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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9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 구속 수사와 김명수 대법원장 면담 요구' 기자회견을 앞두고 KTX해고승무원들과 시민단체 회원들이 서있다.
 지난 5월 29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 구속 수사와 김명수 대법원장 면담 요구" 기자회견을 앞두고 KTX해고승무원들과 시민단체 회원들이 서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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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대법관을 꿈꿨던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재판관이 아닌 피고인으로 법정에 선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사법농단 사건의 첫번째 재판이다. 검찰이 그에게 적용한 30개가 넘는 혐의 가운데 대부분은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다. 결국 법원이 임 전 차장의 직권남용 혐의를 얼마나 인정하느냐에 따라 사법농단 관련자들의 형사처벌 수준이 좌우된다. 

직권남용죄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해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누군가의 권리행사를 방해할 때 성립한다. 검찰은 임 전 차장이 법원행정처 심의관들에게 부적절한 의도로 사건 검토를 지시하거나 보고서를 작성하게 한 행위 모두 직권남용에 해당한다고 보고 있다. 반면 임 전 차장은 대부분의 사실관계를 인정하면서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최근 법조계에서는 이 같은 직권남용죄 적용범위를 두고 논쟁 아닌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사법농단에 앞선 국정농단 사건이 대표적이다.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작성한 김기춘 전 비서실장, 조윤선 전 정무수석과 삼성물산 합병에 개입한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 사기업 경영에 관여한 안종범 전 경제수석 등은 모두 직권남용 유죄를 선고 받았다. 

그러나 박근혜 전 대통령, 우병우 전 민정수석 등은 일부 직권남용 혐의에 무죄가 선고됐다. 직권남용이 성립하려면 해당 행위가 공무원의 직권에 해당해야 한다. 사기업에 청탁하는 것은 사적인 행위지 대통령의 직무범위에 들지 않기 때문에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취지다. 검찰은 '대통령의 직무범위'를 너무 좁게 해석하는 것이라고 즉각 반발하기도 했다. 

최근 이명박 전 대통령이 공무원들에게 다스 관련 소송 지원 등을 지시해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됐지만, 1심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민간 기업 다스의 소송 지원을 지시한 것이 법령에 규정된 대통령의 직무 권한으로 볼 수 없으니 직권을 남용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논리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 역시 같은 논리로 전경련에 보수단체를 지원하도록 한 화이트리스트 사건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다. 

결과적으로 임종헌 전 차장을 비롯한 사법농단 사건에서 직권남용죄 인정 여부는 재판부가 직무범위를 어디까지로 보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원순 제압문건' 작성한 국정원 직원들 직권남용죄
 
박원동 전 국정원 국익정책국장이  지난해 10월 27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 ‘국정원 댓글 사건’관련 영장실질 심사를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박원동 전 국정원 국익정책국장이 지난해 10월 27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 ‘국정원 댓글 사건’관련 영장실질 심사를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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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직권남용죄를 적용할 수 있는 직무범위에 관한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최근 법원이 이 문제를 명확하게 규정한 판결을 내놓았다. 바로 이명박 정부 당시 국가정보원이 벌인 '박원순 제압문건', '좌파 연예인 퇴출' 문건 등을 작성하고 실행한 국정원 직원들에 대한 유죄 판단이다. 

지난 1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9부(부장판사 강성수)는 이명박 정부 국정원에서 원세훈 당시 국정원장의 지시로 각종 '정치공작'에 가담한 박원동 전 국정원 국익정보국장과 신승균 전 국익전략실장에게 1심에서 유죄를 선고했다. 이들은 국정원법 19조인 직권남용죄 위반 혐의를 받는다. 국정원법상 직권남용죄는 막강한 권한을 지닌 조직 특성상 일반 형법의 직권남용죄보다 형량이 더 높지만 사실상 같은 구조의 법률이다. 

1심 판결문에 따르면 박 전 국장과 신 전 실장은 원 전 원장의 지시를 받아 '야권 제압' 작업에 들어갔다. 국익정보국이 수집·전달한 정보를 국익전략실에 전달하면 국익전략실이 방안이나 전략을 수립하는 보고서를 작성해 다시 국익정보국과 심리전단 등 실행부서에 전달하는 구조였다.

이들은 2011년 10월 26일 서울시장 보궐선거 전후로 여당 선거대책을 마련했다. 'SNS의 선거 영향력 진단 및 고려사항', '서울시장 좌편향 시정운영 실태 및 대응방향(일명 박원순 제압문건)' 등 부하 직원들에게 문건을 작성하게 했다. 보수단체를 동원해 박원순 서울시장 규탄 시위를 열고, 보수 성향인 유명인을 '아바타'로 키워 보수여론 결집에 활용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나아가 정권 반대 발언을 한 방송인 김제동씨와 김미화씨, 가수 윤도현씨를 '종북세력', '좌파 연예인'으로 규정해 소속사 세무조사를 하고, 퇴출 공작을 벌였다.

