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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자문해 본 적이 있다. 전쟁에 대응하는 말인 평화처럼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소유의 반대말은 무소유라 할 수 있겠지만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떠올리면 무소유가 아니라 '존재'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은가. 어쨌든 권력의 반대말로서 민주주의라든가 복종 따위를 떠올려봤지만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궁리 끝에 내가 선택한 말은 사랑이다. 모종의 권력 관계가 완전히 무너지는 경험은 무구한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사랑과 권력. 나는 이 같은 대응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상상한 '권력-사랑'에서의 권력은 억압과 폭력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철학자 한병철은 <권력이란 무엇인가>에서 '권력'은 억압과 폭력 외에도 다층적 의미를 내포하는 말임을 역설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듯 보이는 '갑질'은 권력이 폭력화 한 적나라한 예이다. 그것은 우리나라 역대 정치 권력이 보여준 거대 폭력과는 다른, 일상에서 광범하게 작동되는 미시 폭력이라는 점에서 더욱 경계가 요구되는 무서운 무엇일 터다. 

한나 아렌트가 "결코 총구에서 나오지 않는 것, 그것이 권력이다"라고 했을 때의 권력에는 바로 이런 미시 폭력으로서의 권력이 포함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며칠 전 두 달에 한 번씩 들르는 동네 병원에서의 일이다.

"성함은요? 19××년 생 맞지요? 어디가 안 좋아 오셨나요? 조금 있다 혈압 한 번 재 보세요."

나는 두 명의 여성 직원 중 한 여성의 물음에 하나하나 대답을 했고 거기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불친절해 보이는 여성 직원에 불편해진 내 심사

그런데 차례를 기다리기 위해 대기자들 틈에 자리를 잡으면서는 뭔가 불편한 마음이 된 내 자신을 발견했다. 한 마디로 기분이 좀 나빴다.

'뭐야... 내가 한두 번 온 것도 아니고 내 이름을 알아도 벌써 알았어야 할 터인데, 왜 저렇게 뚱한 표정으로, 생판 처음 보는 사람처럼 무뚝뚝하게 저럴까?'

이런 생각이 든 것이다. 가만히 보니 나를 접수한 직원 옆의 직원은 늘 그랬듯이 웃는 얼굴에 쾌활하고 싹싹하기가 그지없었다.

"나도 혈당 한 번 재 줄 수 있어요?"

어떤 환자에게 혈당 재주는 걸 본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물어본 쪽은 싹싹한 직원이었는데, 마침 그녀는 다른 일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내 혈당 재는 일을 옆 자리 무뚝뚝한 직원이 하게 됐다.

혈당을 잰 후에도 무뚝뚝한 (정확하게는 내겐 무뚝뚝하게 보이는, 이라 해야겠지만) 그녀는 내 얼굴도 보지 않은 채 거의 지나가는 말투로 "백구네요"라고만 했다. 내가 "그럼 어떤가요?"라고 물어서야 마지못한 듯 하는 말이 "괜찮네요"였다.

다시 자리로 돌아온 나는 또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까지는 아니지만 불편한 마음인 건 분명했다. 아니, 좀 친절하면 안 되나? 그런데, 정처 없는 내 기분과 제 정신 차리라는 내 이성이 뒤섞여 충돌하고 있는 중에 떠오른 한 마디 말이 있었다.

"노동자는 자기 할 일에 충실하면 그뿐 달리 친절해야 할 의무는 없지요."

독일 여행 중 어떤 독일 노인에게서 들은 말이라고 친구가 해준 말이다. 그의 말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던 그도 '친절'과 '노동'의 관계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고 고백했다.

나는 정당한 항의나 불쾌감의 표명 같은 최소한의 인간적 권리도 무시당하는 감정 노동자들의 노동 현실에 분개할 줄 아는 사람이다. 또한 "손님, 커피 나오셨습니다"와 같은 웃지 못 할 말이 친절도 겸손도 아닌, 업주라는 갑이 노동자라는 을에게 행사한 서비스 강요의 산물임을 모르는 바도 아니다.

교육공무원이자 교육노동자인 나 자신도 직장에서 친절을 강요받는 느낌을 받고 매우 불쾌했던 적이 있다. 교육청이 하달했다는 '전화 친절도' 연수란 게 그것이다. 학교 외부로부터 전화가 걸려 오면 즉각 자신의 직위와 이름을 밝히고 친절하게 답해야 한다는 것.

그 친절도를 모니터링해서 학교 평가에 반영한다고도 했다. 상대가 말도 안 되게 무례하게 나올 때는 어떡하면 되는가라는 질문 같은 건 아예 고려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러한 전화 친절하게 받기 메뉴얼에 나는 모멸감을 느꼈다.

마침내 차례가 와 진료실로 들어갔는데 의사가 "공복 혈당이 백구면 경계칩니다. 운동도 하시고 좋아하는 술도 좀 절제하셔야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혈당 수치가 어떠냐'는 내 물음에 좀 전 여성 직원이 친절하고는 거리가 먼 대답을 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내 혈당 수치에 대한 판단이나 조언은 의사의 몫이었다.

날아가라, 내 마음 속 '갑질' DNA여

그리고 이런 생각도 들었다. 불친절하게 느낀 사람이 진료실 바깥의 직원이 아니라 의사였다면 아까만큼 불편하고 불쾌했을까? 병원을 나서면서 나는 내 자신이 좀 한심해졌다. 내게도 약자로 보이는 사람을 향한 '갑질' DNA가 있는가 싶어서.

친절은 미덕이다. 친절한 사람은 호감도 주고 사랑도 받을 수 있다. 나 또한 학생이든 여성이든 노인이든 누구에게든 친절한 사람이고 싶다. 그러나 내가 타인에게 은연중 요구하거나 강요하는 친절은 폭력이다.

권력이 작동하는 폭력이다. 나는 병원으로 도로 들어가 내가 무뚝뚝하다고 느껴 불편했던 그 직원에게 다음과 같은 한 마디를 전해 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당신이 내게 꼭 친절해야 할 의무는 없다는 것을 다시 깨닫게 해줘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러진 않았다. 문제는 다만 나였기 때문이다. 사람에 대한 가없는 존중으로서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반대말로서 권력이 작동한 나 말이다.

태그:#갑질, #전화 친절도 , #노동자의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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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오랫동안 고교 교사로 일했다. <교사를 위한 변명-전교조 스무해의 비망록>, <윤지형의 교사탐구 시리즈>, <선생님과 함께 읽는 이상>, <인간의 교사로 살다> 등 몇 권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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