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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경제를 이끄는 사람이 카드 돌려막기로 급한 불을 끄고 있다면?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가족들은 여간 불안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집안 경제에 대한 신뢰도도 크게 떨어질 것이다. 지금의 세계 정치도 사실상 그런 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미국이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위기를 처리하는 방식은 사실상 카드 돌려막기식과 다를 바 없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부장관이 20일 국무부에서 정책브리핑을 열고 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부장관. 사진은 지난 11월 20일 국무부에서 정책브리핑을 열고 있는 모습.
ⓒ U.S. Department of St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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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지난 7월 29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미국 기업인들과의 모임에서 "베트남이 지나온 길을 북한이 따른다면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며 북한을 상대로 베트남 모델을 권했다. 적대관계였던 베트남과 미국의 수교는 외형상 베트남의 일방적 양보로 이뤄졌다. 베트남이 미국의 요구를 다 들어준 다음에 미국이 베트남의 요구를 들어주는 식으로 관계정상화가 진행됐다.

베트남이 미국의 요구대로 캄보디아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고 미군 실종자 유해 송환에 적극 협력하는 모습을 본 뒤에야, 미국은 베트남의 요구 조건인 경제제재 해제와 수교 협상에 착수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26년 전 1992년 12월 14일 미국 기업의 베트남 지사 개설이 허용됐다. 폼페이오의 7월 29일 발언은 '북한도 베트남을 본받아 미국의 요구조건을 선(先)이행하라'는 의미를 담은 것으로 읽힌다. 

폼페이오를 비롯한 미국 행정부 인사들은 베트남 모델을 그런 의미로 사용하지만, 미국의 세계전략이란 관점에서 이 모델을 음미해보면 카드 돌려막기식 적대 청산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판단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베트남의 구애, 미국 반응은...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를 추구하는 면에서 베트남은 북한보다 훨씬 적극적이었다. 북한도 적극적이지만, 북한은 이따금 자존심을 세울 때가 있다. 그에 비해 베트남은 마치 자존심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물론 자존심을 버린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로 적극성을 발휘했다. 1975년에 미국과의 베트남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대미 수교를 추진했을 정도다. 서보혁 이화여대 통일학연구원 연구위원의 논문 '북한과 미국의 관계정상화에 관한 비교 연구'에 이런 대목이 있다.
 
"통일 직후 공산 베트남 정부의 최대 외교 목표는 경제 재건을 위한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었다. 베트남은 미국과의 관계정상화 조건으로 파리평화협정에 규정된 미국의 전후복구 원조공약 이행과, 닉슨이 '판 반 동' 베트남 총리에게 보낸 서한에서 약속했던 경제원조를 요구했다." - 2008년에 한국국제정치학회가 발행한 <국제정치논총> 제48권 제2호 중
 
아무리 평화협정에 규정됐다 할지라도, 상대방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안긴 직후부터 상대방에게 수교와 경제원조를 열렬히 요구하는 건 한국인들의 정서로는 쉽지 않는 일이다. 그 정도로 베트남은 미국과의 수교에 열성적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반응은 냉랭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 역사상 최대의 치욕을 이 나라에 안긴 국가가 바로 베트남이기 때문이다.
 
 베트남-미국 관계정상화 당시의 베트남 지도자, 레득아인 국가주석.
 베트남-미국 관계정상화 당시의 베트남 지도자, 레득아인 국가주석.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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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 중국은 한국전쟁에서 세계 최강 미국과 무승부를 기록한 사실만으로도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베트남은 애매한 무승부가 아니라 명확한 승리로 미국과의 승부를 마무리했다. '박항서 매직' 이상의 기적을 베트남은 대미관계에서 보여줬다. 그러니 베트남이 허리를 굽힌다 해도, 미국 가슴 속의 싸늘한 냉기가 쉽게 지워질 리 없었다. 양국 사이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베트남의 대미 화해정책은 1984년 12월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전략적 외교정책'을 채택함으로써 가속도가 붙었다. 주요 내용은, 미국의 관심사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미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미국의 반응이 거의 없는 가운데, 1986년 12월 제6차 베트남 공산당대회에서 개혁파가 실권을 완전 장악하고 대대적인 개혁(도이모이)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베트남은 1986년 미국인의 비자 및 여행 허용, 1987년 외국인 투자법 제정, 1989년 캄보디아에서의 완전 철수 선언 등 개혁개방을 적극 추진해나갔다." - 위 논문
 
