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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광장

광화문 광장에 수많은 시민이 모여 촛불을 든 지도 2년이 지났다. 당신은 그날을 기억하는가? 그날의 광장은 취업에 허덕이는 젊은이들 것도 아니었고 쉬지 않고 일하며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어른들 것도 아니었다. 국방의 의무를 다한 뒤 홀가분하게 병역특례를 논하는 남성 것도 아니고 안희정 사건을 보며 분노해 길거리로 나온 여성 것도 아니었다. 그날의 광장은 어떤 누구 것도 아니었다.

우리에게 지난날의 광장은 평범한 소시민들이 월드컵 때처럼 기쁠 때는 서로 부둥켜안고, 세월호 사건 때처럼 아플 때는 서로 마음을 위로하고 국가를 향해 정의를 외치는 공간이었다. 광장의 역사는 오래 전인 고대 그리스 '아고라' 때로 거슬러 올라가겠지만 93년생인 내가 본 광장은 그랬다. 60년대 4.19 혁명과 87년 6.10 항쟁 등 교과서를 통해서 본 피와 죽음이 드리워진 무서운 광장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광장도 평범한 소시민의 희생이 강요되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우리에게 지난날의 광장은 평범한 소시민들이 월드컵 때처럼 기쁠 때는 서로 부둥켜안고, 세월호 사건 때처럼 아플 때는 서로 마음을 위로하고 국가를 향해 정의를 외치는 공간이었다.
 우리에게 지난날의 광장은 평범한 소시민들이 월드컵 때처럼 기쁠 때는 서로 부둥켜안고, 세월호 사건 때처럼 아플 때는 서로 마음을 위로하고 국가를 향해 정의를 외치는 공간이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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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쉬지 않고 길거리에 나왔다. 주말마다 광화문에 모인 사람들 수는 어마어마했다. 밤거리를 환하게 비추는 불빛은 화려한 네온사인 간판과 빌딩의 조명등이 아니라 사람들 손에 있는 작은 촛불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금쪽같은 자기 시간을 희생하며 거리에 모였고 함께 정의를 외쳤다. 그 결과, 국민보다 최순실과 소통하는 데 급급했던 제왕적 대통령은 물러났고, 구속으로 이어졌다. 촛불의 힘으로 새로운 정권이 창출됐다. 

그렇게 2년이 지난 문재인 정부의 오늘은 어떤가? 좁혀서 말하면 당신이 보는 지금의 광장은 어떤가? 지난날의 광장이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아 갔다고 후회하는가? 아니면 이제 정권이 교체됐으니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지켜보는 중인가? 지난날 정의를 외쳤던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오늘의 광장

당신이 사안의 중대성과 삶의 연결 여부를 따지는 사이, 누군가는 이미 광장에서 또 다른 목소리를 외치고 있다. 지난날을 생각하며 함께 해주길 기다리는 사이 광장의 목소리는 점차 힘이 빠지고 있다. 하지만 당신은 SNS 댓글 정도를 읽을 뿐이다. 그러면서 당신은 그것이 여론이라 생각하고 자기 의견을 짧게 덧붙인다. 그렇게 당신은 낡고 고립된 생각을 쌓아간다.

당신이 매일 보는 바로 그 뉴스가 옆집 이웃, 또는 가족의 얘기라면 어떤가? 그래도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인가? 그렇게 당신이 무관심한 사이 이미 드러난 수많은 사회문제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가려지고 있다. 언젠가 더 크게 곪아 터질 문제들인데...

당신이 모르는 사이, 광장은 더욱 변화했다. 다양한 사람이 모인다는 점에서 과장의 기능은 성숙했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사람들만의 목소리에 그친다는 점에서 과장의 힘은 쇠퇴했다. 서지현 검사를 시작으로 수많은 여성들이 위력에 의한 성폭행 문제를 이제는 바꿔야 한다며 미투 운동을 벌였지만 사회제도 개선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아직도 페미니즘 운동은 활발하지만 '워마드'처럼 일부 여성단체의 과격한 행동으로 '여성인권개선'이란 본질적 문제는 가려져있다. 성경 불태우기, 수컷 고양이 죽이기, 탯줄 끊은 사진 등 그들의 과격한 행동은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대중은 더 나아가서 광장 전체를 외면했다. 광장에 있는 그들은 그들만의 공간 안에 고립돼 버린 것이다. 일부 언론과 대중은 그들이 주장하는 본질을 외면한 채 과격한 행동만을 문제 삼는다.
 
