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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 순국 제86주기 추모식에서 역사어린이 합창단원들이 묘전에서 손에 태극기를 들고 추모가를 부르고 있다.
 윤봉길 의사 순국 제86주기 추모식에서 역사어린이 합창단원들이 묘전에서 손에 태극기를 들고 추모가를 부르고 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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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구하다
 
2018년 12월 19일은 매헌 윤봉길 의사 순국 제86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날 효창공원 윤봉길 의사 묘전에서는 사단법인 매헌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주최로 제86주기 추모식이 거행됐다. 이날 추모식장은 유족을 비롯해 광복회원, 각계 인사, 윤봉길함 해군 장병 그리고 일반 시민 등으로 가득했다.

매헌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랑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에 자극을 받아 일제 식민지교육에 불만을 품고 덕산보통학교를 자퇴했다. 그후 오치서숙에서 매곡 성주록 선생으로부터 한학을 배우면서 '매헌(梅軒)'이라는 아호를 얻었다.
 
23세 때인 1930년 '장부출가불환'(丈夫出家不還, 장부가 뜻을 세우고 집을 나가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생전의 유서를 남기고 조국독립을 위해 중국으로 떠났다.
 
그 무렵(1931년 7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일제는 한‧중 국민의 이간책으로 만보산 사건을 일으켰다. 만보산 사건은 중국지린성 창춘현 만보산 지역에서 중국 농민과 한인 농민 사이에 일어난 유혈충돌사건을 말한다. 곧 이어 만주사변이 터지면서 중국에 있는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설 자리를 점차 잃어갔다.

김구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에게는 이러한 난국을 헤쳐 나가기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그래서 1931년 말에 비밀리에 '한국애국단'이라는, 일제 요인암살을 목적으로 한 특무조직이자 의열투쟁단체를 만들었다. 임시정부 국무회의는 단장인 김구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한국애국단 제1호 단원은 이봉창이었으며, 제2호 단원은 윤봉길였다.
   
윤봉길 의사가 태극기 앞에서 수류탄을 들고 한인애국단 입단 선서식을 하고 있다(1932. 4. 26.).
 윤봉길 의사가 태극기 앞에서 수류탄을 들고 한인애국단 입단 선서식을 하고 있다(1932. 4. 26.).
ⓒ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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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위해 마땅히 죽을 자리를 마련해 주십시오"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은 도쿄에서 일본 육군 신년 관병식에 참석코자 일왕의 마치가 경시청 정문 앞을 통과할 때 가지고 갔던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커다란 폭음을 내며 폭발했으나 끝내 일왕을 처단하지는 못했다. 그 일로 김구 주석은 실의에 빠져 있었다. 1931년 2월 하순 어느 날 한 청년이 김구를 찾아왔다.
 
"저는 예산 출산으로 훙커우(虹口, 상하이 시가지 북동쪽에 위치한 지명) 시장에서 채소장사를 하는 윤봉길입니다. 선생님께서 제가 나라를 위해 마땅히 죽을 자리를 마련해 주십시오."

"뜻이 있으면 마침내 일을 이룬다고 했소. 내가 요사이 연구하는 것이 있으나 마땅한 사람을 구하지 못해 고민하던 참이오. 신문을 보니 일본이 이번 상하이사변에서 이긴 위세를 업고, 4월 29일은 훙커우 공원(현재 루쉰 공원)에서 왜왕 생일인 천장절 경축행사를 성대하게 치르는 모양인데 이날 군의 일생에 큰 목적을 이뤄봄이 어떠하겠소?"

"좋습니다. 선생님. 저는 이 말씀을 들으니 가슴에 한 점 번민이 없어지고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준비해 주십시오."
  
상하이 홍커우공원(현, 루신공원)의 의거지에 놓인 기념석
 상하이 홍커우공원(현, 루신공원)의 의거지에 놓인 기념석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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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사 날 아침
 
그해 4월 29일 새벽, 김구는 윤봉길과 같이 동포 김해산 집에 가서 마지막 아침밥을 먹었다. 김구가 윤봉길 의사의 기색을 살펴보니 아주 태연자약한 모습이었다. 이윽고 오전 7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윤봉길은 자기 시계를 꺼내 김구의 시계와 바꾸기를 청했다.
 
"선서식 후에 선생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산 것입니다.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이니 제게 주십시오. 제게 시계가 필요한 시간은 이제 딱 1시간뿐입니다."
 
