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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17일, 전남 해남군 송지면의 한 논에서 가을 추수가 한창인 모습.
 지난 10월 17일, 전남 해남군 송지면의 한 논에서 가을 추수가 한창인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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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은 우리의 식량안보를 지키는 공직자입니다!"

2016년 10월 19일, 문재인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기 전 농민들 앞에서 공언한 혁신적 농정관이다. 그래서 새 대통령과 새 정부에 대한 농민들의 기대는 컸다.

그런데 2년이 지난 지금 농민들의 기대는 실망과 배신감으로 바뀌었다. 청와대 앞에서 한 달 넘게 단식농성한 농민들의 면담 요청에도 일언반구 화답이나 반응이 없다. 그때 그 문재인 대통령은 대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나. 촛불시민의 주권을 위임받은 문재인 정부의 국정 철학에 농정 의지가 과연 한 줄이라도 새겨져 있는가.

최근 문 대통령은 국회 시정연설에서 실로 오랜만에 구색을 맞추듯 농정 구상을 몇줄 끼어넣었을 뿐이다. "농업인들의 소득 안정을 위해 목표가격에 물가상승률이 반영되기를 바라고, 공익형으로 직불제를 개편해나가겠다"라고. 하지만 이 정도로는, 농정 실패를 방치하다시피한 이전 이명박·박근혜 정부와 어떤 부분이, 얼마나 달라진 것인지 농민들은 피부로 느끼기 어렵다.
 
농정대개혁을 요구하며 청와대앞에서 한 달 넘게 단식을 이어간 시민농성단.
▲ 청와대 시민농성단 농정대개혁을 요구하며 청와대앞에서 한 달 넘게 단식을 이어간 시민농성단.
ⓒ 김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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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광역·기초정부 모두 '농민기본소득' 깃발을

문 대통령이 언급한 '공익형 직불제' 개편은 이개호 농림축산식품부장관도 강조하는 농정혁신의 핵심 선결과제다. 농민들의 생태·환경보전 책무를 보상하고 소농·영세농에게 실질적인 직불금이 돌아가도록 하겠다는 정책 목적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을 통해 기초소득보장제, 농민수당 등 이른바 농민 기본소득 관련한 대안을 검토, 연내 그 방안을 제시할 것으로 알려진다.

다만, 전형적인 행정관료 출신으로 총선 이전까지만 임기를 스스로 제한한 시한부 농정 수장 처지에, 얼마나 추진력과 진정성을 담보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반면 중앙정부보다 오히려 지방정부의 행보가 더 빠르고 더 믿음이 간다. 우선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농정철학은 보다 개혁적이고 사회혁신적이다. 직불금이니 수당이니 굳이 돌려말하지 않고 바로 농민 기본소득제로 직진한다.

최근 경기도 농업인의 날 기념사에서 이재명 도지사는 "농업이야말로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전략사업"이라며 "지역화폐를 통한 농민기본소득을 보장하겠다"라고 약속했다. "얼마 되지 않는 지원금도 대부분 부농, 기업농에 집중되고 있는 만큼 어려운 농민들에게 진짜 혜택이 갈 수 있도록 농민 기본소득에 대해서도 검토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초지자체는 이미 농민 기본소득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강진군이 지난해, 해남군이 내년부터 '농민수당'이라는 이름과 방식으로 농민 기본소득 지급을 결정했다. 이후, 각 기초지자체마다 농민수당 도입 검토 및 시행 준비 움직임이 급속도로, 연쇄적으로 확산하고 있다. 특히 농민수당은 전국농민회 차원에서 제안, 도입을 적극 주도하고 있어 농민들의 호응이 크다. 본격적 농민 기본소득제로 발전하는 데 물꼬를 터주는 효과가 기대된다.
 
