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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스코 최저가 숙소에서 만난 베네수엘라 난민 예술가 안드레스, 페루 뮤지션 후안과 함께
 쿠스코 최저가 숙소에서 만난 베네수엘라 난민 예술가 안드레스, 페루 뮤지션 후안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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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세상의 아름다움을 만나는 길이기도 하지만 세상의 슬픔을 만나는 길이기도 하다."

남미의 남쪽으로

2018년 9월, 남미의 국경에는 긴 줄이 있었다. 극심한 경제 붕괴 후 먹고 살 것이 없어 나라를 떠난 베네수엘라 난민들이 국경을 넘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는 줄이다.

콜롬비아에서 버스 강도를 당하고, 갑작스런 대상포진을 앓은 후 9월 8일 이른 아침 파스토를 떠나 에콰도르 루미차카 국경에 닿았다. 베네수엘라 사람들은 수가 너무 많아 따로 한 줄로 서 있었고, 그 이외 국가 사람들은 줄이 짧아 금방 국경을 통과할 수 있었다. 오랜 기다림에 지친 베네수엘라 사람들의 눈빛을 스쳐지나며 새치기를 하는 기분이 들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콜롬비아-에콰도르 루미차카 국경에서 긴 줄을 선 베네수엘라 사람들.
 콜롬비아-에콰도르 루미차카 국경에서 긴 줄을 선 베네수엘라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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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콰도르의 수도 키토에서, 강도 당한 생활용품들, 손톱깎이며 면도기, 손목시계 따위를 하나 하나 다시 구입했다. 카메라는 비싸서 바로 사지 못했지만 새 휴대폰으로 사람들의 인터뷰 촬영도 다시 시작했다. 전망대의 아이스크림 아저씨, 성당 앞의 음식 행상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스페인어도 영어도 잘 못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사람들을 만나고 그 이야기를 모아 영화를 만들려 한다. 콜롬비아에서의 사건으로 꿈이 한번 와장창 깨지며 절망했지만, 평생 꾸어온 꿈이라 기어이 다시 나아가려 한다.

광장 벤치에서 환한 웃음으로 인사를 건네며 다가온 베네수엘라 난민 엔리케 바콩 Enrique Bacon씨가 말했다.

"얼마 전에 가족들과 같이 키토로 왔어. 베네수엘라를 떠나왔지만 슬프지 않아. 콜롬비아도 에콰도르도 다 같은 라틴 아메리카야. 같은 스페인어를 쓰고 문화도 비슷하지. 우리 베네수엘라의 현재 상황이 안타깝지만 슬퍼하지만은 않을 거야."
 
엔리케 바콩 씨와
 엔리케 바콩 씨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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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행상 엘레나 씨.
 음식 행상 엘레나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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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와 문화는 국경을 초월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걸 느꼈다. 같은 언어와 문화를 가진 남한과 북한도 언젠가 국경을 넘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파나마 지역은 1819년부터 1831년까지 '그란 콜롬비아'라는 통합 국가였는데, 통일된 남미 국가를 원하지 않았던 미국의 견제로 독립 영웅 시몬 볼리바르가 실각하며 여러 개의 나라로 쪼개졌다고 한다. 식민지 시대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세계 어느 지역에서나 국경의 분할과 통제에는 선진국들의 권력이 작동하고 있다.

화산 아래 온천과 폭포의 마을 바뇨스, 식민지풍의 오래된 도시 쿠엥카를 거쳐 9월 19일 새벽 두 시 페루 툼베스 국경에 닿았다. 쿠엥카에서 치클라요까지 열다섯 시간을 달리는 야간버스는 국경에서 한참을 멈추었다. 깊은 밤 국경에는 차가운 땅바닥에 누워 이불과 옷가지를 덮고 잠든 베네수엘라 사람들로 가득했다. 유엔난민기구가 하얀 천막을 치고 식수와 의료를 지원하고 있었다.
 