청와대 국민청원에선 '동성애 퀴어 축제 반대', '난민 수용 거부'등이 청와대 다변 기준 20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
 청와대 국민청원에선 "동성애 퀴어 축제 반대", "난민 수용 거부"등이 청와대 다변 기준 20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
ⓒ 임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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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사회에서 더 약한 소수자에게는 폭력과 억압이 더 강하게 가해진다. 문재인 정부 드러 인터넷 광장은 더욱 활기를 띤다. 청와대 국민청원에선 '동성애 퀴어 축제 반대', '난민 수용 거부'등이 청와대 다변 기준 20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 그들의 주장에도 이유가 있겠지만 그 결과는 광장이 단순한 숫자 싸움의 현장이 됐다는 것이다.

소수 의견이 다양하게 펼쳐지고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며 대화와 타협의 장이 되어야 하는 광장은 우리가 함께했던 지난날을 잊은 채 서로를 떼어놓았다. 숫자에서 밀린 사람들은 더욱 더 자기들 목소리를 내기 위해 길거리에 나왔지만 대중의 눈에 그들은 광장의 점령군으로 비쳤다. 온라인 광장이 오프라인 광장을 죽여 버린 것이다. 

그렇게 분리된 광장은 정부의 정책 결정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촛불 민심으로 탄생한 정부이니 광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있다. 오프라인 광장의 목소리가 맞는지 온라인 광장의 목소리가 맞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그런 상황에 길거리에 나와 외치는 광장의 목소리만 듣는다면 불통정부로 낙인 찍힌다.

반대로 광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며 정권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정부는 광장의 눈치를 보고 광장은 대중의 눈치를 본다. SNS를 통해 대충 기사를 읽고 댓글을 남기는 키보드 앞 대중은 나라를 휘어잡는 왕이 됐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던 민주주의인가?

지난 정권의 국정 농단이 밝혀진 뒤 광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때 우리가 내는 각자의 목소리는 하나의 화음이 됐고 모두 서로 손을 잡고 민주주의를 노래했다. 하지만 2년이 지난 지금, 새로 밝혀진 양승태 사법 농단은 어떤가? 그때만큼의 분노는 우리에게 없다. 국정 농단 사태가 워낙 우리에게 충격적인 사건이라 스스로 면역체계가 길러진 듯하다.

대법원장이라는 사람이 상고법원 도입 등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전교조 법적 지위 박탈, KTX 해고 승무원 패소, 통합진보당 해산 등의 재판을 거래하고 자신과 의견이 다른 판사들의 블랙리스트를 작성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지만 우리는 무감각하고 광장은 이전보다 조용하다. 

사법 농단의 증거들은 속속들이 나오고 있지만 피해자인 전교조는 아직 법외노조를 벗어나지 못했고 통합진보당 역시 해산된 채 그대로 있다. KTX 해고 승무원들만 지난 7월, 13년의 긴 투쟁 끝에 복직했을 뿐이다. 사법 농단이 문제가 되는 지금, 그들의 목소리가 세상에 더 퍼져야 하는 것이 옳지만 오히려 약해진 채로 광장에 고립돼 메아리로만 돌아온다. 

과거와 현재의 끊어진 대화

당신은 그 날을 기억하는가? 그날 우리가 든 촛불은 단순히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이 아니었다. 우리가 외친 민주주의는 어떤 정권이 우리 앞에 오든 시민의 목소리가 우선이라는 것이었고 우리가 바랐던 정의는 대한민국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차별받지 않고 사람답게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박근혜가 눈물로 호소하며 '국가를 위해 한 일이었다'는 말에 어이없어 했고, 정유라가 '돈도 실력'이라고 말한 것에 분노했다. 그것은 앞으로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시민 대부분의 공감이 있었던 것이었다. 

지금의 광장은 어떤가? 오프라인 광장은 더욱 더 힘없는 자들의 아우성 공간이 되었고, 온라인 광장은 그보다 약간 나은 자들의 놀이터이자 연대공간이 되었다. 여기서 공감과 이해는 없다. 누구 말이 더 많은 군중의 편에 서 있는지가 중요할 뿐이다.

역사학자 카(E. H. Carr)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하지만 모두가 하나되었던 지난날의 광장에서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이분법적으로 갈린 지금의 광장으로 오면서 과거와 현재의 대화는 끊어진 게 아닌가 싶다.

태그:#광장, #광화문 광장, #과거와 현재, #댓글, #청와대 국민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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