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14 17:49최종 업데이트 18.11.14 22:41
 

박재혁 의사 동상 부산어린이대공원 안에 있다. ⓒ 개성고등학교 역사관 제공

 
의거 직후 피체되어 부산경찰서 수사실로 압송된 박재혁은 상처가 심하여 곧 부산부립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수십 명의 경찰이 삼엄하게 경계한 가운데 상처 부위를 치료하고, 이어서  강압적인 수사가 계속되었다. 

박재혁은 시종일관 단독거사였음을 주장하고, 일인 수사관과 검사는 배후ㆍ동조자를 캐물었다. 일제가 이 기회에 반일적인 부산지역 민족주의세력의 뿌리를 뽑고자 하는 의도였다. 이같은 일제의 의도를 꿰고 있는 박재혁이 동지들을 희생시킬 이유가 없었다. 

박재혁은 이 순간 1456년 단종 복위 운동에 참가했다가 김질(金礩)의 밀고로 모의가 발각되어 세조의 국문을 당했던 먼 조상 박팽년(朴彭年)을 생각했다. 박팽년은 국문장에서 세조를 '나으리'라고 부르면서 "나는 상왕(上王:단종)의 신하이지 나으리의 신하가 아니다"고 했다. 모의에 가담한 것을 부인하면 살려주겠다는 세조의 제의도 거절했다. 그리고 당당하게 능지처참의 변을 당하였다. 박재혁도 배후ㆍ동조자들을 불면 극형만은 면해주겠다는 검사의 유혹을 한마디로 거절했다. 
 

왼편 한복 차림의 박재혁의사 부산공립상업학교 재학 때 급우들과 함께 ⓒ 개성고등학교 역사관 제공

 
이 무렵의 일이었다. 부산경찰서의 조선인 사환이 소정이 갇혀있는 유치장에 점심을 가져왔다. 이 소년은 소정에게 은밀한 눈치를 하며 붓대롱을 떨어뜨려 놓고 갔다. 소정은 벌떡 일어나 이것을 밟았다. 잠시 주위를 살핀 뒤 붓대롱을 주워 편지를 꺼내 읽었다. 

"천택아, 고생이 심하겠구나. 너희들은 이 사건을 모른다고 해라.  모든 것은 내가 책임지겠다"라는 짤막한 내용이었다. 


이 편지는 부립병원에 입원한 박재혁이 보낸 것이었다. 박재혁은 조선인 간호원의 치료를 받고 있었다. 이 간호원은 박재혁의 장거에 깊은 감명을 받고 작은 일이나마 도울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고 있었다. 핏줄 속에 흐르는 동포애가 가슴을 쳤던 것이다.

이 간호원은 부산경찰서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혹한 일을 훤히 알고 있었다. 동생의 친구가 경찰서 사환이었기 때문이었다.

며칠을 고민하던 간호원은 일본인 의사들이 없는 틈을 타서 박재혁에게 그 내용을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박재혁이 쓴 편지는 간호원과 부산경찰서 사환을 통해 소정에게 전달된 것이다. 

이것을 읽은 소정은 백만대군을 얻은 듯 더욱 용기를 내었다. 뼈가 부서지고 살이 으깨어지는 고문을 묵묵히 이겨냈던 것이다. 

소정ㆍ김영주ㆍ오택은 부산경찰서에 잡혀온 뒤 3주일 만에 기소돼 부산지방법원 검사국에 이송됐다. (주석 1)

혈농어수(血濃於水)라는 말이 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뜻이 담긴다. 몽양 여운형이 일제강점기 일본에 가서 일본 정부 요인들로부터 갖은 협박과 유혹을 물리치면서 동포 유학생들에게 휘호로 남긴 내용이기도 하다.

일제 부립병원의 간호원 소녀까지도 박재혁의 의기 넘치는 행동과 당당한 모습에서, 자칫 위험에 빠질지도 모르는 일을 감내한 것이다. 

"피는 물 보다 진하다."

주석
1> 앞의 책, 175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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