에콰도르-페루 툼베스 국경의 밤. 땅바닥에 누워 잠을 자며 차례를 기다리는 베네수엘라 사람들.
 에콰도르-페루 툼베스 국경의 밤. 땅바닥에 누워 잠을 자며 차례를 기다리는 베네수엘라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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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배꼽, 마리화나 소굴

페루 북쪽에서 남쪽으로, 태평양 바닷가 트루히요, 안데스 설산과 하늘 호수가 있는 와라즈, 분주한 수도 리마, 사막과 오아시스의 도시 이카를 여행하고 쿠스코에 도착했다. 쿠스코는 케추아어로 '배꼽'을 뜻하고 잉카제국의 수도로서 '세계의 배꼽'으로 불리던 곳이다.

잉카제국은 1438년 건국부터 1533년 스페인 프란시스코 피사로 군대의 침략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 지역에 이르던, 콜럼버스 침략 이전 아메리카에서 가장 거대한 나라였다. 그 중심인 쿠스코는 안데스 산맥 3400미터 고지대에 자리하고 있다. 해발 400미터 이카에서 출발한 버스는 장장 열일곱 시간 동안 구불구불 산맥을 올라갔다. 버스에서 준 야식을 잘못 먹었는지 줄곧 멀미를 하느라 창밖 풍경을 볼 여유가 없었다. 몸은 정직해서 어김없이 고산증도 찾아왔다.
 
쿠스코 도심, 아르마스 광장에는 잉카의 상징 무지개 깃발이 나부낀다.
 쿠스코 도심, 아르마스 광장에는 잉카의 상징 무지개 깃발이 나부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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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마스 광장 언덕 숙소에서 이틀을 머물다가, 8년 동안 자전거로 세계를 방랑 중인 베테랑 여행자 차원민씨가 알려준 최저가 숙소로 이동했다. 여행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인터넷 숙소 예약 시스템 '부킹닷컴'이나 '호스텔월드'에 나오지 않는 '고급 정보'였다.

하룻밤 17솔(한화 5800원)에서 10솔(3400원)로 숙소 비용이 내려갔다. 2400원의 차이는 참 컸다. 17솔 숙소와 달리 10솔 숙소 'Tu casita(너의 작은 집)'는 중심가에서 벗어난 산 페드로 시장 골목에 있고, 열 명 이상이 쓰는 공용 화장실이 하나밖에 없고, 변기 커버와 휴지가 없고, 뜨거운 물이 잘 나오지 않고, 밤에는 찬물마저 끊기는 날이 많았다. 뭉게뭉게 마리화나 연기도 자주 피어올랐다.

중심지 숙소에는 평범한 여행자들뿐이었는데, 최저가 숙소에는 특이한 사람들이 많았다. 대부분 거리의 음악인, 가난한 화가 등 무명 예술가와 장기 여행자들이었고 액세서리를 만들거나, 컵케잌이나 향(incense)을 도매로 구입해 관광객들에게 팔면서 여비를 보태고 있었다.

아르헨티나 힙합 청년 이즈기엘은 무소유주의자인지, 주방에 있는 타인의 음식을 보이는대로 먹어치우고 남의 가방에 손을 대기도 했다. 흥미로웠지만 무척 시끄럽고 물건이 없어질까 조금은 걱정되는 숙소였다. 하지만 나도 똑같이 가난한 장기 여행자이고, 없어질 물건도 미련도 별로 없는 사람이다.

내 이층 침대의 일층에는 베네수엘라 난민 여행자 에두아르도 안드레스 Eduardo Andres씨가 있었다. 나처럼 콜롬비아, 에콰도르를 지나 페루에 왔고, 브라질까지 갈 계획이라고 했다. 빨간색, 초록색, 노란색, 삼색 실로 팔찌를 만들어 아침마다 광장에 나가 팔았다.

"지금 베네수엘라 대통령 니콜라스 마두로는 최악이야. 그 사람이 나라를 망쳤지. 그 이전의 우고 차베스는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해. 정치인들, 부자들, 다국적 기업들, 거대 언론사가 세상을 전쟁에 빠뜨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더 가난하게 만들고 있어.

너 베네수엘라도 여행했니? 남한은 경제 상황이 좋잖아? 베네수엘라 돈 가치는 폭락해서 네가 지금 베네수엘라에 가면 왕 대접을 받을 거야. 나는 지금 돈이 없어. 그래도 브라질까지 여행할 거야. 브라질에 꼭 가보고 싶었어.

