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선녀전>

<계룡선녀전> ⓒ tvN

 
 
tvN 드라마 <계룡선녀전>에는 고려시대부터 현재까지 하늘 세계에서 있었던 가상의 사건들이 자주 묘사된다. 지상 인류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하늘 인간들, 즉 선녀와 신선들의 일상이 작가의 상상력으로 전개되고 있다.
 
하늘 인간 중에서 특히 신선에 대한 관념은, 불교·개신교·가톨릭이 대세인 현대 한국에서도 일반 대중의 의식 속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자신이 믿는 교리와 어긋난다 해서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TV 화면에 신선들 좀 그만 나오게 하라!"고 요구하는 시청자들은 없거나 드물거나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 한국인들은 어렸을 때부터 신선에 관한 이야기에 친숙하다. <계룡선녀전>의 배경이 되는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도 그렇고, 백발노인 모습으로 등장하는 산신 혹은 신선이 정직한 나무꾼에게 행운을 안겨주었다는 <은도끼·금도끼> 이야기도 그렇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성장한 탓에, 한국인들은 드라마에 나오는 신선들에게 별다른 거부감을 갖지 않는다.
 
유교 이념이 지배한 조선시대 사람들의 의식에서도 그런 알레르기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조선시대에는 신선에 관한 서적을 공식적으로 금지했다. 하지만, 이것은 꼭 종교적인 이유라기보다는 정치적 이유에 좀 더 크게 기인한 것이었다.
 
명나라와 동맹을 맺자니, 조선 지배층은 고조선 이야기를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뿐 아니라 고조선도 중국 땅을 위협했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두 나라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갖고 있었다.

단군이 신선이 됐다는 <삼국유사> 기록에서 느낄 수 있듯이, 고조선 사람들은 선녀나 신선처럼 장생불사하는 삶을 꿈꾸었다. 그것이 고조선의 지배적 신앙이었다. 그래서 조선 지배층은 고조선과 더불어 신선교에 대한 언급도 자제했다. 신선교가 중국 도교와 유사한데도, 명나라와의 관계를 고려하느라 신선교 서적을 금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금지했을 뿐, 철저한 내면적 신념으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중국 도자기에 그려진 신선세계. 중국 도자기 명산지인 경덕진에서 생산된 제품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중국 도자기에 그려진 신선세계. 중국 도자기 명산지인 경덕진에서 생산된 제품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그처럼 신선 신앙에 대한 저항이 피상적이었기 때문에, 일반 대중뿐 아니라 지배층인 선비들의 머릿속에도 신선 같은 삶에 대한 갈망이 상당히 강하게 각인돼 있었다. 선비들이 어려운 자리에서 체면을 차리고 말할 때는 공자님·맹자님을 운운하면서도, 편한 자리에서 술을 마시며 흥에 겨워 대화하거나 즉흥시를 읊을 때는 선녀나 신선을 운운한 사례가 매우 많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홍길동전> 저자 허균의 누나인 허난설헌(허초희)의 시에서도 그런 분위기가 나타난다. 유교적 가풍에서 성장하고 중국에까지 명성을 날린 저명한 시인인 허난설헌의 시에서도 신선세계에 대한 친숙함이 묻어난다. 귀양에서 풀려난 오빠 허봉에게 보낸 그의 시에 "깨끗이 제단 닦아 상선(上仙)님께 예를 올리니"라거나 "향기나는 선녀들 봄놀이 바쁜데" 같은 표현들이 나오는 것은, 그의 머릿속에서 신선세계가 꽤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음을 보여준다.
 
광해군 시대에 대학자로 명성을 날린 어우당 유몽인의 <어우야담>에는 유명한 재상인 이원익이 수험생 시절에 불교 사찰에 갔다가 "상선(上仙)들이 모여 연회하는" 신선세계를 경험했다는 일화가 소개돼 있다.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저명한 유학자의 책에 아무렇지도 않게 언급될 정도로, 신선에 대한 이야기가 선비들 사이에서도 자유롭게 오고갔음을 느낄 수 있다.
 
