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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저 회사에서 수치스러운 일을 당했는데 어떻게 해요. 정말 미치겠고 잠도 안 오는데 어디에 말해야 할지,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책 <제가 왜 참아야 하죠?>를 읽고 있자니 오래전 직장 생활을 하며 겪었던 일을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그 당시 내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조언해줄 직장 동료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든든했을까 하는 생각에 씁쓸히 웃었다.

이 책의 저자는 그런 사람이다. 사장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저자는 여성 동료 대다수가 같은 피해를 겪고 있음을 확인하고는 직장 동료들을 규합해 사장을 고발한다. 그리고 2년에 걸친 재판 과정을 주도해 나간다.

<제가 왜 참아야 하죠?>는 결코 간단하지 않았던 재판 과정을 마치 현장을 보여주듯이 생생하게 전달하는 논픽션이다. 미투 운동이 벌어지기 10년 전에 이미 성폭력 사건 재판 과정을 일찌감치 경험하면서 각성한 저자의 이야기다.

왜 성폭력이 발생하는지, 여자들이 그런 일을 겪고 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지, 추행을 저지른 남성이 어째서 오히려 여성을 '꽃뱀'으로 몰고 가는지 구조적이고 근원적인 문제를 차근차근 풀어주는 미투 운동 설명서라 할 수 있다.  

힘파시(himpathy), 가해자 남성에게 동조하는 이유

저자에 따르면 직장, 그리고 가정이나 학교 등에서 기존에 알던 사람에 의해 성폭력을 당했을 때, 대다수 여성은 무슨 일이 자신에게 벌어졌는지에 대해 빠른 판단을 하기 어렵다. 오히려 가해자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한다. 심지어는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하고 자책하기도 한다.

때문에 여성은 자신이 피해자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외롭고 괴로운 시간을 거치며 사태의 본질을 깨닫고 성폭력을 당한 사실을 폭로할 즈음에는 이미 시간이 너무 흘러 사건을 입증할 증거나 증인을 찾기도 어렵다.

게다가 왜 그때 바로 신고하거나 폭로하지 않고 이제야 나서느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게 된다. 갑자기 무엇인가를 얻으려는 것 아니냐는 의혹의 시선이 화살처럼 피해자에게 쏟아지는 것이다. 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이 오히려 '꽃뱀'으로 의심받는 상황이 대략 이렇게 만들어진다.

우리 사회에서 성폭력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은 당황스럽게도 가해자의 궤변에 동조하고,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거나 적절치 못한 처신을 꾸짖는 방향으로 설정돼 있다. 책에서는 그런 현상을 '힘파시(himpathy)'라는 말로 표현한다. 남자(him)에게 동조(sympathy)한다는 뜻의 합성어이다. 
 
"장발장은 빵을 훔쳐서 5년 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힙니다. 탈옥하다 잡혀서 총 19년을 복역합니다. 출소한 후에 흉악범으로 손가락질을 받습니다. 빵은 먹음직하게, 훔칠 만하게 생겼다고 욕을 먹지도, 감옥에 가지도 않습니다. 이렇듯 모든 범죄는 범죄를 저지른 자가 비난받습니다. 그런데 많고 많은 범죄 사건 중 하나일 뿐인데 왜 유독 성폭력 사건은 피해자를 비난하고 가해자 편을 들까요?" - 본문 39쪽
 
저자는 성폭력에 대해 기울어진 잣대를 당당히 들이대는 사회에서 직간접적으로 접한 성폭력 가해자들의 심리를 분석하고, 피해자들의 행동과 마음에 공감한다. 이를 바탕으로 노련한 '만렙' 언니가 상담해주듯 단호하지만 다정하게 성폭력 문제의 본질을 알려준다.

나는 왜 참아야 했나
 
박신영 <제가 왜 참아야 하죠?> 표지
 박신영 <제가 왜 참아야 하죠?> 표지
ⓒ 바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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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왜 참아야 하죠?>에 등장하는 사례 중 몇 가지는 나 역시 경험한 일이다. 한번은 회식 자리에서 고위직 상사가 팀 여자 직원 모두를 성추행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 자리에는 동료 남자 직원들도 다수 있었으나 행동을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직 내에 공식적으로 이의를 제기한다고 과연 내가 해결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일었다.

여직원들끼리만 치를 떨며 분을 삭혔고, 불쾌함과 화를 참지 못한 나는 결국 회사를 그만두었다. 퇴직하던 날 당시 회식에 함께 참여했던 팀장님과 식사를 하며 그날의 사건은 정말 다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상당히 구체적으로 말씀드렸다. 팀장님은 '과음 때문에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이라는 단서를 붙이며, 그런 일이 있어서 미안하다고 가해자 대신 사과했다. 이것이 보통 직장의 현실이다. 

2018년을 불태운 '미투 운동'은 쓸개즙을 머금은 듯한 나의 경험을 반추하게 했고, 그 사건 이후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생각보다 남겨진 상처는 선명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렇지만 평소 자기주장을 하는 데 거침이 없는 편에 속한 내가 도대체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스스로에게 설명할 수 없었다.