며칠 전 10월 3일에 베네수엘라에 계신 내 어머니가 돌아가셨어. 전화로 소식을 들었는데 지금 나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가 없어. 언제 베네수엘라의 상황이 나아져거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

 
베네수엘라 난민 예술가 에두아르도 안드레스 씨
 베네수엘라 난민 예술가 에두아르도 안드레스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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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6인실 도미토리에는 잉카 음악인 후안 바레다 Juan Barreda도 장기 투숙 중이었다. 친화력과 추진력이 강한 안드레스의 주도로 후안의 노래 뮤직비디오를 촬영하며 쿠스코 도심을 돌아다녔다. <단사 Danza (춤꾼)>라는 노래에 영어 후렴구도 추가했는데, "마추픽추 마추픽추, 위 고 미추픽추 We go Machupicchu"라는 문장이었다. 페루인인 후안은 이미 다녀와 노래를 만들었고, 안드레스와 나는 그곳으로 가고 싶었다.

쿠스코가 잉카의 배꼽이라면 마추픽추는 잉카의 영적인 중심지다.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와, 후에 혁명가가 된 아르헨티나 의대생 체 게바라가 와서 '하나의 라틴 아메리카 민중'을 꿈꾸었다는 그곳.

베네수엘라 친구 안드레스와의 이별

쿠스코에서 마추픽추에 이르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다. 걷지 않고 갈 수 있는 길은 비싼 기차를 타는 방법밖에 없다. 마추픽추에서 12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수력발전소까지 승합차로 여섯 시간을 이동한 뒤 도보로 이동할 수도 있다.

잉카 트레일은 고대 잉카인들이 만든 길을 걸어 3박 4일 동안 마추픽추로 향하는데, 하루 입장 인원 제한이 있어 예약이 몇 개월 전부터 마감되며 500달러 이상이 든다. 잉카 트레일에 가지 못한 사람들은 일명 '짝퉁 잉카 트레일'이라 부르는 잉카 정글 트레일이나, 6271미터 높이의 살칸타이산을 도는 트레일을 통해 마추픽추에 간다. 3박 4일 또는 4박 5일에 160달러에서 200달러 정도 가격이다. 물론 개인적으로 경로을 정하고 텐트와 식량을 매고 가는, 대단한 여행자들도 있다.

고산증과 게으름, 그리고 매일 비가 내린다는 이유로 마추픽추행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숙소 동료 사샤의 결심을 따라, 개중 제일 험하다는 살칸타이 트레킹에 나서게 됐다. 기차와 정통 트레일은 비싸니 안중에도 없었고, 보트와 자전거와 집라인을 타는 정글 트레일보다는 대자연을 만나는 살칸타이가 더 끌렸다. 드디어 만나게 될 마추픽추, 고생해서 만나면 더 반갑지 않을까. 아마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굳이 더 어려운 길을 택하는 게 아닐까.

안드레스에게 마추픽추행을 알렸다.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안드레스는 다음 날 티키카카로, 볼리비아로 떠나겠다고 말했다. 며칠 동안 함께 웃고 이야기 나누던 친구들이 저들끼리 마추픽추로 간다고 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으리라.

"나는 마추픽추에 갈 돈이 없어. 이제 나는 마추픽추에 가고 싶지 않아. 내일 쿠스코를 떠나 볼리비아로 갈 거야. 차비는 없지만 히치하이킹으로 갈 거야. 베네수엘라에서 여기까지 온 것처럼 또 거기까지 갈 수 있을 거야."

등산화도 없는데 비가 많이 오면 어쩌나, 소심하게 걱정하고 있는 나를 오히려 안드레스가 응원했다.

"뭘 그렇게 걱정해. 다 잘 될 거야!"

슬펐다. 여행은 세상의 아름다움을 만나는 길이기도 하지만 세상의 슬픔을 만나는 길이기도 하다. 그 슬픔이 나를 좀더 나은 사람, 따듯한 사람, 다른 사람들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하기를, 나는 기도한다. 서로의 여행과 인생을 축복하며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안녕, 안드레스. 그 슬프고 힘겨운 길 위에서, 네가 마추픽추보다 더 아름다운 세상을 찾을 수 있기를 기도할게."

