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스포츠계 치어리더들의 성희롱 폭로가 나왔다. 시작은 프로야구 삼성 라이온즈에서 활동하는 치어리더 황다건의 SNS 글이었다. 황다건은 자신의 SNS에 '일베(일간 베스트 저장소, 극우 성향의 커뮤니티 사이트)' 게시글을 갈무리해 올리면서 "치어리더라는 직업은 재밌고 좋은 직업이지만 그만큼의 대가가 이런 건가"라고 썼다. 그는 이어 "댓글창은 진짜 더러워 못 보겠고 (중략) 성적으로 성희롱이든 뭐든 너무 심한 것 같은데"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문제의 일베 게시글에는 황다건의 사진과 함께 특정 신체 부위를 거론하거나 "임신시키고 싶다"는 식의 적나라한 성희롱 문구가 담겼다. 사람을 지칭하면서 "암캐"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지난 10일 치어리더 황다건의 SNS에 올라왔다가 삭제된 게시글. 일베 게시판에 올라온 성희롱 글에 관해 토로하고 있다.

지난 10일 치어리더 황다건의 SNS에 올라왔다가 삭제된 게시글. 일베 게시판에 올라온 성희롱 글에 관해 토로하고 있다. ⓒ 황다건 SNS


황다건의 글 이후 다른 치어리더의 고백도 이어졌다. 다음날인 11일, 같은 구단에서 활동하는 동료 치어리더 심혜성도 자신의 SNS를 통해 "'성희롱이 싫으면 노출이 없는 옷을 입어라, 노출 없는 일을 해라'는 말로 피해자에게 모든 책임을 안겼다"라고 적었다. 심혜성은 이어 "수십 수백 명의 치어리더가 성희롱을 수도 없이 당해도 그 중 몇 명이 나처럼 자기 의견을 당당히 알릴 수 있을까?"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초상권도, 피해 입었다고 말할 권리도, 피해자가 될 권리도 그 어떤 인권도 없는 우리일지도"라고도 썼다.

뿐만 아니다. 연이은 폭로로 과거 박기량의 피해 사례까지 다시 거론되고 있다. 롯데 자이언츠 치어리더인 박기량은 과거 방송에 출연해 "기업 운동회에 참여했다가 아버지뻘 관중이 '술 한잔 따라보라'며 유흥업소 여종업원 취급을 했다"라고 밝힌 바 있다.
 
 과거 MBC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치어리더 활동의 고충을 고백한 박기량

과거 MBC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치어리더 활동의 고충을 고백한 박기량 ⓒ MBC

 
'야한 옷이 문제'라는 말, '치어리더를 없애자'는 주장

현재 황다건과 심혜성의 고백 이후 '치어리더를 없애자'는 주장도 나온다. 실제 두 사람에 관한 기사 포털 댓글창에서 "야구장에서 치어리더를 없애면 되지 않느냐"거나 "짧은 치마를 안 입으면 될 일"이라는 비판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도 "치어리더 성희롱과 관련해 스포츠 경기에서 치어리더를 없애 달라"는 글도 올라와 14일까지 약 1000명이 동의한 상태다.

또한 황다건의 SNS에서는 현재 성희롱 폭로 글이 삭제됐지만, 전혀 상관 없는 사진에도 "치어리더는 성희롱 당할 수밖에 없는 직업, 없애는 게 맞다"며 조롱하는 댓글이 수백 건씩 작성돼 2차 피해가 우려되는 상황이다.

치어리더는 할리우드 영화 <브링 잇 온>의 주요 소재로 영화화 됐을 정도로 미국 사회에 팬과 지망하는 사람이 있는 분야다. 또한 여러 나라에 국가대표 선수가 있고, 세계선수권 대회도 개최되며 한때 올림픽 시범종목으로도 거론된 바 있다. 그런데도 정말 치어리더들을 야구장에서 없애는 게 '성희롱 예방'을 위한 최선의 해결책일까?

비슷한 문제를 겪은 레이싱 모델의 사례를 살펴보자. 지난 6월 8일 <한겨레>가 보도한 기사 <페미니즘이 여성 레이싱 모델 일자리를 빼앗았다고요?>에 앞서 언급한 것과 비슷한 차원의 얘기가 나온다. 기사 내용을 짧게 정리하면, 미투 운동이 벌어지고 페미니즘이 사회적으로 거론된 이후 최근 모델 수가 줄어들거나 노출 의상을 피하는 쪽으로 레이싱 모델계가 변화하고 있다는 것. 특히 기사의 마지막에 소개된 레이싱 모델 윤선혜씨의 발언은 치어리더 성희롱 사건에 관해서도 핵심을 찌른다.

"미투 운동과 페미니즘 때문에 여성 레이싱 모델을 더 이상 쓰지 않겠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예전(미투 운동 이전)에는 그런 의도(성 상품화)로 레이싱 모델을 기용했다는 것인가요? 우리는 잘못한 게 없잖아요. 레이싱 모델을 선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문제 아닌가요?" - <한겨레> 2018년 6월 8일자 기사 <페미니즘이 여성 레이싱 모델 일자리를 빼앗았다고요?> 중에서

기억해야 할 말, "성폭력 원인은 야한 옷 아니라 가해자"
 
 영화 <토르: 라그나로크> 마블 최초의 여성 빌런 헬라를 맡은 배우 케이트 블란쳇.

영화 <토르: 라그나로크>에서 여성 빌런 헬라 역할을 맡은 배우 케이트 블란쳇.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영화 <오션스 8> 등에 출연한 배우 케이트 블란쳇은 지난해 공식석상에서 '피해자의 옷차림이 성범죄의 원인'이라는 지적에 직접 반박한 바 있다. 영화 미디어 <씨네 21>이 지난해 10월 30일 발행한 기사에 따르면, 2017 인스타일 시상식에 참석한 케이트 블란쳇은 "우리는 섹시하게 입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것이 당신과 자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치어리더를 없애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떠올리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만약 치어리더를 경기장에서 모두 몰아낸 후, 성희롱을 일삼던 이의 타깃이 다른 분야로 바뀐다면 그것 또한 없애야 할까? 치어리더 다음엔 여성 아이돌, 피트니스 선수, 수영 선수까지, 만약 성희롱이 빈번하게 벌어진다면 하나씩 폐지하고 사라져야 할까?

성희롱 피해를 줄이기 위해 치어리더의 의상에 변화를 주는 것도 방법 중 하나라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여성을 쉽게 성적 대상화하고 눈요기의 대상으로 삼는 문화 자체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결국 전반적인 상황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성이 나서는 많은 분야를 없앤다거나, 치마 착용을 금지하고 긴팔에 긴 바지 몇 겹을 입히더라도 말이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지난 2017년 법무부 주최로 열린 '성폭력 근절 포스터 공모'에서 당선작에 쓰인 문구는 다음과 같았다.

"성폭력, 원인은 야한 옷이 아니라 가해자입니다."
 
 2017년 법무부 주최로 열린 '성폭력 근절 포스터 공모'에서 당선작. 문구로 "성폭력, 원인은 야한 옷이 아니라 가해자입니다"라고 썼다.

2017년 법무부 주최로 열린 '성폭력 근절 포스터 공모'에서 당선작. 문구로 "성폭력, 원인은 야한 옷이 아니라 가해자입니다"라고 썼다. ⓒ 법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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