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12 17:10최종 업데이트 18.11.12 17:10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를 폭살시킨 의열단 박재혁 부산시 동구 초량동 이바구길 초입(초량교회와 초량초등학교 사이)에 의열단 박재혁 열사에 대한 사진과 기록이 전시돼 있다. 일경에 체포 직후 중상을 입었음에도 일제가 주는 음식과 물을 일절 거부한 채 곡기를 끊고 순국한다. 부산상업학교(부산상고 전신) 시절부터 항일운동을 하였다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박재혁은 9월 14일 오후 2시 30분경 부산경찰서에 도착하였다. 의열단원 이종암의 동생 이종범이 쓴 <의열단 부장(副將) 이종암전>에 따르면 이종암과 최천택 등이 집에서부터 동행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오택의 유고집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폭탄을 넣은 것이 책보따리인지, 궤짝인지도 차이점이다. 


그날이 9월 13일.

그날 밤 이종암 등과 만나 한잔 술을 나눈 후 자택에서 잤다. 그리고 그 이튿날(즉 9월 14일) 아침에 박재혁은 고향에 올 때와 꼭같은 중국 상인의 차림으로 책보자기를 메고 부산경찰서로 가서 서장의 면회를 청했다.

이 때에 이종암과 다른 두 동지는 먼 데서 눈인사만 하고는 그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재혁은 아주 중요한 책이니 꼭 서장에게 보이겠다고, 서장이 보면 깜짝 놀랄 정도의 서적이라면서 꼭 서장 면회를 요구했다. 그래서 무난히 서장실에 들어가 책상위에 보자기를 내려놓고 풀게 되었다. 서장 옆에는 다른 두 졸도가 서 있었다. (주석 1)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의거 기사. 제목은 "부산경찰서폭탄소동"으로 폭탄은 매우 강렬하였고 폭파현장은 처참하였음을 싣고있다. <부산일보 호외>에는 경찰서장 하시모도가 심한 증산은 아니며 곧 치료를 받고 사무실에서 지휘명령을 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되던 중 숨졌는데 일제는 이를 은폐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부산일보 호외>(1920년 9월 14일)) ⓒ 개성고등학교 역사관 제공

 
경찰서 2층의 서장실로 안내된 박재혁은 작은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태연한 모습으로 책 보따리(궤짝)를 풀었다. 하시모토가 호기심을 갖고 지켜보고, 그의 곁에 두 명의 경찰이 부동의 자세로 서장을 호위하고 있었다. 그는 한두 권의 책을 우선 꺼내 보였다. 다음은 해방 후 환국한 김원봉이 작가 박태원에게 밝힌 의거의 '실황'이다.

이 책 저 책 꺼내 들고 보여주는 사이에 마침내 그 밑에 감추었던 폭탄과 전단이 드러났다. 

그는 곧 그 전단을 집어, 왜적 앞에 던지고 유창한 일어로 꾸짖었다. 

"나는 상해서 온 의열단원이다. 네가, 우리 동지를 잡아 우리 계획을 깨트린 까닭에 우리는 너를 죽이는 것이다."

말을 마치자 그는 곧 폭탄을 들어 둘이 서로 대하고 앉았는 탁자 한가운데다 메어다 부치니, 이때 두 사람의 상거는 겨우 2척에 불과하다.

광연한 폭음과 함께 두 사람은 다 같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소스라쳐 놀라 그 방으로 달려들었을 때, 조금 전에 서장을 찾아온 중국인 서상은, 몸에 중상을 입고 마룻바닥에 쓰러져 꼼짝을 못하고, 서장은 선혈이 임리(淋漓: 쫙 깔림)한 가운데, 정신을 잃고 쓰러져서 마지막 숨을 모으고 있었다. 

달려들어 안아 일으켜 보니, 한편 다리가 폭탄으로 하여 끊어졌고, 얼굴은 이미 산 사람의 것이 아니다. 온 경찰서 안이 그대로 벌컥 뒤집혔다.

그들은 곧 수상한 중국인을 유치장으로 데려가 가두어버렸다. 그리고 송장이 된 서장을 병원으로 떠메어 갔다. (주석 2)


주석
1> 이종범, <의열단 부장 이종암전>, 94쪽, 광복회, 1970.
2>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5~4쪽, 깊은 샘, 2000.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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