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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에 앞서 '말(하기)' 관련, 부끄럽고 후회스러운 실수 두 가지부터 고백해야겠다. 오랫동안 마음속에 두고 거울에 내 모습을 비춰 보듯 내 말 씀씀이를 비춰보곤 하는 멘토 같은 사건이다.

고등학교 2학년 어느 날, 친구A가 학교에 치마를 입고 왔다. 얼마전 시행된 교복 자율화로 아이들이 멋을 한껏 부리곤 했다. 그럼에도 그 친구는 멋도 내지 않고 오직 바지만 입었다. 그 친구가 왜 치마를 입지 않나? 궁금해 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혹시 다리를 드러내지 못하는 큰 상처라도 있는 것 아냐? 추측하는 친구들까지 있을 정도였다. 

그런 친구가 치마를 입고 온 것이다. 그 친구를 누구보다 먼저 보게 된 난 "ooo 치마 입은 희한한 꼴 좀 봐라"고 했다. 정말 잘 어울린다는 것과 반가움을 그만 잘못 표현한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희한한 꼴'이라니! 말이 끝나자마자 내 스스로 깜짝 놀랐다. 내 말에 그 친구는 눈을 흘기며 가볍게 화를 냈다. 변명을 했지만 궁색할 뿐이었다. 

그 날 이후 그 친구는 졸업할 때까지 단 한 번도 치마를 입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은 이후에도 그 친구와 변함없이 어울렸던 것은 내게 악의가 없음을 그 친구가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 친구를 보며 후회되곤 했다. 그렇건만 사과할 기회도 얻지 못하고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털어내지 못하고 있다. 

10여 년 전, 단체로 강화도 연미정에 갔다. 연미정으로 향하는 길, 커다란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에서 걷던 B 기자가 나무 이름을 물었다. 그동안 글을 통해 내가 자연 환경에 관심이 많다는 걸 잘 알고 있어서, 그러니 나무 이름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라 믿고 물었을 것이었다. 그런데 난 가벼운 신경질조로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라고 반문했고, 말이 끝나는 순간 스스로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내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황당한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B기자에게 변명이라도 하자 싶었지만 일정에 휩쓸리면서 기회가 없었고, 이후 일부러 변명하기에는 뭔가 어색하게 되고 말았다. 여하간 그날 이후 '최대한 말조심하자,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는 말은 하지 말자, 가급이면 누군가 기분 좋고 힘이 나게 하는 말을 하자, 생각 없이 스스로의 인격을 깎는 경솔한 말을 하지 말자'고 다짐하곤 한다. 그러나 쉽지 않다.
 
우리는 독은 나쁜 것이고 약은 좋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독은 사람을 죽이고, 약은 사람을 살리기 때문이겠지요. 정말 그럴까요? 아이러니하게도 이 말은 정답이 아닙니다. 독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반대로 약이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독(毒)이라는 한자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작은 양으로 병을 고친다는 뜻도 담겨있습니다. 약(藥)이라는 한자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놀랍게도 '독'이라는 뜻도 나타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독약(毒藥)이라는 단어는 묘한 조합의 말이 됩니다. 독이 곧 약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독도 약입니다. 그게 우리에게 깨달음을 줍니다. 약은 사람을 살리는 게 주목적이지요. 당연히 약은 고마운 것입니다. 그런데 약은 지나치면 문제가 됩니다. 독이 되어 버리는 거지요. 약의 남용을 주의해야 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닙니다. 그래서 무시무시한 말이기는 하지만 '약 먹고 죽었다'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약 먹었니?'라는 힐난도 결과적으로는 약의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한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 91~92쪽 '독약-독이 곧 약이다'에서. 
 

<우리말 지혜>(마리북스 펴냄)는 우리말에 담긴 지혜를 헤아려봄으로써 '지혜롭고, 현명한 삶을 꾸리자. 말하는 스스로가 편하고 서로를 귀하게 하는 말을 하자.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기분 좋아지는 말, 긍정과 위로의 말을 나누자'는 취지의 책이다.
 
<우리말 지혜> 책표지.
 <우리말 지혜> 책표지.
ⓒ 마리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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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30여 년 전 친구에게 했던, '꼴사납다, 꼴이 그게 뭐냐?, 꼴같잖게, 꼬라지하고는' 등처럼 누군가를 얕잡아 보거나 비하하는 말이라 어떤 경우에든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꼴'을 주제로 한 글도 있어서 뜨끔해져 읽은 책이기도 하다.

