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올해도 수많은 영화가 관객과 만났습니다. 올해 한국 영화 시장의 특징은 고예산 한국 영화들이 줄줄이 흥행 참패하는 가운데, <암수살인>(378만 명), <서치>(295만 명), <완벽한 타인>(528만 명), <보헤미안 랩소디>(819만 명 이상) 같은 비수기 히트작들이 반사 이익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한국 고예산 기획 영화의 흥행 부진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올해는 일반 관객들이 스스로 대안을 찾아 나서듯 다른 영화를 선택하는 현상이 현저히 높아졌습니다. 한국 영화의 퀄리티에 대한 불만을 제대로 표출한 것이죠. 한국 상업 영화계가 풀어야 할 숙제를 해결하지 않고 자꾸 뒤로 미루다가는 영화 산업 전체가 몰락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2018년의 기억할 만한 영화들을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정리해 보았습니다. 내년에도 이만큼 재미있고 좋은 영화들을 만났으면 합니다.
 
 영화 <쓰리 빌보드>의 스틸컷

영화 <쓰리 빌보드>의 스틸컷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하나] 놓칠 수 없는 아카데미 수상작, <쓰리 빌보드>

연초에 소개되는 아카데미 수상작들은 그해에 가장 기억에 남을 만한 영화로 손꼽히게 될 때가 많습니다. 올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카데미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휩쓴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이나 여우주연상과 남우조연상 수상자를 낸 <쓰리 빌보드> 역시 그런 영화입니다.

그중에서도 <쓰리 빌보드>는 꼭 챙겨 봐야 할 수작입니다. 영국 출신 감독 마틴 맥도나가 <킬러들의 도시> <세븐 사이코패스>에 이어 내놓은 작품인데, 초반 설정은 미스터리 스릴러 같지만, 실상은 감독의 전작과 마찬가지로 블랙 코미디입니다. 인종 차별과 성차별, 범죄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인간의 선의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되새겨 보게 하죠.

배경이 되는 백인 중심의 고립된 지역 사회, 자기 딸을 무참히 살해한 범인을 잡아 정의를 세워달라는 외치는 어머니, 지독한 선입견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던 백인 남성 쇼비니스트 경찰이 내는 기묘한 화음을 통해 영화로 다루기 어려운 주제를 빼어나게 풀어낸 작품입니다.

[둘] 세계적인 작가 감독들의 귀환, <팬텀 스레드>

한동안 한국 극장가에서 외국 아트하우스 영화를 챙겨보기 힘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 몇 년 새 여러 영화 수입사들의 노력으로 한국 극장가에서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작가 감독의 신작을 웬만큼 챙겨볼 수 있게 됐습니다. 올해에는 짐 자무시의 <패터슨>, 아녜스 바르다의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 등이 관객들의 호평을 받았습니다. 또한 8년 만에 신작 <버닝>을 내놓은 우리나라의 이창동 감독 역시 관객들과 만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폴 토머스 앤더슨의 신작 <팬텀 스레드>는 이런 영화 중에서 가장 눈여겨볼 만한 작품입니다. 앞서 언급한 다른 작가 감독들의 작품은 기존에 구축된 자신의 작품 세계 안에서 정해진 색깔을 충실히 냈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하지만 <팬텀 스레드>는 <데어 윌 비 블러드>(2007) 이후 한동안 부진했던 폴 토머스 앤더슨이 심기일전하여 변화를 시도한 작품입니다. 자신이 구축한 세계에만 너무 매몰되지 않고 초기작들처럼 관객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부분까지 신경을 썼습니다.

1950년대 왕실과 귀족 여성들의 옷을 디자인하던 최고의 디자이너 레이놀즈의 의상실을 무대로 삼아, 비타협적 예술혼과 집착에 가까운 사랑이 뒤얽히며 빚어진 매혹적인 이야기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여러 면에서 감독의 2002년작 <펀치 드렁크 러브>와 정반대 위치에 있는 영화죠. 주인공 레이놀즈를 연기하는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섬세한 연기, 아름다운 옷에 관한 탐미적인 묘사도 볼거리입니다.
 
 영화 <오션스 8>의 포스터.

영화 <오션스 8>의 포스터.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주)

 
[셋] 꾸준히 나오는 여성 중심 영화, <레이디 버드> <오션스 8>

전 세계적으로 여성과 소수 인종, 성소수자가 주인공인 영화가 점점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늘 보수적이었던 할리우드 영화들도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분위기입니다. 물론 관객 저변을 넓히려는 시도이지만요. <레이디 버드>와 <오션스 8>은 그런 추세를 보여준 수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극장 개봉을 못 하고 VOD 시장으로 직행한 <디서비디언스>나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로 소개된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같은 작품도 기억해둘 만한 여성 주인공 영화였죠.

