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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지 않고 많이, 잘 먹는 것을 미덕으로 알고 살았다. 가정 내 분위기도 그랬지만 내 잔망스러움도 한몫 했다. 어린이가 청국장에 파김치를 좋아하면 어른들이 칭찬하는 걸 일찍이 파악하고 만 것이다. 좋아서 먹었을 뿐인데 칭찬이라니, 이게 웬 떡인가.

딱히 할 줄 아는 재주 없고 내성적인 어린이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어린이 기피 음식에 대한 선호를 무럭무럭 키웠다. 식탁 위의 소시지가 나를 유혹해도, 내 젓가락은 시뻘건 고춧가루로 칠갑한 고등어조림을 향해 돌진했다. 갈수록 더 다양한 음식을 먹었고, 또 좋아하게 됐다.

타고난 체질 또한 나의 잡식을 거들었다. 내 몸은 모든 음식을 잘도 받아들였다. 한의원에서 음식에 대한 질문지를 작성하면 내 답은 단순한 일렬종대를 이뤘다. 좋아하는 음식은 전부. 싫어하는 음식은 전무. 소화가 안 되거나 불편한 음식이 하나도 없냐는 질문에, 곰곰 생각해 봐도 없었다. 

무엇이든 잘 먹고 건강했으면 좋은 일이지만, 문제는 늘 죄의식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동물을 볼 때마다 고통스러웠다. 어떤 동물이든 상관없었다. 어떤 동물은 먹고, 어떤 동물은 먹지 않는다는 사실은 전혀 위안이 되지 않았다. 내가 그 어떤 동물이든 먹을 수 있는 존재라는 생각에 괴로웠다.

편리하게도, 먹는 순간엔 잊었다. 돌아서면 이내 생각났다. 기분 좋던 포만감은 얼마 안 가 불쾌감으로 바뀌곤 했다. 불필요하리만큼 많이 먹고, 또 죄의식에 시달리는 과정을 무한 반복했다. 내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졌고, 죄의식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몇 달 전, 그래서 무턱대고 채식을 시작했다. 따로 공부를 하거나 알아보지도 않았다. 내 기준은 오직 '죄의식'이었다. 영양학적 고려도 없었고, 선택의 합리성을 따져보지도 않았다.

육류는 일절 먹지 않았고, 좋아하던 우유와 계란도 끊었다. 그러면서도 계란과 버터가 들어갔을 빵은 별 생각없이 먹었다. 생선은 간혹 먹었지만 전처럼 내키지 않아 먹는 횟수가 줄었다. 그러나 우습게도, 어묵은 줄기차게 먹었고, 제철 맞은 조개류 또한 양껏 먹었다.

그렇게 7개월 넘게 이상한 채식을 유지했다. 기준이 모호하므로 엄격한 채식에 비교하면 한심할 정도다. 그러나 육류 섭취를 완전히 배제한 것만으로도 내겐 커다란 변화였다. 치킨은 한 마리, 모든 고기는 최소 2인분을 기본으로 알고 살아온 나다.

한동안 채식이 너무도 쉬워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고기가 전혀 먹고 싶지 않았다. 이토록 쉬운 것이었다면 진작 했어야 한다며 스스로를 답답하게 여겼다. 어쩌면 나는 고기를 좋아한 적이 없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과 어울리며 함께 먹고 즐기는 문화를 좋아한 것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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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 순간 다시 손을 대고 있었다, 하는 말을 이토록 생생하게 체험한 것은 처음인 듯하다. 딱히 고기를 갈망한 적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내 몸은 원하고 있던 걸까.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 순간 다시 손을 대고 있었다, 하는 말을 이토록 생생하게 체험한 것은 처음인 듯하다. 딱히 고기를 갈망한 적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내 몸은 원하고 있던 걸까.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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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며칠 전, 만 8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내 채식은 중단되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간절하게 고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뚜벅뚜벅, 심지어 혼자서 치킨집에 갔다. 마치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프라이드 치킨 한 마리를 포장해온 나는, 곧 한 조각도 남김없이 앙상한 뼛조각으로 변신시켰다. 

중독성 물질은 아니지만,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 순간 다시 손을 대고 있었다, 하는 말을 이토록 생생하게 체험한 것은 처음인 듯하다. 딱히 고기를 갈망한 적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내 몸은 원하고 있던 걸까. 40년 가까이 다량의 고기를 섭취해온 나는 영 고기를 끊을 수 없는 걸까. 불안감이 엄습했다. 

합리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금연도 무수히 실패한다고들 하지 않던가. 한 번의 실수야 뭐 어떤가. 실패를 딛고 꿋꿋이 계속하면 되지, 하며. 하지만 뭔가 개운치 못했다. 채식을 선이라고 생각지도 않지만, 혼자 고기를 먹은 나 자신이 어쩐지 위선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무엇보다 가장 불안한 것은, 처음 채식을 시작할 때의 내 당찬 기세가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이다. 나를 믿을 수 없었다. 어느 순간 또 고기를 뜯고 있지 않을까. 나는 고작 식욕 때문에 죄의식을 뒤로 하는 인간이란 말인가.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작한 채식이, 또 다른 죄의식이 되어 나를 덮치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얼마 전 친구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나의 채식에 대한 고민과 시도를 그가 진심으로 존중하고 지지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가능한 대화였다. 친구는 말했다.

"사자가 짐승을 잡아먹을 때 죄의식을 느낄까? 혹은 느껴야만 하는 걸까? 그냥 그 자체로서 '자연'이고 '자연스러운 것'은 아닐까?"

나는 말했다.

"그럴 수도 있지만, 우리는 느끼잖아. 정도의 차이일 뿐, 모두 다 동물을 죽여서 먹는다는 죄의식이 있잖아. 이 죄의식 또한 자연스러운 건 아닐까? 무시해야 하는 걸까?" 

문득, 정답은 하나가 아닌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잡식성 동물이라는 것과 죄의식을 지닌 인간이라는 것, 그 사이 어딘가에 진실이 있지는 않을까.

자학은 그만두기로 했다. 내 의지로 평생의 (식)습관을 반 년이상 바꾸었다는 것만으로도 대견하게 여기기로 했다. 이 모든 것이 실패에 대한 변명이라 해도 괜찮다. 나는 고민했고, 실행했고, 또 고민할 테니까. 

나는 아직도 혼란 속에 있다. 이전의 섭식으로 돌아갈지, 실패할지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채식을 시도할지. 다만, 무엇을 택하든 죄의식에서 도망치지 않기로 결심했다. 기괴할지 모르지만, 불판 위의 고기를 보며 기꺼이 살아 있는 소를 떠올리려고 한다. 애써 잊으려 하지 않을 테다.

입맛이 달아나면 먹지 않으면 그만. 죄의식을 느끼면서, 그래도 먹어야겠다면, 감사한 마음으로 먹으려고 한다.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작했던 채식은, 나를 죄의식과 직면하게 했다. 언제 바뀔지 모르지만, 지금의 나는 이 방법이 더 마음에 든다.

채식을 하는 동안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을 접하게 되었다. 다짜고짜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도 있었지만, 좋은 벗들과 많은 생각들을 나눌 수 있어서 행복한 시간이 더 많았다. 섭식과 소비에 관한 우리의 고민이 계속 되었으면 한다. 혼란이 계속될지라 해도.

태그:#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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