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 공식 포스터.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 공식 포스터. ⓒ 커넥트픽쳐스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배우 출신 감독 추상미가 메가폰을 잡은 다큐멘터리 작품으로 두 가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1951년 폴란드로 보내진 1500명의 북한전쟁 고아와 그 아이들을 사랑으로 돌봐준 폴란드 선생님들에 관한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찾아 떠나는 남북 두 여자가 그곳에서 맞이한 치유에 관한 이야기다.
 
한국전쟁 때 많은 고아들이 폴란드로 갔다는 사실은 생소한 이야기다. 북한 아이들은 사회주의 동맹 국가들인 불가리아, 체코, 헝가리, 루마니아, 동독, 폴란드와 같은 나라로 보내졌다. 당시 사회주의 국가들은 '사회주의는 모두 형제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었다.
 
추상미 감독은 이런 사실을 접하고 영화를 만들기 위해 시나리오 작업을 한다. 등장인물 대다수가 북한 어린이이기 때문에 탈북 청소년을 대상으로 오디션을 봤다. 그렇게 조연배우 중 가장 비중 있는 인물로 뽑힌 사람이 배우 지망생 이송이다. 추감독은 역할 설명 및 연기지도도 해주고 영화의 시대적 배경들을 보여줄 겸 이송에게 폴란드로 같이 갈 것을 제안한다. 이송은 흔쾌히 받아들였고 이렇게 남과 북 출신의 두 여자가 폴란드로 길을 떠난다. 이 이야기로 극영화 제작을 준비하고 있는 추감독은 사실 확인과정을 다큐로 만들었고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폴란드로 간 아이들이다.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 스틸 사진.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 스틸 사진. ⓒ 커넥트픽쳐스

 
대략 4살~12살 정도의 전쟁고아 수천 명이 각기 다른 나라로 뿔뿔이 흩어졌고 그 중 가장 많은 아이들이 폴란드로 갔다. 놀라운 건 2013년 전 폴란드 대통령 '브로니스와프 코로모프스키'가 방한해 청와대 오찬 자리에서 처음 이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이다. 1955년부터 2년 동안 그의 어머니는 북한 어린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교사 일을 했고, 그때 그와 누이는 북한아이들과 같이 연극을 했었다고 그는 증언했다.
 
그런데 폴란드로 보내진 아이들은 북한 아이뿐만이 아니었다. 한국전쟁이 정점이던 당시 북한군이 서울 이남까지 밀고 내려왔고 남북한 할 것 없이 아이들은 트럭에 실렸다. 고향이 어딘지, 출신을 따질 정황이 없었던 전쟁 통이다. 이 이야기를 오랫동안 취재한 폴란드 기자 '욜란타 크리소바타'는 이 사실을 뒷받침하는 자료들을 모아 다큐로 만들어 폴란드 국영tv에서 방영했다. 동시에 이 이야기를 원작으로 한 기록소설 <천사의 날개>를 썼다. 그녀에 따르면 아이들은 정확히 반반이었다고 한다. 남한과 북한 어린이의 숫자가.
 
1950년대는 예술적으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팽배하던 시기였다. 즉, 예술가들의 사회참여가 높았다는 뜻이다. 그런 맥락에서 다행히도 폴란드 사진작가가 북한 아이들을 기록하는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 놓았다. 기차역에 도착하는 불안한 모습이며 수업하는 모습, 뛰어 노는 모습 등 다양한 자료가 남아있다. 그런 자료를 바탕으로 이 영화는 이어간다.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 스틸 사진.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 스틸 사진. ⓒ 커넥트픽쳐스

 
당시 300명의 폴란드 선생님들이 1500명의 아이들을 돌봤다. 대부분 사망하고 10여 명의 선생님들만 생존해있다. 그들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가르쳤던 아이들의 이름과 한국말과 그들의 일화까지. 선생님들은 학생들의 사진을 아직도 보관하고 있었고 아이들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그리움의 눈물을 쏟았다. 너무나 인상적인 장면이다. 90이 다 된 노인들이 하나같이 눈물을 흘리며 그 아이들을 그리워했다.
 