미국의 관심사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관계를 정상화하겠다는 1984년 12월 방침은, 미국이 요구하는 것이면 뭐든지 다 들어주겠다는 의지의 천명이었다. 이런 방침이 북한 지도부에서 공식화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베트남은 그렇게 했다. 그 방침에 대한 미국의 반응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베트남은 일방적으로 화해 제스처를 보여줬다. 베트남의 태도가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미국은 쌀쌀하게 베트남을 대했다. 그랬던 미국이 1990년대에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 관계정상화에 불을 붙이기 시작한 것. 1992년 12월 14일자 조치에 이어 1993년 7월 2일에는 베트남에 대한 신규 차관 제공을 허용하고, 1994년 2월 3일에는 무역제제 해제 조치를 발표했다. 1995년 1월 27일에는 연락사무소 개설 협정을 체결했다. 이런 과정이 이어진 결과, 1995년 7월 11일 관계정상화가 마무리됐다. 레득아인 국가주석과 빌 클린턴 대통령 때의 일이다.

오랫동안 베트남의 '구애'를 외면했던 미국이 갑자기 적극적으로 바뀐 이유는, 이 시기가 1990년대 전반이라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이때 발생한 동아시아 역학구도의 변화가 미국의 태도를 바꾸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카드 돌려막기식 적대 청산에 관한 이야기가 이제부터 본격화한다. 

왜 '카드 돌려막기' 인가
 
 베트남-미국 관계정상화 당시의 미국 지도자, 빌 클린턴 대통령.
 베트남-미국 관계정상화 당시의 미국 지도자, 빌 클린턴 대통령.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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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쟁의 패색이 짙어가던 1960년대 후반, 미국이 동아시아 패권의 몰락을 막고자 단행한 것은 중국과의 관계 개선이었다. 중국마저 미국에 대항하는 사태를 방지하고자 미국은 중국의 핵 보유를 공인해주고 중국을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만들어줬다. 미국-베트남 사이의 위기를 봉합하고자 미국-중국 관계를 정상화시켰던 것이다. 일종의 카드 돌려막기였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미국이 베트남의 구애를 일관되게 거부한 것은 패전으로 인한 상처 때문이기도 하지만, 관계정상화가 가져다줄 이익이 별로 없다는 판단 때문이기도 했다. 중국과의 협력으로 동아시아 패권을 유지하고 있으니, 경제적 이익도 별로 없는 베트남과 굳이 수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1990년 독일 통일 및 1991년 소련 붕괴로 냉전질서가 해체되면서, 동아시아에도 탈냉전의 훈풍이 불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중국의 꿈틀거림이 현저해졌다. 소련의 영향력이 사라진 틈을 활용해, 동아시아에서 덩샤오핑의 중국이 급부상할 가능성이 커졌다. 바로 이 상황은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태도를 바꾸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때 미국 행정부의 생각은, 중국을 이용해 베트남을 견제하기보다는 베트남을 중국 견제에 끌어들이는 게 더 낫겠다는 쪽으로 전환됐다. 베트남 입장에서도 남중국해 지역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 팽창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양쪽의 이해관계가 그제야 맞아떨어진 것. 정치학자 권경희의 '베트남-미국 관계정상화에 관한 연구(1975-1995)'에 이런 대목이 있다.
 
"전략적으로 하노이와 워싱턴이 중국에 대항해 지역 안보적 측면에서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1993년 로드(Winston Lord)와 라슨(Charles Larson) 같은 고위 장성들의 베트남 방문은, 베트남을 중국에 대한 견제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 1996년에 한국국제정치학회가 발행한 <국제정치논총> 제36권 제1호 중
 
미국이 베트남과 수교한 것은 베트남의 일방적 양보를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위와 같이 1990년대 전반에 중국이 급부상하기 시작한 데 대한 견제 조치의 일환이기도 했다.

