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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은혜 교육부 장관이 20일 오전 강릉 펜션에서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한 학생들의 빈소를 찾아 눈물을 흘리며 기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빈소는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됐다. 2018.12.20
  유은혜 교육부 장관이 20일 오전 강릉 펜션에서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한 학생들의 빈소를 찾아 눈물을 흘리며 기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빈소는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됐다. 2018.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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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또 여론을 무마할 '희생양'이 필요한 모양이다. 대형사고가 터져 비난 여론이 들끓을 때마다 예외 없이 등장했던 공식이긴 하다. 생때같은 고3 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강릉 펜션 참변 이후 정부의 발 빠른 대응을 두고 하는 이야기다.

사고 직후 교육부는 전국 고등학교 3학년을 대상으로 수능 이후의 학사일정에 대해 전수조사를 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교육부와 교육청은 정작 수능이 끝난 뒤 고3 교실의 현실을 모르고 있었던 걸까. 전국의 모든 고3 아이들에게 수능이 곧, 졸업식이라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 아닌가.

요즘 고3 아이들은 아침에 등교해 '생사 확인'만 하고 바로 하교하는 게 일상이다. 
평소처럼 학교에서 일과를 보내는 경우는 지원한 대학에 따라 논술 등 남은 전형 준비가 별도로 필요한 아이들뿐이다. 그나마 소수라 대부분의 교실은 비어있는 상태다. 하긴 수능 최저 요건 없이 수시에 합격한 일부 아이들은 2학기 내내 학교생활을 휴가처럼 지내온 터다.

수능이 끝난 고3 아이들은 일과 중에 학교가 아닌 어디에서 만나도 이상하지 않다다. 아주 오래된 관행이다 보니 이를 문제 삼는 학부모도, 교사도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수능이 끝난 아이들을 학교에 머무르게 할 아무런 동인이 없다며 일찌감치 손을 놓은 상태다.

고등학교 3년 동안 오로지 수능만을 향해 달려왔는데, 수능이 끝났으니 목표가 사라진 셈이다. 공부는 오로지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이고, 시험에 보탬이 되지 않으면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도록 줄곧 가르쳐왔다. 십수 년 학창 시절 내내 공부의 즐거움을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아이들이다.

수능이 끝났으니 그들에겐 고등학교의 존재 이유도 가뭇없이 사라졌다. 굳이 학교에 나갈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거다. 학교가 그들을 위해 하는 일이란 고작 대학 합격 여부를 파악해 통계를 내는 것뿐이다. 대학 진학 실적이 확정되는 순간 아이들과 학교의 관계는 그것으로 끝난다. 대학에 진학한 아이들을 '애프터서비스'하는 고등학교는 없다.

이번 사고로 교육부는 수능 이후 고3을 위한 프로그램을 마련하라고 학교를 옥죌 테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모든 학사일정은 그들에게 '원심력'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대학에 가야만 한다는 당위로 억눌려있었을 뿐, 아이들은 언제라도 교문을 박차고 뛰쳐나갈 준비가 돼 있었다.

 
대성고 학생들이 20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된 강릉 펜션에서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한 학생들의 빈소에서 줄지어 서 있다. 2018.12.20
 대성고 학생들이 20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된 강릉 펜션에서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한 학생들의 빈소에서 줄지어 서 있다. 2018.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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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수능은 혈기왕성한 아이들을 비좁은 교실에 몰아넣고 통제하는 가장 유용한 수단일지도 모른다. 이번처럼 친구들과 여행을 가는 것도, 여자 친구를 사귀는 것도, 심지어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 것조차도 수능에 방해가 되는 거라면 '나쁜 짓'으로 치부돼왔다. 그들의 모든 욕구는 수능 이후로 유예된다.

이것 하나만은 분명하다. 직접적인 사고 원인은 조만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밝혀내겠지만, 이번 참변과 수능에 철저히 종속돼 있는 학교교육이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참변을 당한 아이들도 여느 고3들처럼 '수능만 끝나면 지옥 같은 생활에서 해방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되뇌었을 테고, 함께 놀러 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을 것이다. 주말이나 방학 중에 친구들끼리 만나 즐겁게 놀 수 있는 환경이었다면, 어쩌면 계획하지도 않았을 여행일지도 모른다. 그깟 수능이 뭐라고 고3 1년을 '좀비'처럼 지내야만 할까.

