 모른 척 해도 된다고 머리 숙이지 말라고 한다. 눈물이 핑 돌면서 조금만 뻔뻔스러워지기로 했다.
  
『행인도감』행인 25. 꼬마아가씨
 『행인도감』행인 25. 꼬마아가씨
ⓒ 김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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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들여다 보면서 어쩌면 작가 헌즈는 저렇게 생겼을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그림 속의 청년은 때가 꼬질꼬질 묻었을 길고양이에게 이름도 붙여준다. 괴테의 첫사랑이 연상되는 Charlotte-샤로테. 등을 긁어 주다가 배가 불러 온 것을 알게 된다. 사람도 견디기 유난히 더웠던 여름을 지나면서 길에서 새끼를 낳고 어떻게 버텼을지 걱정을 한다. 다음번에 만나면 닭꼬치 하나 사주겠다고 한다.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생명들은 더 소중하거나 덜 소중안 존재로 나뉘지 않는다. 생명은 그 자체로 똑같이 소중하다.
  
『행인도감』행인 36. 고양이 샤롯데.
 『행인도감』행인 36. 고양이 샤롯데.
ⓒ 김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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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흐른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아무리 힘이 들어도 이 또한 지나갈 것을 안다. 알아도 지금은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힘이 들지라도, 내일은 결코 오지 않을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아무 것도 잃지 않고 사는 사람도 없고, 단 한 번도 마음 다치지 않고 살아 낸 사람도 없다. 그저 '나'를 잃지 않으면 조금 많이 울고 난 후에라도 다시 살아낼 수 있다. 작가 헌즈는 사연을 묻지 않고 말 없는 풍경을 내어 준다.
  
『행인도감』행인 77. 그저 지나가리니
 『행인도감』행인 77. 그저 지나가리니
ⓒ 김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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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도착할 자리가 내가 원하는 만큼일지 모르겠다. 그래도 걸어가야 한다. 가시밭길이든, 꽃길이든, 비록 멀고 험한 길이지만 걸어가는 그 시간이 나의 삶이다.

작가 헌즈는 우리가 무심코 지나친 사소한 사람들의 77 풍경을 보여주었다. 나무라지 않고, 도덕적으로 살라고도 하지 않고, 어떻게 살라고도 하지 않는다. 그냥 살고 있는 사람들, 그냥 스치고 지나가는 '행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빛나는 순간을 보여준다. 잘나서 빛나는 것이 아니고, 위대하거나 대단해서 빛나는 것이 아니라 살고 있는 그 순간순간이 빛나는 것이라고 말이다.

행인도감 - 오늘 당신이 무심코 지나친 사소한 사람풍경 77

헌즈 지음, 가르스연구소(2018)


태그:#헌즈, #행인도감, #가르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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