"불안감에 떠는 눈동자와 짧게 자른 머리카락. 심한 충격을 받은 상태였어요. 이불이 있는데도 침대 아래로만 숨었어요. 또 폭탄이 터질까 무서웠던 거예요. 뭐든지 다해주고 싶었습니다. 아이들이 상처를 회복할 수만 있다면."
 
"종종 아이들은 전쟁의 기억 때문에 악몽을 꾸고는 했어요. 그러면 밤새 달래줘야 했죠."
 
"여기 와서 삶의 즐거움을 누리기 시작했어요. 잘 먹었고 보호를 받았고 아이들도 이제 안전하다는 걸 알았어요. 예전의 즐거움이 다시 돌아오고 있었죠." - <폴란드로 간 아이들> 중에서.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커리큘럼이 아니라 부모란 걸 원장과 선생님들은 알았다. 그래서 호칭을 모두 엄마 아빠로 통일해서 부르게 했다. 그렇게 아이들은 그 곳에서 8년이란 시간을 보낸다. 그렇게 전쟁의 트라우마를 잊어갈 무렵 '전원 북송'이라는 청천 벽력같은 소식을 듣게 된다. 북한은 전쟁 후 경제회복을 위해 인민의 노동력을 기반으로 하는 천리마운동을 추진했는데 사춘기 아이들로 성장한 이 아이들도 그 대상이 되었다. 불과 떠나기 일주일 전 아이들의 북송결정이 전달되었고 아이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아이들은 눈 위에 눕거나 자기 몸에 찬 물을 끼얹기도 했어요. 몸을 아프게 해서 가지 않으려고요." 아이들과 정이 들대로든 선생님 몇 분은 입양 신청서를 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렇게 남한에서 온 아이들까지 전원이 북송되었다. 그렇게 아이들을 떠나보내야 했던 선생님들은 오열하며 마치 자신의 아이와 생이별을 한 듯 아파했다.
 
"아이들과 이별하는 것은 너무 힘들었어요."
"그 아이들에게 우리가 사랑한다고 전해주세요."

 
당시 폴란드는 자신들도 2차 세계대전을 온 몸으로 겪고 만산창이가 된 상태였다. <쉰들러리스트> <피아니스트>와 같은 2차 세계대전을 다룬 걸작영화의 배경이 바로 폴란드다.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또한 폴란드에 있으니 그들의 고통을 감히 짐작할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타국의 아이들을 이렇게까지 품을 수 있었을까. 답은 그 상처에 있었다. 선생님으로 부임 받은 많은 수가 전쟁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거나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동양의 먼 나라에서 온 이 작은 아이들이 자신의 유년시절 일부 분신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자신의 상처를 보듬듯이 아이들을 온 몸으로 껴안았다. 상처는 사랑이 되고 사랑은 상처를 치유했다.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 스틸 사진.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 스틸 사진. ⓒ 커넥트픽쳐스

 
이 여행에 동참한 이송은 밝은 가면을 쓰고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지 않는다. 폴란드 선생님들은 이송이 북한 출신이란 사실을 알고 마치 예전의 학생을 다시 만난 듯 껴안아주고 위로해준다. 그 아이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는 그들을 보며 이송은 차츰 자신의 상처를 꺼내 보인다. 잔뜩 흐린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울부짖는 이송과 그녀를 껴안는 추상미. 나도 얼마나 울었는지 손끝에 전기가 왔다.
 
이 영화는 남북통일이나, 난민 문제 등 시사하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무엇보다 내게 인상 깊은 건 상처를 다루는 방식이다. 상처받은 사람들은 자신이 받은 상처 크기를 내세워 다른 사람의 상처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것쯤으로 치부하거나, 혹은 받은 만큼 갚아주는 방법을 택하는 경우가 있다. 이럴 경우 상처의 악순환이 발생한다. 상처를 사랑으로 감싸는 경우 놀랍게 스스로의 상처가 회복되는 놀라운 선순환이 생김을 이 영화는 잘 보여준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놀라운 경지다. 추 감독은 이 영화의 마지막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 진짜 사랑이 존재하는구나."
눈물 손수건 필수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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