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어전설> 포스터.

영화 <인어전설> 포스터. ⓒ 자파리필름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를 보려고 부랴부랴 짐을 챙겼다. 평일 낮 2시에만 상영한다는 게 말이 되나? 그나마 다른 극장은 전날 상영이 취소되었다고 한다. '관객과의 대화'를 열기로 해서 상영 허락을 했다가, 행사가 취소되자 상영도 취소되었던 것. 평일 낮 시간이라 그런지 관객보다 빈 자리가 더 많았다. 포털사이트에서는 요즘 검색 한 번이면 관객수를 알 수 있다. 15일 개봉한 영화는 19일 현재까지 총 507명이 관람했다. 민낯도 이런 민낯이 없다. 

처음에 <인어전설>이라는 제목을 봤을 때는 해녀 이야기라는 사실을 잘 몰랐다. 해녀와 싱크로나이즈드. 관객수로 작품을 판단하는 시대 흐름과는 맞지 않는 고집스런 영화임은 분명하다. 오멸 감독의 이전 영화 <지슬>의 흥행은, 역사성과 시의성 그리고 외국영화제 수상 등 몇 가지 키워드가 우연히 일치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인어전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영화 <인어전설>은 먼 훗날 <서편제>라는 영화가 했던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예술영화 전용극장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고 멀티플렉스의 밥그릇 싸움에 관객들이 들러리를 서는 '영화의 전체주의 시대'에 간만에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영화를 봤다.

내 어머니는 해녀, 아버지는 어부다. 고향은 제주도이며, 10여 년의 긴 여행 끝에 현재 제주도에 살고 있다. 그래서 <인어전설>의 장치들에 대해서 좀더 디테일하게 읽을 수 있었다.
 
 영화 <인어전설> 스틸 컷.

영화 <인어전설> 스틸 컷. ⓒ 자파리필름

 
주인공인 해녀 옥자(문희경 분)는 억척어멈이고, 그의 남편(양정원 분)은 하릴없는 놈팡이, 이장(이경준 분)은 색시를 얻고 싶은 노총각 이장이다(그래도 이제까지 영화 중에서 가장 권력자다). 아들 녀석(연준 분)은 여자에 정신이 팔려 학교도 그만두는데 사기를 당해 입던 옷까지 빼앗기고 한 마디로 '개털'이 되어 집에 돌아온다. 뭐, 즐거울 일 하나 없는 바닷가 마을의 일상이다.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싱크로나이즈드 코치 영주(전혜빈 분). 그녀는 어두운 기억이 있는 여자다. 싱크로나이즈드라는 낯선 소재 안에는 영주가 어두운 과거를 치유하고 가족을 다시 찾는 이야기가 관통하고 있다. 

옥자는 집의 실질적인 가장이다. 남편은 옥자의 표정을 슬슬 살피며 돈을 뜯어낼 궁리를 하고, 아들 녀석은 옥자가 돈을 숨겨둔 위치를 귀신 같이 알아맞힌다. 옥자는 번 돈을 집 구석에 꽁꽁 숨겨두느라 골머리를 썩인다.
 
 영화 <인어전설> 스틸 컷.

영화 <인어전설> 스틸 컷. ⓒ 자파리필름

 
제주도의 해녀들은 대장부의 기질이 다분하다. <인어전설>도 해녀의 대장부 기질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일제 강점기였던 1932년 '잠녀(潛女) 항일투쟁'(해녀(海女) 항일투쟁)만 보아도 해녀들이 대의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다. 옥자를 대장부로 이해하면 영화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이해할 수 있다. 서울에서 굴러온 싱크로나이즈드 코치 영주가 자신들을 비아냥거리자 똑같이 갚아 주고 결국 3판 2승의 승부를 겨루는 장면, 바다 도둑놈들이 해산물을 훔쳐가자 마을 해녀들과 한꺼번에 몰려가서 혼내주는 장면, 자신의 알콜중독으로 행사가 취소돼 사죄하는 영주를 단번에 용서를 해주는 장면 등은 옥자의 성격을 잘 설명한다.

이 영화에서 옥자는 입체적인 캐릭터다. "당신까지 나서면 일이 커져"라고 하면서 남편을 말리는 옥자의 모습은 남편을 존중하는 것으로 보인다. 오멸 감독이 옥자를 통해서 보여준 해녀론은 내 경험상 사실적이고 설득력 있다. 여성과 남성의 경계에 있으면서도 순응할 때는 순응하고 싸울 때는 싸우고 풀 때는 푸는, 말 그대로 '바다 같은 사람'이다. 

