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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부신 햇살이 방안을 한가득 점령해 이른 아침부터 나를 요란하게 깨웠다.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부모님과 근처 사찰로 나들이를 계획한 터라 나는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한껏 설레는 기분을 만끽했다.

그런데 전날 화기애애했던 가족 단체채팅방이 잠잠하다.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어둠의 기운을 내뿜는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남동생이다.

"여보세요?"
"누나, 엄마 아빠가 사소한 걸로 오늘 아침에 좀 싸웠다. 분위기 보니 아마 부산에 안 내려가실 것 같은데. 나도 화해시켜보려 했는데 잘 안 되더라. 누나가 한번 전화해봐."
"도대체 싸운 이유가 뭔데?"
"누나가 ***김밥 먹고 싶다 했다며."

 
김밥
 김밥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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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발단은 의견충돌이었다. 엄마는 내가 좋아하는 가게에서 김밥을 사가자고 한 반면, 아빠는 그냥 가까운 곳에서 사자고 한 것이다.

결국 서로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말싸움으로 번져 아빠는 방으로, 엄마는 말도 없이 밖으로 나가버렸다고 한다. 수험생이라 오늘 나들이에 불참하는 남동생이 낮은 목소리로 파이팅을 외치며 수화기 너머로 나의 등을 떠밀어 주었다.
전화 통화 중 문자 하나가 와 있었다.

"갑자기 몸이 좀 피곤하네. 다음에 갈게. 미안하다. 오늘 집에서 푹 쉬어라."

평소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으시는 분이기에, 머쓱함이 잔뜩 배인 아빠의 문자 내용에 가슴이 찡해졌다.

"네, 아빠. 조만간 부산 한번 놀러 오세요."

나는 아쉬운 마음에 심심한 위로를 담아 답장을 했다. 그리고 곧장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상외로 덤덤한 목소리였다.

"지금 너희 집 쪽으로 가는 길이다. 20분 뒤면 도착한다. 엄마 고속도로니깐 일단 전화 끊자."

잠시 후, 퉁퉁 부은 눈으로 애써 웃음을 짓고 있는 엄마와 대문 앞에서 만났다. 기분전환도 하고 바람도 쐴 겸 집 근처 위치한 범어사로 향했다. 석가탄신일이라 그런지 지하철역 입구부터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붐볐다.

범어사를 향하는 대로변은 행사 진행으로 인한 차량 통제로 버스만이 더디게 바퀴를 굴리며 움직일 뿐이었다. 우린 눈짓을 주고받은 뒤 경로를 틀어 산속 등산로로 향했다. 그리고 발을 맞추어 나란히 따라 걸었다.

푸른 잎들로 무성한 숲은 울창했다. 그리고 그곳을 품은 적당한 온도와 습도, 빛을 발하는 쾌청한 봄 날씨는 피로와 지친 일상의 묵은 때를 말끔히 씻겨줬다.

1시간 가량 걸었을까? 우리는 산의 경계가 새롭게 시작될 무렵, 발견한 포장도로를 따라 사찰 입구로 들어갔다. 그리고 대웅전 안에서 인자한 미소로 반겨주시는 부처님을 향해 절을 했다.

엄마는 내부의 장엄하고 고요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목탁 소리로 명상의 시간을 가지며 자리를 뜨지 않은 채 오래도록 머물렀다. 그 안으로 고즈넉한 햇살 한줄기가 들어왔다.

점심시간에 맞춰 우리는 사람들의 발길을 따라 공양간으로 향했다. 오색빛깔을 입은 봄나물들의 향연을 버무리며 즐겁게 점심을 했다.

나는 눈으로 담은 찰나의 순간을 핸드폰 카메라로 담아 아빠에게 전송했다. 아무래도 채워지지 않은 허전함은 아빠의 부재인 듯했다. 살갑지는 않으시지만, 우리들의 대화에 활기를 불어넣으며 촌철살인같은 농담을 던지시곤 뒷모습을 보이는 아빠가 문득, 아니 꽤 많이 보고 싶었다.

비탈길을 따라 절 주변을 오르내리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늦은 오후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때 엄마의 가방 속에 들어 있는 핸드폰의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핸드폰 액정화면 속에는 '애인'이란 문구가 얼핏 보였다. 엄마는 입을 삐죽 거리며 무의식적으로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나를 먼저 앞으로 보낸 뒤 조심스레 전화를 받았다.

잠시 후 나를 뒤따라온 엄마는 해 지기 전 집에 얼른 가야겠다며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저녁을 먹고 가라는 나의 제안도 단호히 거절하며 아빠랑 동생의 굶주린 배를 걱정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선 나도 모르게 그만 피식 웃음이 터져버렸다. 진심을 다해 부처님께 빈 소원이 이뤄졌다. 내 간절함이 저 하늘 끝까지 닿았나 보다.

태그:#부처님 오신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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