이들은 직권남용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문건을 작성한 부하직원들은 보고서를 작성할 권한이 없어 작성 지시는 자신들의 직무범위에 포함되지 않으며 아래에서 자발적으로 기획해 작성한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또, 일부 보고서는 원장, 청와대 보고용으로 작성됐으며 '출연분량 축소' 등 간접 제재 내용으로 실행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부하 직원이 알아서 보고서 작성했다고 보기 어려워"

법원은 이 같은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직권남용죄를 인정해 박 전 국장에게 징역 3년과 자격정지 3년을, 신 전 실장에게 징역 2년과 자격정지 2년을 선고했다.

"어떠한 직무가 공무원의 일반적 권한에 속하는 사항이라고 하기 위해서는 그에 관한 법령상의 근거가 필요하지만, 명문이 없는 경우라도 종합적, 실질적으로 관찰해 해당 공무원의 직무권한에 속한다고 해석되며 남용된 경우, 상대방으로 하여금 사실상 의무 없는 일을 행하게 하거나 권리를 방해하기에 충분한 것이라고 인정되는 경우에는 직권남용죄에서 말하는 일반적 권한에 포함된다고 봐야 한다."

보고서 작성이 국정원법에 국정원 직원의 업무로 규정돼있지 않더라도 일반 업무에 포함되며, 부당한 목적으로 지시해 권한을 방해한 경우 직권남용이 성립한다는 의미다. 재판부는 아래로 책임을 미루는 이들에게 "직원들은 원 전 원장이나 피고인들 지시에 따라 보고서를 작성했다고 봐야 한다"라며 "지시와 관련 없이 자발적으로 기획해 보고서를 작성했다고 보기 어렵다"라고 지적했다.

보고서가 실행되지 않았다는 주장에도 "보고서가 특성 부서에 직접 전달되지 않았더라도 원 전 원장에게 보고된 뒤 원장이 (보고서 내용을) 지시했을 가능성이 크다"라며 "좌파 연예인에 대한 견제라는 측면에서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없고 김미화씨 퇴출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보기 어렵다"라고 판단했다.

부적절한 지시, 확보된 진술... 직권남용 되나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사법농단 사건 '키맨'으로 불리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지난 10월 26일 오전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등 혐의에 대해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 도착하고 있다.
▲ 구속 심판대 오른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장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사법농단 사건 "키맨"으로 불리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지난 10월 26일 오전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등 혐의에 대해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 도착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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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판결은 임 전 차장 사건과 맞닿아 있다. 임 전 차장은 2012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 2015년부터 지난해 3월까지 차장으로 근무하며 상고법원 로비 등 '실무 총괄자' 역할을 했다. 그는 사법농단 사건의 '지시자'와 '실행자' 중간에서 깊숙이 개입했다.

임 전 차장은 행정처 심의관들을 시켜 부적절한 문건을 작성하게 했다. 문건에 따르면 그는 법원 내부 비판세력을 관리하기 위해 양승태 대법원에 비판적인 일선 판사들의 뒷조사를 했고, 실제 행정처는 차성안 전주지법 군산지원 판사의 재산 내역을 조사했다. 양 전 대법원장의 숙원 사업인 상고법원을 위해 특정 재판부 동향을 파악하고, 박근혜 정부와 접촉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민사소송 등 정부의 관심 재판에 개입할 계획을 세웠다.

행정 업무나 법원 내부 상황 파악이 당시 행정처 권한에 포함되지만, 임 전 차장이 심의관들에게 본래 행정처 운영 목적인 재판업무 지원 등과 관련 없는 목적이나 아무 관련 없는 사안으로 부당한 지시를 했다면 직권남용죄가 성립할 수 있다.

실제 수사팀은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 등 윗선 지시로 문건을 작성했다", "부적절한 일을 해 후회한다" 등 당시 심의관이었던 판사들의 진술을 확보했다고 한다. 또, 통합진보당 가처분 담당 18개 재판부 중 "가처분 신청을 인용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행정처 지시로 억지로 했다"라는 진술도 확인했다.

임 전 차장은 아래로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그는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에서 "박근혜 청와대가 손발이 없어 도와준 것"이라면서도 "심의관은 복종의무가 있어 직권남용 상대방이 되지 않는다"라며 혐의를 부인했으며 검찰 조사에서도 '심의관들이 알아서 했다'는 기조를 유지했다.

그러나 앞서 선고된 국정원 판결을 보면 이런 주장으로 책임을 피해가긴 어려워 보인다. 

태그:#임종헌, #박원동, #신승균, #국정원, #사법농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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