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16 16:25최종 업데이트 18.11.16 16:25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를 폭살시킨 의열단 박재혁 부산시 동구 초량동 이바구길 초입(초량교회와 초량초등학교 사이)에 의열단 박재혁 열사에 대한 사진과 기록이 전시돼 있다. 일경에 체포 직후 중상을 입었음에도 일제가 주는 음식과 물을 일절 거부한 채 곡기를 끊고 순국한다. 부산상업학교(부산상고 전신) 시절부터 항일운동을 하였다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아무리 취조하고 고문을 해도 박재혁 의사는 누구의 사주도 받지 않고, 누구와 공모하지도 않고 의거는 단독으로, 오직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행한 것임을 당당하게 주장하였다. 

총독부 경찰은 박재혁이 의열단 단원임을 알고 단장 김원봉을 교사자로 지목하는 한편 공범자라고 하여 박재혁과 가까운 최천택ㆍ오택ㆍ김영주ㆍ김병태ㆍ김기득ㆍ백창수 등을 일제히 검거하였다.


이들은 혹독한 고문을 받고서도 공범사실을 완강히 부인함으로써 10월 16일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이중 오택은 박재혁이 맡긴 폭탄을 보관한 일이 알려져 화약취급위반죄로 대구감옥에서 1년 동안 수형 중 1922년 가출옥되었다. 박재혁이 귀국 후 동지들과의 만남 등을 말하지 않고 끝까지 단독거사임을 진술했기 때문이다.   

일제는 초조해졌다. 
일본 국내의 <대판매일신문>과 <대판조일신문> 등이 일본의 동화정책이 근본적으로 실패했다는 비판 기사를 쏟아내면서 총독부와 경무총감부를 질타했기 때문이다.

…평양ㆍ경성에서 폭탄사고가 발생한 것은 괴이치 않다. …무지한 자의 횡포이니 당연시 되지만 이번 부산사건은 천만 의외의 일이다. 동경 복판에 폭탄이 떨어진 것과 동일시할 수 밖에 없다. 부산은 300년(임진왜란 이후 부산 개항을 말한 것 같음) 이래 일본의 거류지이며 개화도가 우리와 동일하다.

이번 사건의 범인은 부산 태생이며 일본식 교육을 받은 사람인데…배일사상을 가진 것으로 보아 금후 도저히 안심할 수 없다. 일선동화는 단념하는 것이 오히려 현명하다. (주석 1)
 

박재혁 의사 사형 언도 기사 "사형에 처한다는 판결을 지난 삼심일일에 언도하였더라"라 하여 3월 31일 사형언도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독립신문 1921년 4월 9일자 ⓒ 개성고등학교 역사관 제공

 
일제경찰은 배후를 밝히지 못하자 박재혁 의사를 살인ㆍ건물파괴 등의 혐의로 기소하고, 1920년 11월 2일 부산지방법원의 사형선고에 이어 1921년 2월 14일 대구복심법원(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하였다. 

무기징역의 이유는 박재혁의 "범죄는 건조물침입죄 및 살인미수죄ㆍ건조물파괴죄의 합죄로서 조금도 가석할 수는 없는 바이나 피고의 범죄동기는 타동적이고 자동적이 아님을 인정할 점과 범죄의 결과가 비교적 피해가 근소하고 인명이 미상에 그친 점, 아울러 피고가 회오의 정상이 역력한 것이므로 정상을 참작하여 사형을 감하여 무기징역에 처단한다"고 판시하였다. 검찰의 항고로 경성고등법원의 최종심의는 3월 31일 사형을 선고하여 사형이 확정되기에 이르렀다.

대구복심원이 '회오의 정상' 운운한 것은 대단히 정략적이었다. 

일제는 우리 독립운동가들을 재판할 때  마치 반성한 것처럼 상투적으로 이런 용어를 썼다. 박재혁 의사가 '회오의 정상'이 역력하였다면 굳이 경성고등법원이 사형이 선고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박재혁 의사는 거사의 동기를 조국의 독립을 위해 단독으로 거사했음을 진술하고 추호도 비굴하거나 선처를 구걸하지 않았다. 그랬으면 최종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지 않았을 것이다.

사형이 확정된 박재혁 의사는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의거 지역인 부산형무소가 아닌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것은 의열단원이나 부산 민족주의자들의 습격에 대비한 조처였을 것이다.

박재혁 의사는 나이는 아직 젊었으나 정신은 담대했다. 고교시절부터 비밀결사에 나서고 상하이 등지에서 독립운동지도자들을 만나면서 우국열정이 넘쳤다. 그리고 생명을 조국해방투쟁에 바친들 아깝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재판정에서 하늘이 무너지는듯한 충격을 받고 흐느꼈던 어머니와 여동생의 앞길이 염려되었으나 조국의 의로운 사람들의 손길이 있으리라 믿었다. 

주석
1> 김석희, <박재혁의사>, <부산지역독립운동사학술회>, 부산일보사 주최, 1989년 8월 30일.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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