 
 서울 양화대교 북단에 있는 정몽주 동상.

서울 양화대교 북단에 있는 정몽주 동상. ⓒ 김종성

 
 
조선 유학자들의 사표로 추앙되던 포은 정몽주의 문학작품에서도 그런 정서가 표출된다. 고려 멸망 12년 전인 1380년에 이성계와 함께 왜구를 격퇴하고 돌아오다가 전라도 전주에서 창작한 시를 보면, 정몽주의 머릿속에서도 공자·맹자 못지않게 신선이 꽤나 큰 비중을 차지했음을 느낄 수 있다.
 
1380년 어느 날 저녁 무렵에 지은 <전주 망경대에 오르다>에서, 그는 방금 전에 사라진 태양빛을 그리워하며 "하늘가에 지는 해가 뜬구름에 묻혀 버리자, 서글프게도 옥경(玉京)을 바라볼 수 없게 됐네"라고 노래했다. 시 속의 '옥경'은 고려 임금이 사는 개경을 상징하지만, 신선세계의 도읍인 옥경을 개경에 빗댔다는 것은 의식 속에서 그 세계에 대한 동경심이 작동하고 있었음을 반영한다.
 
유교 선비뿐 아니라 불교 승려들 중에도, 깨달음의 경지보다는 장생불사의 경지를 추구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일례로, 임방(1640~1724년)이 시인과 시에 얽힌 이야기들을 정리한 <수촌만록>에는 1600년대 중반에 태어난 도영이란 불교 승려가, 백세에 가깝도록 동안 피부를 유지하면서 곡식도 먹지 않고 대소변도 보지 않으며 수행에 정진한 이야기를 소개한 뒤 "몇 십년 뒤에 들으니 도영은 이미 신선이 되어 갔다는 것이었다"는 말로 결론을 맺었다.
 
유교는 종교적 색채가 옅은 이념체계다. 공자·맹자가 가르친 사상은 오늘날로 치면 종교학이나 철학보다는 정치학 혹은 윤리학에 가깝다. 당시에는 학문 분화가 이뤄지지 않다 보니 대부분의 학문이 죄다 종교나 철학으로 간주됐다. 공·맹이 오늘날 출현했다면, 그들의 학문은 분명히 정치학이나 윤리학에 포함됐을 것이다.
 
종교적 색채가 엷다 보니, 유교는 인간의 근원적 고민에 대한 해답을 주기 힘들었다. 대부분의 인간은 하루하루 늙어가는 자신을 서글퍼하면서 살아간다. 20대 중반만 넘어도, 나이 들어가는 스스로를 의식하게 된다. 사회가 어떻게 바뀌고 세계가 어떻게 바뀌고 하는 문제 이상으로, 우리 대부분은 우리 피부와 신체가 어떻게 바뀌어 가는가에 초미의 관심을 갖고 산다.
 
정몽주 시집에서도, 하루하루 늘어가는 흰 머리카락을 보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서글퍼하는 감정이 매우 자주 드러난다. 이처럼 유학자들도 자신이 늙어가는 것을 슬퍼하기는 매한가지인데 유교에서는 해답을 주지 않으니, 그들 역시 장생불사하는 신선의 삶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공식적으로는 신선세계에 대한 언급을 기피하면서도, 사적 영역에서는 공자님·맹자님보다 신선들을 더 많이 동경하고 그에 대한 시를 남기곤 했던 것이다.
 
오늘날의 시청자들이 <계룡선녀전> 같은 드라마에 나오는 선녀나 신선들을 별 거부감 없이 바라보는 것처럼,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머릿속에서도 그들에 대한 거부감이 별로 없었다. 그들의 의식 역시 인간 공통의 고민인 생로병사와 인간 공통의 꿈인 장생불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계룡선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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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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