김구는 말없이 윤봉길의 시계를 받고 자신의 시계를 내줬다. 윤봉길은 천장절 식장으로 떠나면서 갖고 있던 돈을 꺼내 김구 손에 쥐어 줬다. 그러자 김구가 말했다.
 
"약간의 돈을 갖고 있는 것이 무슨 방해가 되겠는가?"
"아닙니다. 자동차삯을 주고도 5, 6원은 남겠습니다."

 
곧 자동차가 움직였다. 김구는 목이 멘 채 말했다.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윤봉길은 차창으로 김구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자동차는 경적을 울리며 윤봉길을 싣고 훙커우 공원으로 달렸다.
  
윤봉길 의사와 김구 주석
 윤봉길 의사와 김구 주석
ⓒ 백범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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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 분화(噴火)
 
1932년 4월 29일 오전 11시 40분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 천장절 경축과 상하이사변 승전 기념식장에서 모든 참석자들이 선 채 해군 군악대 주악에 맞춰 일본 국가 기미가요를 부르기 시작했다.

윤봉길은 이때를 하늘이 준 기회로 알고 물통형 폭탄의 안전핀을 뽑아 단상 한복판을 향해 힘껏 던졌다. 폭탄은 포물선을 그리며 힘차게 날아가 단상 중앙에 떨어졌다. 그러자 곧 천지를 뒤흔드는 폭음 소리와 함께 일본 국가의 남은 부분도 함께 묻혔다.

일본인 거류민단장 카와바다는 그 자리에서 죽었고, 일본군사령관 시라카와 육군 대장도 얼마 뒤 죽었다. 이밖에도 일본 해군 제3함대사령관 노무라 중장, 육군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에게 중상을 입었다.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윤봉길의 부르짖음은 우리 민족 항쟁의 불기둥이었다. '4·29 분화(噴火)'로 일컬어지는 윤봉길의 '홍커우공원 의거'는 장엄하게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윤봉길의 의거는 기고만장하던 일제의 기세를 한순간에 꺾어버린 장쾌한 거사로 한국독립운동의 존재를 전 세계에 알렸다.

30만 중국군이 막아내지 못한 일본군의 상하이 침공을 한인애국단 윤봉길이 혼자 해냈다. 홀로 적진 깊숙이 들어가 승전 축하식장을 한순간 불바다로 만들었다.
 
이 거사로 중국 정부는 물론 중국 국민들도 모두 크게 놀라고 경탄했다. 당시 중국군 장제스(장개석) 사령관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한 조선 청년이 해냈다"라고 격찬하면서 임시정부에 대한 대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임시정부의 한인애국단 의열투쟁은 만보산 사건으로 촉발된 한중 민간인 사이의 갈등을 한꺼번에 해소하는 등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한편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그 댓가로 8년간의 고난의 대장정을 치러야 했다. 
 
윤봉길 의사는 그해 5월 25일 상하이파견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후 일본 오사카 육군형무소에 이감된 뒤 1932년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 교외 육군공병작업장에서 총살형으로 장엄하게 순국했다.
 
광복 후 1946년 윤 의사의 유해를 수습해 국민장을 치른 뒤 현재의 효창원 묘역에 안장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윤봉길 의사에게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지난 19일 추모식에서는 국민의례과 약전봉독에 이어 윤봉길함의 함장(박순식 대령)의 유시봉독이 있었다. 
   
윤봉길함 함장이 윤봉길잠수함 사진을 황길수 기념사업회장에게 전하고 있다.
 윤봉길함 함장이 윤봉길잠수함 사진을 황길수 기념사업회장에게 전하고 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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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아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
  
윤봉길기념사업회 황길수 회장을 비롯해 각계의 추모사, 참배객들의 헌화 분향이 있었다. 이어 윤봉길함 함장이 윤봉길함 사진을 황길수 기념사업회장에게 증정하고, 그 답례로 기념사업회 회장이 윤 의사의 유묵과 윤 의사의 사진을 증정했다. 아마도 고인이 가장 듣고 싶어했을지도 모를 정지용 작사의 <향수>가 묘역에 은은히 울려퍼져 참배객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이날 행사의 가장 큰 볼거리는 역사 어린이 합창단의 윤봉길 의사 노래 제창과 대한독립만세 재연이었다. 하늘에 계신 윤봉길 의사도 흐뭇하게 내려다 보셨을 것이다.
 
삼의사(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묘전 앞에 세워진 윤봉길 의사 추모 영정
 삼의사(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묘전 앞에 세워진 윤봉길 의사 추모 영정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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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윤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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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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