저자가 양면성을 가진 '독약'이란 말를 통해 제안하는 삶의 지혜와 현명함은 '지나침에 대한 경계'다. 우리 누구나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어느 순간 그 정도를 넘고 말아 갈등과 싸움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 사랑이라는 이유로 상대방을 사사건건 간섭하거나 집착하게도 하는 그 지나침,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란 말 속 그 지나침 말이다. 

저자는 이어 제안한다. '알맞음의 미학은 늘 어렵지만 그래서 더 아름답기도 하다. 독을 약으로 바꾸는 삶을 살자. 약을 약으로 남게 하는 삶을 살자. 다른 사람에게도 약이 되는 인생을 살자. 세상에 나쁘기만 한 것은 없다'고. 

아마도 나처럼 어떤 이유로든 말실수를 해놓고 고민하거나 후회해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하거나 힘 빠지게 하는 말은 상대방도 상대방이지만 뭣보다 그런 말을 한 자신을 더욱 기분 나쁘게 하고, 힘들게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먼저 깎아내린다는 것을 말이다. 

친구 A가 그날 이후 치마를 두 번 다시 입지 않았던 것은 '입어 보니 생각보다 불편해서' 등과 같은 그 친구만의 어떤 사정 때문일 수도 있다. B기자는 별 생각 없이 받아 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들은 전혀 기억조차 없는데 그처럼 말한 나는 이처럼 한참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날의 정황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오랫동안 미안해하고, 이처럼 후회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말하는 스스로도 기분 좋고 누군가도 기분 좋은, 서로에게 힘이 되는 말하기를 할 수 있을까.  

우리말을 제대로 쓰자며 틀린 말, 잘못 쓰이는 말을 바로잡아 주는 책들이 많아 반갑다. 그만큼 우리말이 많이 오염되었다는 방증일 것이나 우리말을 제대로 살려 쓰자는 노력이나 바람도 그만큼 많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책들은 일상에서 말하기보다 문장을 제대로 쓰는 데 우선 더, 그리고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말 지혜> 역시 우리말에 관한 책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책들과 방향이 다르다. 어원이나 규칙, 맞춤법, 띄어쓰기 등을 이야기하기보다 우리말에 담긴 먼 옛날부터 이어져 온 삶의 지혜들을 들려줌으로써 우리말을 돌아보게 하고, 나아가 바람직한 말하기를 고민하고 노력하도록 의도한다.

정말?, 장난, 바보, 노래, 꼴(꼴 좀 봐라 등), 바쁘다, 비슷하다, 좋다, 반갑다, 덮어 놓고, 알고 보니 등처럼 우리가 거의 매일 쓰다시피 하는 보편적인 말들을 다루고 있어서 더욱 도움 될 책이다. 

우리에게 책이 필요한 이유 중 하나는 바람직한 쪽, 좋은 쪽으로 바뀌는 삶을 사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동안 무심했던 뒷모습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한, 인상 깊은 부분을 덧붙이는 것으로 책 소개를 마쳐야겠다. 참, 이 책의 글들은 전체적으로 잔잔하며 쉽게 읽을 수 있는 글들이다. 그런데 오랫동안 생각하도록 여운 깊은 글들이다.
 
모습에도 표정이 있습니다. 남에게 뒷모습을 보일 때도 조심해야 하는 이유이지요.(…)부모는 자식의 뒷모습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합니다. 몇 해 전에 제가 좀 힘든 일이 있을 때였습니다. 마침 부모님을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저를 반기는 부모님을 뵈니 제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그런데 저도 모르게 중간중간 한숨을 쉬었는지, 저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에 안타까움이 가득했습니다. 그런 저를 보고 돌아서서 가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그렇게 쓸쓸해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생각했습니다. '사람의 뒷모습은 참 쓸쓸한 것이구나!' 부모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참 쓸쓸한데, 자식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더할 것입니다.

어깨가 축 처져서 걷는 자식의 모습은 부모에게 아리고 아픈 순간입니다. 부모에게 뒷모습을 보일 때는 어깨를 펴고 걷기를 바랍니다. 뒷모습에는 쓸쓸함만 있는 게 아니니까요. 웃음도 있고, 씩씩함도 있고, 당당함도 있습니다. 이왕이면 부모님께, 자식에게 그런 뒷모습을 보여주기 바랍니다. - 89~90쪽, '뒷모습-쓸쓸함도 웃음도 있다'에서.

우리말 지혜 - 나를 편하게 서로를 귀하게

조현용 지음, 마리북스(2018)


태그:#우리말 지혜, #조현용(국어학자), #뒷모습, #우리말, #과유불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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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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