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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후반 나이에 2018년 4월부터 7월까지 필리핀 바기오에서 어학 연수한 경험을 나누고자 합니다. - 기자말
 
어학원 식당
▲ 식당 어학원 식당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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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에 어학연수를 왔지만 외국이라는 생각보다는 수도권에 있는 대입 스파르타 재수학원에 있는 느낌이다. 아침부터 밤 늦은 시간까지 쉴 틈 없는 하루 일과와 엄격한 내규를 가진 기숙사 생활 그리고 한식으로 제공되는 식단까지.

영어 발음은 넘지 못할 벽

2주차가 되어도 여전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정신없이 수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제대로 공부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으니. 더구나 가장 큰 문제는 발음.

고향이 경상도여서 우리말도 제대로 발음을 못하는데 하물며 영어를. 'R과 L', 'B와 V', 'F와 P'의 발음은 나를 좌절시켰다. 교사가 몇 번씩 같은 단어를 반복해서 발음해도 내 귀에는 같은 소리로만 들리니. 혀 모양을 그려가며 설명하지만 나의 발음은 바뀌지 않았다.
 
발음 수업 모습
▲ 발음 수업 발음 수업 모습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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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학원 생활이 적응되니 그동안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들이 보였다. 어학원의 분위기, 교사들의 성향 그리고 함께 공부하는 연수생의 모습까지. 국적과 성별은 다르지만 어학 연수생을 세 부류로 구분할 수 있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 적당히 공부하면서 외국에서의 삶 자체를 즐기는 학생 그리고 어학연수를 왜 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학생으로 구분되었다.
 
공부하는 연수생 모습
▲ 도서관 공부하는 연수생 모습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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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학연수가 끝난 후 곧 바로 호주나 캐나다로 워킹 홀리데이를 떠나는 학생들은 밤잠을 설쳐가며 공부하고 있었다. 몇 달이 지나면 영어가 그들의 생업을 좌지우지하기에 쉴 틈이 없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부모의 권유로 어학연수를 온 학생들은 매일을 즐기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학연수를 왔다고 영어 회화 실력이 느는 것이 아닌데. 어학연수의 성패는 다급함이나 뚜렷한 목표 의식을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에 달린 것 같다.

나는 어느 부류일까! 토익이나 토플 같은 영어 시험을 준비하는 것도 아니고 외국 취업을 위해 영어가 필요한 것도 아니니. 더구나 인생을 고민할 나이도 아니며 영어 공부에 대한 다급함도 없으니.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하고 단어를 암기하지만 책을 덮고 나면 금방 배운 것이 잊혀졌다. 적당히 공부하면 적당히 영어 회화 실력이 늘 것이라 생각하였는데.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60대 연수생을 만나다
 
혼자 먹는 밥
▲ 식단 혼자 먹는 밥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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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어학 연수생들 사이에서 나는 꼰대. 함께 어학원에 입학한 우리나라 젊은이들과 친동기처럼 친하게 지냈는데 "희망은 호주나 캐나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있다"라는 말을 한 순간부터 관계가 멀어졌다. 워킹 홀리데이가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에게 나의 조언은 늙은이의 꼰대질인 것이다.

어학원에 온 지 2주가 지나는데도 살갑게 인사를 나누거나 함께 밥을 먹을 동료가 없었다. 국적을 초월하여 유유상종하는 것이 당연한 일. 젊은 친구들끼리는 쉽게 친구가 되지만 50대 후반인 나는 젊은 친구들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 쉽지 않았다. 기숙사도 독방이라 수업 시간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과 말을 나눌 기회가 거의 없었다. 어학연수를 결정할 때부터 각오는 하였지만 혼자 지내는 생활은 쉽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내 또래쯤 된 분이 나처럼 혼자 밥을 먹고 라운지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직원도 학생도 아닌 것 같았고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 없어 그냥 지나쳤는데 그분이 먼저 나에게 말을 건넸다.

우리나라에서 오신 60대 초반 연수생. 직장을 그만두기 전 좋은 추억을 만들기 위해 공로 연수 기간을 이용하여 오신 것이다. 평생 직장 생활을 하셨고 외국 생활 경험이 없어 쉽게 결정하지 못했는데 사모님과 아이들의 격려가 있어 어학연수를 선택하셨다고 한다.

나보다 두 달 먼저 입학하여 마지막 달을 보내고 있었다. 객지에서 평생지기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그분도 말벗이 없어 적적하셨나 보다. 함께 주말 산행을 하기로 하였다.

주말 아침, 시내에서 먹거리를 준비하고 지프니를 타고 울랍산(MT. ULAP, 1,846m)으로 향했다. 바기오 시내는 자동차와 지프니가 뿜어대는 매연으로 인해 마스크가 필요하지만 시내를 벗어나니 쾌청한 날씨와 맑은 공기가 사람을 반겼다. 비슷한 처지의 동료가 있어 삶에 활력이 생긴 것이다.
 
울랍산 정경
▲ 울랍산 울랍산 정경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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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이 소나무 숲으로 우거진 울랍산은 시원시원한 풍경이었다. 어느 곳을 바라봐도 맑은 하늘과 켜켜이 쌓인 산자락만이 보였다. 너무나 맑은 하늘빛과 신록의 모습에서 그간의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었다.

시내에 돌아와 한인식당에서 삼겹살과 소주를 시켰다. 2주 만에 처음 마시는 술. 우리말로 떠들며 술을 마시니 서울인지 바기오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기분 좋게 취해 숙소에 돌아와 자리에 누우니 불현듯이 이것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기오 한인식당가
▲ 한인식당 바기오 한인식당가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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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곳에 온 것은 나의 삶에 자극을 주기 위함인데.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였으니. 이 행동은 서울에서도 할 수 있는데. 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그러면서 불현듯이 어학연수 기간 동안 술과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10주 뒤, 나의 몸과 마음에 변화를 기대하면서...

태그:#필리핀, #바기오, #어학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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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자발적 백수가 됨. 남은 인생은 길 위에서 살기로 결심하였지만 실행 여부는 지켜 보아야 함.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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