그래서 주변과도 더 자주 미투 운동과 자신이 겪은 성폭력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했고, 내가 속한 사회를 바라보는 다른 렌즈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만나게 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저자는 내가 궁금했던 문제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것은 가해자의 대부분은 남성이고 피해자의 대부분은 여성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 대한 성'폭력' 사건인데 '성'폭력 사건으로 여겨 피해 '여성'에게서 원인을 찾기 때문입니다. -본문 8쪽
21세기 대한민국은 현재 워낙 교묘하게 이미 성평등이 다 이루어진 듯 포장이 되어 있어서 이유를 알기 어렵습니다. -본문 99쪽
 
저자는 과거 역사를 통해 남성의 사유재산으로 여겨졌던 여성의 지위를 설명하며, 내가 당한 성폭력들은 과거 가부장이나 권력자들이 자신의 소유물을 자기 마음대로 대하던 악습이 아직도 문화적 DNA에 남아있기 때문임을 들려준다.

이는 성폭력범들이 평소 사용하는 언어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예를 들어 성폭력 사건에 대해 여자도 잘못이 있다고 말한다거나, 가해자가 피해자를 범한 이유가 '딸 같아서'라고 말하는 것, 그리고 성추행 부위를 '고작 어깨나 허리 한번 쓰다듬었을 뿐인데'라고 깎아내리는 언사 등이 다 그러하다. 

본래 어떤 일을 확실히 이해하면 설명을 간결하게 한다고 했던가. 이 책은 성폭력 사건이 폭력사건의 일환이며 당연히 '가해자'가 잘못한 것임을 확실하게 말한다. 그 외의 모든 말은 '변명'이라는 주머니에 과감히 넣어버린다. 무엇보다 작가 본인이 직장 내 성폭력 사건과 재판 과정까지 경험했기에, 이런 일을 처음 겪는 사람들이 당황하며 놓칠 수 있는 대응 요령들을 아주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성범죄자의 아내는 남편에게 배신감을 느낍니다. 그 배신감이 너무 크기에 남편의 배신을 인정하고 미워하기보다 피해자인 여성을 미워하는 것이 마음이 더 편합니다. 게다가 지켜야 할 가정과 자녀들이 있습니다. 남편의 잘못이라고 믿으면 이혼을 해야 합니다. 이혼해서 혼자 자녀를 키우며 살 자신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남편을 무죄로 만들어 결혼생활을 지속해야 합니다. 가해자의 아내는 이런 심리로 피해 여성들을 공격하게 됩니다. 가해자는 아이고 좋아라, 하며 아내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자신은 아내 등 뒤로 숨습니다. 어릴 적에 사고 치면 엄마가 해결해주고 자신은 엄마 치마폭 사이에 숨던 것과 똑같습니다. 이것도 성범죄자 남성들의 공통된 행동 패턴입니다. -본문 156쪽
  
당당하고 유쾌하게 싸우는 전사

누구도 자신의 힘든 과거, 기억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경험을 털어놓는 일이 유쾌할 리 없다. 저자 또한 재판을 진행한 후 트라우마를 오랜 시간 겪었고 그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이 성폭력범에게 동조하고 피해자를 나무라는 모습을 보면서 크게 절망하고 좌절하기도 했다.

그러나 저자는 아픔에 머물러 있지 않고 사회 전체의 구조적인 모순, 계속해서 똑같이 벌어지고 있는 여성들의 피해에 대한 분노로 진정한 성평등을 위해 싸우는 여전사로 재탄생했다. 익살스럽게도 저자는 그런 자신을 '연쇄싸움마'라고 표현한다.

이런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저자의 태도는 당당하고 유쾌하며 여성에게 불리한 모든 편견과 사회 구조에 맞서는 데 한 치의 주저함이 없다. 자신의 아픔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개인의 슬픔에서 벗어나 사회 전체의 문제를 직시하는 저자의 유쾌하고도 확고한 어조에 진심 어린 박수를 보낸다.

책을 덮으면서 생각해본다. 지금까지 나는 어쩌면 내가 겪는 불평등 문제, 인권 침해와 여자라서 당했던 차별과 폭력에 대해 개인적 불만과 불안만을 토로하고 있었던 것 같다. 미투 운동으로 터져 나온 수많은 증언들이 보여주듯이 이는 개인의 문제가 결코 아니다. 차별과 혐오라는 형태로 드러나는 사회문제는 우리 모두 함께 풀어가야 할 숙제이다.

<제가 왜 참아야 하죠?>는 그런 공감과 다짐을 하게 만드는 용기를 주는 책이다. 이 책을 읽고 공감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 힘차게 '파이팅'을 외쳐보고 싶다.

제가 왜 참아야 하죠? - 참을 만큼 참았으니 이제는 참교육

박신영 지음, 바틀비(2018)


태그:#제가왜참아야하죠, #박신영, #바틀비, #신간,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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