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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에 엄마는 김치찌개를 끓이고 있었다. 나는 엄마 옆에서 설거지를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가 김치냉장고 깊숙한 곳에 있는 김치를 꺼내기 위해 베란다로 나갔다.

그런데 엄마는 김치를 꺼내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내게 팔이 아파서 김치통을 못 빼내겠다며, 김치통을 대신 꺼내 달라고 했다. 나는 엄마의 팔 상태가 김치냉장고의 김치통을 꺼내지 못할 정도로 나빠졌다는 사실에 눈물이 났다.

내가 취업 준비 때문에 바빠서, 집안일을 못 도와드려서 미안하다고 말할 때마다, 엄마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아들은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데 취직해야지. 엄마 걱정은 안 해줘도 돼."

어제도 나는 엄마에게 괜찮냐고, 집안일이 많아서 힘들지 않냐고 물어보았지만 "아들이 취업 준비 하느라 더 힘드니까, 엄마 걱정은 하지마"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취업 준비를 열심히 하고 좋은 기업에 취직해도, 부모님의 짐을 덜어주지 못하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때문에 찾아 읽은 책 <퇴근은 없습니다>
 
도서관에서 <퇴근은 없습니다> 를 빌려서 읽었다.
 도서관에서 <퇴근은 없습니다> 를 빌려서 읽었다.
ⓒ 유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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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심정을 이해하기 위해, 나는 여성 근로자의 애환과 고통에 대해 잘 설명한 책을 찾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비교적 최근에 출판된 <퇴근은 없습니다>를 읽기 시작했다.

국내 도서를 놔두고 굳이 일본 도서를 선택한 이유는, 몇몇 서적에 대한 편향된 리뷰로 인하여, 혹시라도 책 읽기에 영향을 받을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결혼'과 '육아휴직'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왔다. 아직 '결혼'과 '육아휴직'과 관련된 일을 경험해 보지 못한 크게 와닿지 않았다. 그러나 '맞벌이 부부'를 설명한 아래의 문장을 읽고 나는 깊이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성들에게는 맞벌이임에도 가사와 육아를 하지 않는 남편에게 분담을 재촉하는 것 자체가 피곤한 일이다. 그래서 남편이 하는 일이라곤 아침에 쓰레기를 버리거나 주말에 아이와 놀아주는 것이 다인데도 '남편은 아침과 주말에 가사와 육아를 해주고 있으니 공평하게 분담하고 있다'는 신화를 스스로 만들어 믿으려고 한다." –  66쪽

나 역시, 위의 구절처럼 수많은 집안일 중에서, '청소기 밀기', '설거지하기', '쓰레기 버리기' 이렇게 세 가지를 하는 것이 다였다. 특히나 요즘에는 취업 준비 때문에 더욱 정신이 없어서 저런 일을 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내가 못 한 일은 아빠와 엄마가 분담했겠지만, 아빠도 출퇴근 시간이 긴 직장에 다니기 때문에 결국엔 엄마가 남은 집안 일을 했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최대한 집안일을 열심히 도와주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그동안 가사 분담이 불공평했다는 인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가슴을 후벼 파는 구절이 다시 등장했다.
 
"일부 남성들은 근무가 끝나도 계속 직장에 남아 있다가 그 후 밤거리로 사라진다. 즉 집에 들어가는 시간은 한없이 늦어진다. 설령 집에 돌아와도 아이의 치다꺼리를 제대로 해주는 일은 없다." (78쪽)

나도 사실 예전 집안일을 피하고자 굳이 안 잡아도 될 약속을 잡아서 집에 늦게 들어간 적이 몇 번 있었다. 나도 모르게 내가 집안일을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집안일을 해줄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그 집안일도 대부분 엄마가 했을 것이다. 그리고 뒤이어 충격적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일본 정부에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전업주부 가정과 맞벌이 가정의 수는 1990년대에 역전되어 2015년에는 맞벌이 가정이 1,114만, 전업주부 가정이 687만을 기록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맞벌이 가정이 늘고 있음에도 남편의 70%는 육아를, 80%는 가사를 평소에 거의 하지 않는다." (89쪽)

이 부분을 읽으면서, 집안일을 돕겠다는 것은 결국 개인의 '의지'에 달린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취준생이 아니라 이미 취업을 한 상태였다면, 과연 더 많이 집안일을 도왔을까?라고 자문해봐도, 나는 확실하게 "예"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갑갑한 마음으로 책을 계속 읽어나가다가, 나는 아래의 내용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 정규직 사원의 노동 체제는 시간외근무가 일상화되어도 회사의 요구에 따르도록 하는 '무한정성'을 특징으로 한다. 아이가 태어난 뒤에도 남성의 대다수는 중핵 사원으로서 장시간 노동을 지속한다. 한편 여성은 일에 보람을 느끼고 있더라도 육아라는 제약하에 마미트랙이나 파트타임 노동으로 내몰리는 경향이 있다." (132쪽)

엄마는 한때 보험회사의 잘 나가는 회사원이었다. 하지만 나를 낳고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 어려워 결국엔 포기하고 집 근처에서 자영업을 시작했다. 나를 위해 많은 것을 포기했음에도, 엄마는 단 한 번도 날 탓한 적이 없었다.

다시 한번 가슴이 아파졌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근로자가 '육아'로 인해 직장에서 불이익을 받을지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뒤어어서 일부의 의식개선만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구절이 나왔다.
 
"각종 조사에서는 많은 20대 남성들이 장래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싶다고 응답했다. 그러나 기업 측의 근로 관행과 문화가 바뀌지 않는 한 그들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육아는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나 기업은 젊은 남성들이 추구하는 삶을 고려하여 그들을 혹사시키는 관행을 개선해야 한다." – 196쪽

저자는 의식 개선과 더불어서, 결국에는 관행과 사회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으로는, 관행과 사회를 개선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아들러는 말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결국엔 꾸준한 노력과 변화의 요구만이 '불합리한 환경'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와 아빠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애당초 큰 원인은 아이 키우기를 어렵게 하는 제도와 체계에 있기 때문이다. 이 상황을 바꾸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아주 조금씩이라도 행동을 취하는 것이 중요하다." – 226쪽

저자는 마지막으로, 조그마한 실천이라도 시작할 것을 강조했다. 나부터 집안일을 '제대로' 분담해서 도와주고, 청와대 국민 청원에 한 표를 던지는 그런 조그마한 실천이, 모이면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책을 덮었다.

책을 모두 읽고, 자문해본다. 과연 엄마의 희생이 없었다면, 내가 이렇게 건강하게 잘 자랄 수 있었을까? 결코 아닐 것이다.

물론 '독박육아'와 '독박가사'의 문제는 개개인의 문제만은 아니다. 하지만 특정 성별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가혹한 환경'을 핑계로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나를 위해 이미 많은 희생을 하신 부모님, 특히 엄마가 계속 '슈퍼맨'이 되어 희생하는 상황이 반복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는 부모님보다 먼저 집에 도착할 수 있는 날은 내가 먼저 따뜻한 식사를 준비해놓고, 식사 전에 부모님에게 사랑하고 고맙다는 말을 꾸준히 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가려고 한다. 그리고 이런 나의 작은 결심이 모이면, 언젠가는 '가혹한 환경'도 바꿔나갈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을 해본다.

퇴근은 없습니다 - 오늘도 쉴 수 없는 독박육아

후지타 유이코 지음, 장은정 옮김, 현암사(2018)


태그:#독박육아, #후지타유이코, #퇴근은없습니다, #슈퍼맨,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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