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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인'으로 사는 것, 동화되지 않을 권리.

제인 정 트렌카는 입양인이다. 1972년 미국 미네소타주 개신교도인 백인 부부에게 입양되었다. 제인은 "미화 800달러에 팔려"갔다고 말했다.

어느 날 친구들과 피부색이 다르다는, 백인이 아니라는 자각 이후, 제인은 '나는 누구인가'에 천착한다. 타고난 백인과 달리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했던 지난함으로 점철된 시간들이었다. 백인 남편과 결혼했어도 결코 백인이 될 수 없었다. 제인은 책 <덧없는 환영들>에서 입양인들이 분열된 자아로 겪어야 했던 혼란과 고통을 그려냈다. 자전적 이야기이다.

제인은 다행히 엄마와 가족을 찾았다. 찾은 엄마가 자신이 생각했던 미혼모가 아니었다는데, 입양 기록은 그렇게 말해 주었기 때문에, 경악한다. 아빠가 무지막지한 폭력을 휘두르자 견디다 못해 도망친 후, 아기인 경아(제인)와 머물 곳이 없자 어쩔 수 없이 잠시 보육원에 맡긴다. 꼭 아기를 찾으러 오겠다는 약속대로 다시 보육원을 찾았을 때, 경아(제인)는 이미 입양된 뒤였다.

부모가 엄연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함부로 버려졌음에 제인은 큰 타격을 받는다. 그녀가 입양인으로 살아낸 41년은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돌이킬 수 없게 지워버린'(p124) 폭력과 상실의 시간들이기 때문이었다. '입양을 자비롭고 도덕적인 행위'(p124)로 간주하며 여전히 아이들을 해외로 방출하는 한국의 입양정책에 그녀는 단단히 책임을 묻는다.

<덧없는 환영들>에서 '제인'은(책 속의 주인공도 '제인'이다) 결국 '백인 되기'를 포기하고 한국에 돌아온다. 돌아온 한국에서 그녀는 한국말을 할 수 없어 다시 이방인 신세가 된다.

귀환한 한국에선 유창한 한국어로 한국인임을 증명하라고 요구받는다. 고국에 왔으면 고국의 언어로 네 정체를 밝히라는 순혈주의 한국의 압박. 세 살 박이 어린애 수준의 한국어밖에 더듬대지 못하는 자신이, 어디서도 잘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무능함에 기막힌다.

그녀가 한국어를 익히는 과정은 한국인이 외국어를 익히는 과정과 같다. 엄마를 'umma'로 익힌다. 외국어 습득처럼 조금씩 익혀가는 고국어로 불편한 사람들과 이웃이 되고, 생전 처음 먹어보는 고약한 한국 음식이 먹을 만해지며 조금 안도한다. 낯선 가족끼리 나누는 대화가, 외국어를 습득하면 자막을 읽지 않고도 영화를 이해하게 되는 것처럼, 들리게 되면서 이완된다.

모든 것이 불편하지만 더 혼란했던 '백인 되기'의 지난함을 반추하며, 그 불편함을 빨리 한국인이 되려는 강박으로 치환시키지 않으려 다독인다. 단절하며 떠난 미네소타 음식이 그리워, 그와 비슷한 맛을 내는 음식점을 찾아내고 반가워하는 자신도 토닥인다. 나를 증명하기 위해 타인의 승인을 얻으려 애쓰는 것은 얼마나 피말리는 허망함인가.

제인은 슈퍼 파워 미국이 제공할지도 모르는 '백인성의 유혹, 제국의 유혹'(p134)을 단호히 걷어차고 한국으로 귀환했다. 자신을 버린 곳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제대도 백인으로 동화됐는지 끊임없이 확인하는 미국을 '깨끗한 단절'(p273)로 베어내 버리지 않고서는 그 어떤 출발도 할 수 없다는 예감을 한다.

돌아온 한국에서 제인은 같은 처지의 각기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많은 입양인들은 만난다. 그들 또한 '나는 누구인가'를 물으며 자신을 정체해 줄 흔적들을 뒤지러 온 터다.

사정들이 좋지 않았다. 당장 그날 저녁 잠자리를 구걸해야하거나, 술이나 마약에 심신이 피폐하거나,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나를 찾을 길 없어 미치겠거나, 입양된 나라에서 추방돼 어디에고 허용되지 않는 자신을 견디지 못해 자살하거나. 자신들의 존재를 지운 고국에서, 부재했던 자신의 흔적을 줍느라 허둥대는 이들의 삶은 고달프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한국인이었기에, 한국인인 단서를 조금이라도 찾아내려 애면글면하는 입양인의 심정을 온전히 애해하지는 못한다. 다만, 입양은 한 사람의 '정신을 훔쳐'내는 일이라는 제인의 말이 내내 목에 걸린다. 그렇다면 더 이상 아이들의 정신이 도둑질당하게 두어서는 안 되는 일 아닌가. 입양에 대한 반인권적 담론은 김희경의 <이상한 정상 가족>을 읽어보면 유익하다.

나는 파주의 '엄마품동산'에서 우연히 입양인과 마주친 적이 있다. '엄마품동산'은 미군위안부들과 그들 자녀들의 아픔을 기억하기 위해 파주에 조성되었다. 제인을 <덧없는 환영들>로 만난 뒤여서인지, 그녀가 제인으로 재현되는 이상한 충격을 받았다. 물론 그녀는 제인과 동일한 아픔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혹은 그녀를 이곳으로 이끈 것이 아픔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녀는 덴마크로 4살 때 입양되었다고 했다. 엄마를 찾고 있지만 아직 찾지 못했다고 했다. 쌍꺼풀 없는 기름한 눈에, 촘촘히 주근깨가 박혀있는 갸름한 얼굴,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 누가 봐도 대번에 한국인으로 알아차릴 외모였다. 웃으면 수줍어 보이는 한국어를 거의 하지 못하는 그녀는, 덴마크어는 커녕 영어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나만큼 답답해 보였다.

'엄마품동산'은 도심에 있는 곳이 아니라서 쉬이 찾아오기 어려운 곳에 있다. 그 먼 곳을 더듬어 와서, 엄마가 없는 엄마 품에서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작은 소리로 "umma(엄마)"를 불러 보았을까. 기울고 있는 햇살이 그녀의 작은 어깨를 쪼여주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 게시


덧없는 환영들

제인 정 트렌카 지음, 이일수 옮김, 창비(2013)


태그:#덧없는 환영들, #제인 정 트렌카 , #입양 , #경계인, #이상한 정상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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