1960년대 후반에는 베트남을 견제하고자 중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했던 미국이, 1990년대 전반에는 중국을 견제하고자 베트남과의 관계를 정상화했던 것이다. 

견제와 친교의 방정식
 
 베트남-미국 관계정상화 당시의 중국 실권자 덩샤오핑(오른쪽). 베이징의 '쑹칭링 고거'(송경령 옛집)에서 찍은 사진. 사진은 덩샤오핑의 1979년 모습.
 베트남-미국 관계정상화 당시의 중국 실권자 덩샤오핑(오른쪽). 베이징의 "쑹칭링 고거"(송경령 옛집)에서 찍은 사진. 사진은 덩샤오핑의 1979년 모습.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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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적대 청산 방식은 미국과 여타 국가의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미국이 인도 핵개발을 처음에는 저지하다가 나중에는 묵인한 것은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전략적 필요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중국 핵무기를 견제할 필요에서 인도의 핵보유를 묵인했던 것이다. 오세정 한국지정학연구원 제3연구실장의 논문 '비공식 핵보유 국가가 공식적 핵보유 국가로 부상하는 단계적 전략: 인도의 4단계 핵보유 전략 프로그램을 중심으로'의 설명을 들어보자.
 
"(중국은) 위로는 소련, 아래로는 인도의 핵 위협에 대항해야 할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중략) 인도가 핵무기를 보유하게 됨으로써 중국의 아시아 지역 패권 달성에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 2017년에 한국세계지역학회가 발행한 <세계지역연구논총> 제35집 제3호 중
 
미국이 인도의 핵보유를 묵인한 또 다른 이유는, 인도 핵실험 뒤에 핵개발을 추진한 파키스칸을 견제하는 데 있었다. 중국뿐 아니라 파키스탄까지 함께 견제하고자 인도의 핵보유를 묵인했던 것이다. 중국과 파키스탄에서 자국을 향해 불어오는 위기를 차단하고자 인도와의 대결 관계를 해소했던 것이다.

파키스탄 핵실험을 묵인할 때도 그런 패턴이 나타났다. 인도 핵실험에 자극받아 핵개발에 나선 파키스탄은 1986년에 원자폭탄용 우라늄 농축에 성공했다. 레이건 행정부가 이를 묵인한 것은,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한 소련을 견제하자면 파키스탄의 협조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인도 핵무기로 파키스탄 핵개발을 견제하면서, 한편으로는 소련의 남아시아 진출을 저지하고자 파키스탄 핵개발을 묵인했던 것이다.

이처럼 미국이 특정 국가와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거나 핵보유를 묵인할 때는 '이 나라와의 화친이 누구를 견제하는 데 유용할까'가 중요한 기준이 된다. 경제적 이익이 기대되지 않을 경우에는 이런 기준이 크게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말해, 일관된 원칙 없이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입장을 뒤바꾸고 있는 것. 세계 최강이 이런 식으로 국제질서를 운영하고 있으니, 현존 세계질서가 얼마나 불안정인가를 절감할 수 있다.

북미관계라고 해서 그런 패턴이 나타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북한과의 관계정상화에서 대단한 경제적 이익을 예상할 수 없다면, 미국은 베트남·중국·인도·파키스탄에 했던 것처럼 '북한과의 화친이 누구를 견제하는 데 유용할까'를 끊임없이 고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유용성이 있다는 확신이 서면, 미국의 태도가 갑자기 적극적이 될 수도 있다. 그런 패턴이 향후 북미관계에서 나타날지, 나타난다면 어떻게 전개될지 주목된다.
 
산책 나선 북-미 정상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12일 오후 싱가포르 센토사섬 카펠라호텔에서 회담을 마친 뒤 산책을 하고 있다.
▲ 산책 나선 북-미 정상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 사진은 2018년 6월 12일 오후 싱가포르 센토사섬 카펠라호텔에서 회담을 마친 뒤 산책을 하고 있는 모습.
ⓒ 케빈 림/스트레이츠 타임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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