<레이디 버드>는 배우 그레타 거윅의 감독 데뷔작으로서 졸업을 앞둔 여고생의 일상과 성장을 설득력 있게 담은 수작입니다. 보통 남성 감독들의 성장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연민 가득한 시선으로 되돌아본 회고담인 경우가 많죠. 하지만 그에 비해 이 영화는 주인공의 일상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한 사람이 성장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이 친구나 부모 같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라는 사실을 예리하게 포착합니다.

<오션스 8>은 그간 남성들의 전유물이나 마찬가지였던 케이퍼 장르를 매력적인 여성 인물들을 내세워 새롭게 만든 영화입니다. 그간 이 장르에서 여성의 역할은 주인공의 연인이거나 걸림돌이 되는 악당으로 나오는 정도로 나올 뿐이었습니다. 이 영화는 주요 등장인물들이 여성인 것은 물론, 그간 이 장르에서 당연하게 여겨져 왔던 관습적인 표현들이 실은 매우 남성 중심적이었음을 폭로합니다.  

[넷] 주목할 만한 저예산 영화, <서치>

올해에도 예년과 마찬가지로 예산을 적게 쓰면서도,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진지한 문제의식을 가진 인상 깊은 작품들이 많았습니다. 동생을 구하려는 범죄자 형의 노력을 신선한 시각으로 다룬 <굿 타임>, 소리를 내면 목숨을 위협받는 근미래의 지구라는 설정이 돋보인 <콰이어트 플레이스>, 근대 건축물의 보고인 인디애나주 콜럼버스를 무대로 젊은 세대의 고민을 다룬 <콜럼버스>, 가정 폭력의 지독함을 몸서리쳐지도록 잘 그려낸 <아직 끝나지 않았다> 등이 기억에 남는 작품들입니다.

특히 영화 전체가 컴퓨터 화면을 찍은 영상으로 이뤄진 <서치>는 단연 돋보이는 저예산 영화였습니다. 실종된 딸의 행방을 찾아 헤매는 아버지의 이야기라는 스토리 자체는 별로 특별한 부분이 없지만, 컴퓨터 화면만으로 인물이 처한 상황과 감정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한 점이 돋보입니다. 다양한 전자 기기와 연결된 현대인의 삶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대 현실을 잘 반영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영화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의 포스터

영화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의 포스터 ⓒ 소니 픽쳐스

   
[다섯] 여전히 강했던 슈퍼히어로물, <스파이더맨: 뉴유니버스>

블록버스터 슈퍼히어로물은 최근 몇 년간 가장 주목 받는 장르였습니다. 특히 올해는 극영화와 애니메이션을 가리지 않고 봇물처럼 쏟아져서 이 영화들을 빼놓고는 한 해 영화 흥행을 논할 수가 없게 됐습니다. 한때의 유행이 아니라, 완전히 하나의 주류 장르로 자리 잡은 느낌입니다.

올해 나온 주요 슈퍼히어로물의 특징은 백인 영웅의 성장을 다루는 수준에서 벗어나 다양한 개성을 갖추었다는 점입니다. 흑인 슈퍼히어로물인 <블랙 팬서>, 그리스 비극 같은 장중함이 돋보인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병맛 개그가 여전했던 <데드풀 2>, 기존의 할리우드 가족주의의 고정 관념을 뒤집은 <인크레더블 2> 등 다채로운 레퍼토리로 관객의 시선을 잡아끌었습니다.

그중에서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는 놓치지 말아야 할 걸작입니다. 오랜 세월 인기를 끌어온 스파이더맨 코믹스의 전통을 잘 살리면서 마블의 모범생 같은 극영화와는 달리 훨씬 속도감 있는 템포로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코믹스 특유의 과감한 생략과 극단적인 앵글에 화려한 시각 효과를 덧붙였고, 사춘기 청소년의 결단과 성장에 초점을 맞추면서 다른 작품과의 차별화에 성공했습니다. 슈퍼히어로물의 미래가 궁금하다면 이 영화를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권오윤 시민기자의 블로그(cinekwon.com)에도 게재된 글입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연말 결산 쓰리 빌보드 팬텀 스레드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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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에 관심 많은 영화인. 두 아이의 아빠. 주말 핫케익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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