살칸타이를 넘어 마추픽추로

10월 14일 새벽 다섯 시, 쿠스코 샌프란시스코 광장에 오십 여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버스를 타고 두 시간을 달려 빌카밤바 산맥 깊숙이 자리한 마을 모예파타 Mollepata에서 아침을 먹고 산행 장비를 점검했다. 오십 명의 사람들은 세 그룹으로 나뉘었고 우리 팀은 열일곱 명, 멕시코, 독일, 덴마크, 노르웨이, 브라질, 스코틀랜드, 아르헨티나, 프랑스, 남한, 아홉 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팀 이름은 '야마스 로카스 Llamas Locas, 미친 라마들'로 정해졌다. 살칸타이와 친체로 마을 출신의 가이드 니르데르 수세모 Nilder Zucemo씨와 유리 소토 Yuri Soto씨가 함께했다. 홀스맨(말 모는 사람) 한 명과 요리사 다섯 명은 오십 명의 짐과 음식을 담당해주었다.

"살칸타이는 쉬운 길이 아니에요. 우리 중 누군가는 분명 고산증으로 힘들어 할 거예요. 우리 열아홉 명은 4박 5일 동안 한 가족입니다. 한 사람은 모두를 위해서 걷고, 모든 사람은 한 사람을 위해서 걸어야 해요. 여기 고산증에 도움이 되는 코카잎과 비밀의 약물이 있어요. '콘도르 오줌'이라고 부르는데 냄새를 맡으면 정신이 확 들거예요."

첫째 날은 3900미터에 캠프를 차리고 4200미터 후만타이 호수에 다녀왔다. 케추아 사람들은 후만타이를 어머니의 산, 살칸타이를 아버지의 산으로 여긴다고 한다. 거대한 두 설산 사이, 수많은 여행자가 사용했을 낡은 텐트 속에서 잠이 들었다. 다른 여행자에게 선물 받은 손난로 덕에 다행히 많이 춥지 않았다.

둘째 날은 살칸타이 패스 4630미터에 다다랐다. 비구름과 바람 속에서 파차마마, 어머니 대지에게 케추아식 제사를 올렸다. 저마다 조심히 손에 든 코카잎 세 개는 각각 신, 온갖 생명들, 조상을 상징한다. 동서남북 사방에 인사를 하고 산 친구들과 포옹을 나누었다.

"우리는 어제 처음 만났지만, 대자연 속에서 우리는 모두 다 이어져 있습니다."
 
코카잎 세 장은 신, 온갖 생명, 조상을 의미한다.
 코카잎 세 장은 신, 온갖 생명, 조상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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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30미터 살칸타이 패스에서 9개국의 산 친구들과 함께
 4630미터 살칸타이 패스에서 9개국의 산 친구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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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날부터는 고도가 낮아져 숨 쉬기가 한결 편안했고 밀림이라 초목과 곤충이 많았다. '샌드 플라이'라는 소리 없는 모기도 달려들었다. 저녁에 산타 테라사에 도착해 코칼마요 Cocalmayo 온천에 몸을 담그고 바라본 산세는 어느덧 사진으로 보던 마추픽추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밤에는 모닥불을 피우고, '마카레나'부터 '강남스타일'까지 음악을 크게 틀고 광란의 댄스 파티를 벌였다. 나 말고는 전부 백인이고 말이 잘 통하지 않아 불편했는데 춤추며 놀 때는 말이 필요 없어서 편안했다.

넷째 날은 마추픽추 아랫마을, 기차의 종착역인 아구아 깔리엔떼까지 걸었다. 나는 온천의 바위에 부딪힌 무릎이 아파서, 사샤는 댄스파티에서 림보를 하다 삐끗한 허리가 아파서 걸음이 느려졌다. 여기저기 근육통이야 없는 사람이 없었다. 다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드디어 만나게 될 마추픽추를 그리며 일찍 잠이 들었다.

새벽 세 시 십오 분, 하루 오천 명이 방문하는 마추픽추에 일찍 들어가 좋은 경치를 보기 위해 먹거리를 싸들고 길을 나섰다. 기이한 산봉우리와 구름 사이로 몇 개의 별이 빛났다. 등산로 입구는 다섯 시에 열렸다. 긴 줄을 서 있던 수 백 명의 사람들이 마치 마라톤 경주를 하듯 마추픽추 입구를 향해 달렸다. 걸었다기보다는 달렸다는 표현이 적당하다.

