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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도읍지인 한양의 시가지는 백악, 인왕, 목멱산, 낙산의 내사산의 능선을 따라 축조된 한양도성을 기준으로 성 밖과 안이 나눠진다. 그 중 교남동은 서문이었던 돈의문 밖 첫 번째 마을이다.

이곳은 조선시대 서울의 십 경에 들 정도로 풍광이 수려한 명승지였다. 행정구역 이름이 반송방의 이름이 수십 보 크기의 그늘을 드리우는 큰 소나무에서 유래한 것처럼 풍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개항이후에는 전차가 개통되기 시작하면서 서울과 인천을 잇는 교통로 기점이 되었고, 외국인들의 주교, 교육, 의료 시설들이 들어섰다. 그리하여 20세기 초의 돈의문 주변은 특히 미국인과 유럽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 되었다.

돈의문 주변은 외국인들이 새로 지은 서양식 건물과 판매하는 수입품들로 채워지면서 점차 이국적인 풍모를 띠어갔다. 필자가 답사하면서 보았던 홍난파 가옥과 딜쿠샤 근대 서양식의 건축 모양을 나타내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때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썼던 서양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동네이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딜쿠샤'가 있다. 그 밖에도 교남동이 간직하고 있는 '100년의 역사'에 대하여 자세히 소개하고자 한다.

위기의 문화재 #딜쿠샤
 
  복원사업이 진행중인 딜쿠샤의 모습이다.
  복원사업이 진행중인 딜쿠샤의 모습이다.
ⓒ 최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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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북삼성병원 건물 밑에 위치한 경교장을 옆으로 성곽 길을 따라 올라가면 붉은 벽돌로 지어진 허름한 2층 다가구주택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의 이름은 '딜쿠샤'로 한말 민족정신을 고양하던 언론사인 '대한매일신보'의 사옥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건물은 1995년부터 문화재 지정 및 언론박물관 조성을 위한 계획을 세웠었지만, 머릿돌에 새겨진 'DILKUSHA 1923'의 의미를 밝히지 못해 진행되지 못했었다.

그러다 2006년 브루스 테일러라는 미국인이 다큐 <수요기획-아버지의 나라> 제작을 돕기 위해 방문하면서, '딜쿠샤'의 정체가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부친인 앨버트 테일러가 지은 건물로, 앨버트 테일러는 AP통신기자로서 3.1운동과 제암리 사건의 전말을 전 세계에 알렸던 인물이었다. '딜쿠샤'는 앨버트 테일러가 조선을 위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역사가 담겨진 장소였다.

1963년 국유지가 되었으나 정부의 방치로 일반인의 무단거주가 일어나면서 심하게 훼손되었다. 2016년 2월이 되어서야 본격적인 딜쿠샤의 복원사업이 진행되었고, 현재까지도 진행중이다.

근대 한국음악을 담은 곳 #홍난파 가옥
 
 홍난파 가옥의 붉은 벽돌이 인상적이다.
 홍난파 가옥의 붉은 벽돌이 인상적이다.
ⓒ 최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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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선교사가 지은 홍난파 가옥은 한국 근대음악의 시작을 알렸던 홍난파가 살았던 곳이다.

교남동에 남아있는 근대식 건물들 중 복원을 거치면서 가장 양호한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 붉은 벽돌을 타고 집 주변을 넝쿨이 둘러싸고 있어 마치 근대 시대에 온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필자는 토요일에 방문해서 개방을 하지 않아 안으로 들어갈 순 없었다. 하지만 5년 전 이맘때 쯤 근대사에 관심이 있어 방문했을 당시에는 안으로 들어가 내부를 구경할 수 있었다. 거실 한 가운데는 큰 피아노가 있었고, 홍난파와 관련된 근대시대의 악보들이 전시되어 있어 당시의 음악역사를 자세히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누군가는 홍난파를 한국 근대음악의 시초라고도 하지만, 반대로 친일음악가로도 부른다. 실제로 그는 항일운동을 했던 인물이자 사상전향서를 쓴 인물이기도 했다.

