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회 부산독립영화제 개막작 <해변의 캐리어>(2017) 한 장면

제19회 부산독립영화제 개막작 <해변의 캐리어>(2017) 한 장면 ⓒ 김수정 감독

 
회색 가발을 쓴 한 여성(김다인 분)이 파란색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선다. 같은 시각, 흡사 조커를 떠올리게 하는 가발을 쓴 남성(박종환 분)이 검은색 캐리어를 끌고 광안리 해변을 배회하며 지나가는 행인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한다.

오프닝만으로도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는 영화 <해변의 캐리어>(2017)는 지난해 열린 제19회 부산독립영화제 개막작으로 <이매진>(2011), <달을 쏘다>(2013), <파란입이 달린 얼굴>(2015)을 연출한 김수정 감독의 중편독립영화다. 

<해변의 캐리어>를 연출한 김수정 감독은 부산에서 활동하는 여성 감독으로 그녀가 만든 세 번째 장편 영화 <파란입이 달린 얼굴>은 제41회 서울독립영화제 우수작품상, 제17회 장애인영화제 대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무능력한 엄마와 지적장애가 있는 오빠를 부양하며 악착같이 살아가는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파란입이 달린 얼굴>은 제목만큼이나 괴이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독특한 영화다. 남들이 자신 때문에 피해를 받든 말든 오직 생존만 생각하는 여성을 불편하고도 그로테스크한 시선으로 바라본 <파란입이 달린 얼굴>에 비해, 광안리 해변에서 우연히 만난 두 남녀의 이야기를 다룬 <해변의 캐리어>는 한결 부드러운 재미를 선사한다. 

그 어떤 대사들보다 밀도 있고 흥미로운 두 사람의 대화

광안리 해변을 주 무대로 펼쳐지는 <해변의 캐리어>는 흡사 연극 무대를 보는 것 같다. 캐리어를 끌고 광안리 해변을 배회하다가 그녀의 공연을 좋아한다는 팬을 우연히 만나게 된 여성은 꽤 오랜기간 동안 광안리 해변에서 퍼포먼스 공연을 해왔던 예술가로 추측된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더 이상 공연을 하지 않는 여성은 광안리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반면, 광안리를 떠난 지 30년 만에 다시 광안리를 찾은 남자는 너무나도 달라진 광안리 해변 풍경을 낯설어 한다. 바다가 보이는 집과 직장을 원하는 남자는 광안리 근처 부동산, 식당 등을 알아보며 자신이 원하는 조건의 집과 일터를 찾아 다니지만 그의 독특한 외향과 화법 때문에 번번이 퇴짜를 맞는다. 

회색 가발을 쓴 여자와 타인에게 위협감을 주는 복장 차림의 남자. 생김새만 봐도 사회 부적응자임을 암시하는 두 남녀는 해변에서 처음으로 우연히 마주치고, 여자가 일하는 가라오케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해변에서 곧 부산을 떠날 것이라는 여자의 전화통화를 엿들은 남자는 가라오케 주인에게 이 여자는 곧 여기를 떠날 것이니 여자를 자르고 자신을 새 알바생으로 써달라고 생떼를 쓴다.

직언을 잘하는 성격 탓에 다니던 직장에서 부당해고를 당한 아픔이 있다는 남자는 말을 돌려서 하는 법이 없다. 여자 또한 대인 관계가 썩 원만해 보이는 편은 아니다. 공연이 하고 싶어 아무런 연고가 없는 부산까지 내려온 여자는 더 이상 공연을 할 수 없게 되자 무기력함에 시달리는 것처럼 보이고, 분노를 조절하는 것 또한 쉽지 않아 보인다. 

우여곡절 끝에 전 알바생과 새 알바생으로 가라오케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게된 두 남녀는 금세 친해지고 많은 대화를 이어가게 된다. 서로의 삶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주고 받던 두 남녀의 대화는 길게 지속되지는 못하고 뚝뚝 끊겨버린다. 두 남녀 사이에 말이 오고가는 대화라기 보단, 서로 하고 싶은 말만 한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비록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된다는 느낌은 들지 않지만, 각자 삶에 대한 내밀한 고백이 이어지는 대화 내용은 그 어떤 영화 속 대사들보다 밀도 있고 흥미롭다. 

어느새 각자 머리 위에 씌워져 있던 가발을 벗어 던진 두 남녀는 서로의 캐리어 속 물건들을 꺼내 보기도 하고, 괴이한 퍼포먼스를 함께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두 사람이 함께한 시간은 얼마 지속되지 못한다. 그래도 남자는 여자와 조금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어하는 눈치지만, 여자는 캐리어를 끌고 제 갈길을 가려 한다. 

인생에 관한 짧은 연극 같은 느낌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해변의 캐리어>는 상당히 연극적이다. 두 인물을 조망하는 카메라 구도, 배우들의 연기톤도 연극적으로 느껴지지만, 영화 내용 자체가 우리의 인생에 관한 한 편의 짧은 연극 같은 느낌이다.

다시 영화 내용으로 돌아가 극 초반 자신의 공연을 좋아한다는 여성팬을 만나게 된 여성은 해변에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것 또한 공연이라는 팬의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다. 그리고 여성의 공연을 다시 보게 되어서 너무 기쁜 그녀의 팬은 여성이 해변에서 자신의 지인과 전화 통화를 하면서 화를 내는 것 또한 공연의 일종인 줄 알고 그녀에게 자신의 카메라를 들이댄다.

삶인지 연기인지 분간되지 않는 불분명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그저 각자 맡은 역할에 충실할 뿐이다. 두 남녀가 우연히 만나 하룻밤을 보낸다는 지극히 평범한 내용을 한 편의 흥미로운 연극적 영화로 승화시킨 김수정 감독의 차기작이 궁금하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권진경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neodol.tistory.com), 미디어스에 게재되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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