​거친 바다에서 살아남으려면 사람 역시 바다를 닮을 수밖에 없다. 우리 어머니도 실질적인 가장으로서 우리를 키워내셨다.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면서 부모님 세대를 표현하는 한 줄의 문장을 떠올렸다. '어머니는 고생하시고, 아버지는 방황하시고.' <인어전설>에도 어느 정도 통하는 것 같다.

특이한 캐릭터 똥낑이네 가족으로 본 '오멸의 제사' 

제주 4.3항쟁에 대한 '제사' 형식이었던 영화 <지슬>에 이어, <인어전설> 역시 '제사'의 색깔이 강하게 담겨 있다. 오히려 '제사'나 '샤머니즘'의 요소는 <인어전설>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바다는 죽음의 공간이며 해녀들은 매일매일 죽음에 다녀온다. 돌아오지 못하는 해녀는 어김없이 죽음을 맞이한다. 때문에 제주의 해녀들은 죽음에 가깝다. 똥낑이할망(김영희 분)은 매일같이 정한수를 떠다가 바다에 절을 한다. 바다를 젖줄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평안을 빌어주는 것이다. 
 
 영화 <인어전설> 스틸 컷.

영화 <인어전설> 스틸 컷. ⓒ 자파리필름

 
신내림을 받아 때때로 접신상태가 되는 똥낑이는 할머니와 매일 바다에 가서 난바다를 바다본다. 가끔 조류에 떠밀려 오는 해녀의 시체도 찾는다. 물에 빠져 죽은 사람도 똥낑이의 눈에는 보인다. 그런 똥낑이네 가족에게 갑자기 나타나 '물춤'(싱크로나이즈드)을 추는 영주는 참 좋았다. 다시 한 번 봤으면 좋겠다. 똥낑이 할머니는 똥낑이의 마음을 알아 영주에게 돈을 주면서 물춤을 한 번만 더 보여달라고 조른다. 똥낑이 할머니가 바다에 제 몸을 바쳐서 죽은 날 밤에 영주는 소원대로 똥낑이에게 물춤을 춰 준다. 똥낑이 할머니가 죽기 전에 떠다 준 정한수를 마시고 어두운 기억을 비로소 사그러뜨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다라는 공간은 분명 치유를 해주는 곳이지만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다만 본인들은 누가 그 대가를 지불했는지 모를 뿐이다. 똥낑이 할머니가 목숨을 던져 어두운 그림자를 막아줬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게 바다를 터전으로 사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덕을 심는다. 계산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덕은 어차피 돌고 도는 것. 다만,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야 덕이 빛날 수 있다는 메시지가 잔잔한 물결처럼 넘실거린다. 

​우리 민족은 제사를 하고 점을 치고 숱한 민간신앙에 의지하면서 살아 왔다. 제주도는 그중에서도 신들의 고향이다. <인어전설>이 보여주는 샤머니즘은 '두려움'이다. 이것을 동양철학에서는 '경(敬)의 정신'이라고 한다. '경' 자를 파자하면 무당이 큰 탈을 쓰고 신에게 기도한다는 뜻이다. 신을 목전에 두고 있기 때문에 두렵지 않을 수 없다. 공자는 백성을 다스릴 때 마치 큰 제사를 모시듯 하라고 말했다. 백성을 신으로 바라보고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바다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항상 경계해야 하고, 인생과 사람을 쉽게 보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도 영화 안에 숨어 있다. 

오후 2시에 단 한 번 있는 상영을 잡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해녀 어머니들을 모아 공동체 상영을 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해녀가 아니라, 해녀의 덕에 기대 살아가는 사람들이 봐야 할 영화다. 해녀의 덕은 제주도를 넘어서 참 먼 곳까지 미치고 있으니까. 그나마 제주 서귀포 메가박스에서는 저녁 시간에 상영을 한다니 다행이다. 제주말로 '제사 먹으러 가듯' 좀처럼 보기 힘든 이 한국 영화를 잘 먹고 오시기를. 
인어전설 오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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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놀이 책>,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 <공자, 사람답게 사는 인의 세상을 열다> 이제 세 권째네요. 네 번째는 사마천이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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