홍난파라는 한 인물의 역동적인 삶이 담겨진 교남동의 역사는 이 모든 것을 기록하고 있었다.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역사를 이곳에서 되새겨보는 것은 어떨까.

죽첨장에서 #경교장으로
  
일제는 금채굴장려정책을 통해 수많은 금광을 발굴하였다. 이러한 골드러시의 바람을 타고 금광 재벌이 된 최창학은 1938년 그의 회사인 대창산업 옆에 2층 서양식 건물을 세웠다.

이 건물은 당시 가로명 죽첨정에서 이름을 따서 '죽첨장'이라 불렀는데, 주로 외빈 접대용으로 이용되었다. 해방 이후 그는 친일 이력을 없애기 위해 김구에게 이 집을 무상으로 내주었다. 백범 김구는 '경교장'이라 이름을 바꾸고, 1949년 서거하기 전까지 임시정부 청사와 거처로 사용하였다. 이후 대사관, 고려병원 시설 등으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복원 후 전시공간이 되었다.

경교장을 방문하면 2층에 탄환 자국을 볼 수 있는데, 백범 선생이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기까지 치열했던 역사의 현장과 순간을 직접 느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경교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뿌리를 이어준 곳으로서 그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큰 장소이다.

사라진 교남동의 역사를 기록하다 #돈의문전시관
   
 돈의문 전시관은 유적전시실, 아지오, 한정과 연결되어 있다.
 돈의문 전시관은 유적전시실, 아지오, 한정과 연결되어 있다.
ⓒ 최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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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의문 전시관 2층 내부 모습이다.
 돈의문 전시관 2층 내부 모습이다.
ⓒ 최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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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봄 오래된 성 밖 동네 교남동은 뉴타운 건설을 위한 철거현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떠나고 빈집들의 벽면에는 붉은 페인트로 철거대상임을 나타내는 표시가 그려졌다.

뉴타운이란 이름의 새 동네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것이라지만 오랜 삶의 흔적들이 사라질 수밖에 없음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 안타까움이 사라질 동네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겨야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고, 그렇게 탄생한 곳이 '돈의문전시관'이었다.

'돈의문전시관'에는 교남동을 포함한 새문안동네의 총 900여동의 건물 중 307동을 조사 기록한 자료가 남아있다. 그 과정에서 교남동의 숨어있던 모습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곳을 따라 흐르는 만초천 천변에 땅의 변화를 따라 적응하며 세워진 놀라운 모습의 한옥군, 마지막까지 대청마루에 창문도 달지 않고 원래 모습 그대로 사용된 한옥집, 초가집에서 시작하여 주변의 집들을 통합하여 생긴 복잡한 구조의 음식점, 양옥같은 일식집 등.

쌓여있던 삶의 층 속에서 변화, 적응, 절충했던 실제적 도시적 양상들이 드러났던 것이다. 교남동의 조사기록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면서 완전 철거에서 보존재생으로 바뀌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바탕으로 리모델링 작업을 거쳐 '돈의문전시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한옥마을을 복원한 모습이다.
 한옥마을을 복원한 모습이다.
ⓒ 최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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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원 당시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두었다.
 복원 당시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두었다.
ⓒ 최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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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문전시관'은 새문안 동네의 식당으로 운영되던 건물들을 활용한 문화공간이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후반까지 이탈리안 레스토랑 아지오와 한정식집인 한정 등 식당으로 운영되었었다. 건물들이 가진 공간 질서를 유지하면서 안전을 위한 공사를 거쳐 전시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이곳에서는 역사와 건축물, 그리고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다.

이제 옛 동네 교남동은 사라지고 돈의문 뉴타운 새동네가 만들어졌다. 새로운 동네에는 새로운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삶이 층이 쌓여갈 것이다. 성 밖 교남동과 새문안 동네의 역사는 '돈의문전시관'에 기록, 보존되었다. 돈의문 뉴타운에서 쌓여갈 삶과 역사가 옛 교남동의 역사를 이어갈 것임을 필자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덧붙이는 글 | 경교장 사진만 나무위키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나머지 사진은 제가 직접 답사하여 촬영한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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