아픈 무릎에게 미안하게도, 나도 열여덟 번째로 입구에 닿았다. 마을에서 5시 30분에 출발한다는 편도 12달러 짜리 버스도 하나둘 도착했다. 여섯 시, 드디어 검표소가 열렸다. 유적 보호를 위해 지팡이는 맡기고 입장했다. 와이나픽추(새로운 봉우리)와 마추픽추(오래된 봉우리) 꼭대기까지 가려면 또 추가요금과 예약이 필요해서 나는 마추픽추를 둘러 보는데 만족해야 했다.

남미에서 가장 유명한 유적, '언젠가는 가보겠지' 생각했던 곳. 눈보라치는 설산과 모기들이 달려드는 밀림을 걸어 마침내 마주한 마추픽추. 과연 산과 강이 자리한 모습이 기묘했다. 수백 명 관광객의 행렬 속에서도 어렴풋이 신령스러운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자연과 거대한 돌들의 유적에 감탄하고나서, 사람들은 왜 저마다 슬픔을 느끼는 걸까. 이토록 외지고 거친 산에서 한때 찬란하고 신비한 문명을 이룬 사람들이 살았고, 이제는 돌들만이 고요하게 그 긴 세월을 담고 남아있다.

거대한 잉카 문명은 피사로와 병사 180명에 의해 어이없이 무너졌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와서 저들끼리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선언한 이래, 아메리카 도처의 원주민 대다수는 유럽에서 온 병균에 의해 죽거나 식민 지배자들에게 수탈당했다. 아메리카의 역사는 끊임없는 침략과 지배의 역사였다.

강한 자의 침략과 수탈은 언제나 약한 자의 고통과 슬픔을 동반한다. 남미 원주민 문명 멸망의 상징, 마추픽추는 그래서 더욱 슬프다. 300년 동안의 식민 지배와 혼혈의 세월을 거쳐 라틴 아메리카는 다인종 다문화의 땅이 되었다. 나에게는 라틴 아메리카의 인종적 다양함에 대해 분별하고 판단할 능력이 없다. 하지만 중남미 거리의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대부분 원주민이라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나와 함께 태어나기 위해 오르자, 형제여. (중략)
농부여, 직공이여, 말없는 목동이여.
가파른 발판을 오르내리던 미장이여.
안데스의 눈물을 나르던 물장수여.
손가락이 짓이겨진 보석공이여.
씨앗 속에 떨고 있는 농부여.
너의 점토 속에 뿌려진 도자기공이여. (중략)
그대들의 피와 그대들의 주름살을 내게 보여다오.


이웃 나라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시 '마추픽추 산정'에서 잉카 제국의 왕과 귀족, 유럽에서 온 정복자들이 아니라, 농부와 목동, 기층 민중의 힘겨운 삶에 대해 노래한다. 마추픽추에 도시를 만들기로 결정한 것은 권력자들이었겠지만 그 돌 하나 하나를 나르고 수로와 밭을 만든 것은 대다수 힘없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21세기에도 여전히 미장이와 물장수, 농부와 직공의 삶은 힘겹다. 그리고 중남미의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세계 체제 속에서의 수탈과 저개발, 빈부격차, 비민주적이고 불안정한 정치 상황 속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마추픽추에서 만나는 태양과 어머니 대지 속에서 천지사방의 평화로움을 상상할 때, 남미는 여전히 슬픈 대륙이다.

절룩거리며 마추픽추를 내려와 쿠스코 시장 골목 숙소로 돌아왔다. 4박 5일만에 다시 SNS에 접속했다. 베네수엘라 청년 안드레스가 히치하이킹으로 국경을 넘어 볼리비아 라파즈까지 갔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설산과 정글을 지나 마침내 도착한 마추픽추에서
 설산과 정글을 지나 마침내 도착한 마추픽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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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모이, #세계여행, #남미여행, #베네수엘라난민, #마추픽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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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바다 미륵섬에서 유년기를, 지리산 골짜기 대안학교에서 청소년기를, 서울의 지옥고에서 청년기를 살았다. 2011년부터 2019년까지, 827일 동안 지구 한 바퀴를 여행했다.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 생활놀이장터 늘장, 여행학교 로드스꼴라, 서울시 청년활동지원센터, 섬마을영화제에서 일했다. 영화 <늘샘천축국뎐>, <지구별 방랑자> 등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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