더 이상 '대한민국의 고3'이 특별하게 인식되어서는 안 된다. 고3과 고1의 학교생활이 달라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무릇 아이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학부모와 교사라면 아이들이 '수능 하나에 인생이 결정된다'고 믿는 맹목적인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만들 책임이 있다.

다섯 개 중 하나를 고르는 시험 문제에 각자가 하나의 우주라는 인간의 삶이 걸렸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시험 점수로 등급이 갈리고 서열이 매겨지는 건, 공정함이라는 말로 감춘 폭력일 수 있다. 무한경쟁 속에서 자라온 아이들이 쉽게 폭력에 길들여지는 이유다.

한때 대학을 졸업해야 사람 구실 할 수 있다는 말이 회자되곤 했다. 4년제 대학을 졸업한 뒤 취업을 위해서 다시 전문대에 입학하는 요즘엔 그 말이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대신 아이들 사이에서조차 '인 서울'이 아니면 대학도 아니라는 말이 그 빈자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누군가 끊임없이 경쟁을 부추기려는 듯 참람한 말을 지어내고 있는 듯하다. '서성한중경외시'가 최근 '성서한경중외시'로 바뀌었다거나 '지잡대' 졸업자는 고졸자와 동급이라는 등의 밑도 끝도 없는 편견들이 고등학교 교실에 떠돌아다니고 있다. 이 지긋지긋한 '서열 놀이'는 과연 누구의 책임인가.

어차피 '기-승-전-치킨집'이라는 쓰라린 푸념을 '그래도 대박 나는 치킨집 사장은 명문대 출신'이라며 맞받아치고,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명문대 졸업장은 기득권의 입장권이라는 말까지 넘쳐난다. 신분제 사회에서 양반집 족보 구실을 한다는 뜻이다. 여전히 전국의 모든 인문계고등학교에서 명문대 진학 숫자를 늘리기 위해 사활을 거는 이유다.

 
지난 18일 서울 대성고 고3 학생 10명이 모두 의식이 없는 상태로 발견된  강릉에 위치한 펜션(농어촌민박),
 지난 18일 서울 대성고 고3 학생 10명이 모두 의식이 없는 상태로 발견된 강릉에 위치한 펜션(농어촌민박),
ⓒ 김남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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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수능도 '정명(正名)'이 필요하다. 본디 수능은 점수를 따져 줄 세우려는 목적이 아니었다. 그저 대학에 진학해 공부할 수 있는 기본적인 역량을 확인하는, 말 그대로 대학에서의 수학능력을 점검하는 시험이었다. 그런데, 온존한 학벌 구조와 엮이면서 상대평가의 방식으로 등급을 가르고 순위를 매기는 수단으로 전락해버렸다.

온존한 학벌 구조를 타파하지는 못할망정 고등학교가 고유의 교육과정을 내팽개친 채 부화뇌동해서는 곤란하다. 무늬만 대학일 뿐 기능을 상실했다고 손가락질받은 지 이미 오래인 곳에 휘둘릴 까닭이 없다. '공부할 권리'밖에 없는 아이들이 고등학생으로서의 진짜 권리를 누릴 수 있을 때라야 우리 교육은 바로 설 수 있다.

전수조사 운운하며 애먼 학교를 탓할 게 아니라, 이참에 수능이 괴물이 되어 학교 교육 전체를 마구 흔들어대는 현실부터 뜯어고치자. 수능 때문에 고등학교 학창 시절 누려야 할 아이들의 소중한 추억과 꿈이 억눌려서는 안 된다. 학교를 지옥에 비유하는 그들에게 수능 이후가 마냥 천당일 리도 없다. 부디 채 피지도 못한 채 스러져간 아이들의 명복을 빈다.

태그:#강릉 펜션 참변, #수능, #고3 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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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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