2018년 9월 여의도에서 열린 전국농민대회에서 쌀 목표가격 인상 등을 요구하는 농민들.
▲ 전국농민대회 2018년 9월 여의도에서 열린 전국농민대회에서 쌀 목표가격 인상 등을 요구하는 농민들.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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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목표 가격이 오르면 먹고살만해지는가

어쨌든 공익 직불금이니 농민수당이니 농민 기본소득이니 관련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농정혁신이 분위기가 점차 고조되고 있어 고무적이다. 이쯤에서 논쟁의 소재가 되고 있는 몇 가지 주요 질문을 스스로, 농민들에게 그리고 국민들에게 던져볼 필요가 있다. 3%의 생산자 농민과 97%의 소비자 국민 모두를 만족시키는 100%짜리 사회적 합의가 없는 농정혁신, 농민 기본소득제는 성공을 안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선, 쌀 목표가격이 오르면 농민들은 먹고살만해지는가? 얼마 전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은 2018년산부터 향후 5년간 적용되는 쌀 목표가격을 80㎏당 19만6000원으로 인상하기로 결정했다. 24만 원 이상을 요구해온 전농 등 농민단체들의 기대치에는 크게 못 미친다. 정부가 쌀 생산비 상승과 물가인상률을 반영한 최소한의 농민소득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또 어겼다면서 실망과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그런데 설령 목표가격이 현실화된다 해도 모든 농민에게 공평한 혜택이 돌아가지는 않는다. 현행 농지면적에 비례하는 직불제 방식으로는 본질적 한계가 있다. 직불금 예산이 일부 소수의 대농에 편중 지급되면서, 대부분의 소농, 영세농들에 대한 소득보전 효과는 미미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농가소득의 양극화 현상 심화, 공공연한 부재지주의 부정수급 사례 등 직불금 제도의 부작용은 농정 실패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된 지 오래다. 그래서 이른바 공익형 또는 EU(유럽연합)식 직불제로 개편하려는 논의와 제안이 농정혁신의 핵심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쌀 주산지인 이이데마치는 '사람이 살기좋은' 최고의 농촌전원경관 명소로도 유명하다.
▲ 일본 이이데마치 일본의 쌀 주산지인 이이데마치는 "사람이 살기좋은" 최고의 농촌전원경관 명소로도 유명하다.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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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형·EU식 직불제가 대안인가

그렇다면 공익형 또는 EU식 직불제가 대안인가? 최근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에서는 직불제를 농업의 공익적 가치를 보상하는 '농업기여지불제'로 개편하자고 제안했다. 직불제 예산 규모도 2022년까지 농업예산 대비 약 30%인 5조2000억 원으로 확대하자고 주장했다.

논과 밭에 동일단가를 지급하고, 면적별 지급단가를 현행 면적비례 방식에서 '하후상박'으로 개편하자는 내용이다. 이로써 현행 직불제에서 소외된 중소농·영세농의 가치와 역할을 배려하는 방식을 기본형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여기에 친환경농업, 경관보전, 조건불리 등 직불을 가산형으로 통합하고 청년 농업인 대상 추가 지불제까지 고려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공익형 직불제 개편 또는 전환의 성패는 오직 그 방식과 내용에만 있지 않다. 충분한 예산의 확보와 효과적인 예산의 집행에 결국 달려있다. 유럽연합의 농정예산은 직불금에 집중되고 있다. 농정예산은 1990년대 EU 전체예산의 50%대 수준에서 2000년대 40%대 수준으로 감소했으나, 오히려 직불금 예산 비중은 2003년 CAP(Common Agricultural Policy, 공동농업정책) 개혁을 계기로 70% 이상 수준을 유지하고 있을 정도다.

아예 김성훈 전 농림부장관은 "농가 단위로 기본소득 직불금을 지급하자"며 직불금의 기본소득화를 제안했다. 법정 최저임금소득의 50%를 농가에 보충 지원한다고 가정하면, 농가 호당 약 월 50만 원, 연간 600만 원을 지급하면 된다는 이야기다. 이 기본소득 방식의 '농가 직불금'을 전국 농가 110만 호에 일괄 지급한다면 연간 총 6.6조 원 정도가 소요된다. 정부의 결심과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조달하고 집행할 수 있는 예산 규모다.
 
독일 바이에른주 켐텐시의 요지프 힘머 전 농정국장이 EU(유럽연합)의 공익형 직불제인 '문화경관직불제'를 설명하고 있는 모습.
▲ EU식 직불금 독일 바이에른주 켐텐시의 요지프 힘머 전 농정국장이 EU(유럽연합)의 공익형 직불제인 "문화경관직불제"를 설명하고 있는 모습.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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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농민 모두애게 현금 기본소득을, 먼저, 충분히

농민수당이나 공익형 직불금은 농민 또는 농가소득의 보전을 위한 현실적 개선제도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국가기간산업으로서 농업의 경제적, 산업적 가치, '식량안보를 지키는 공직자'와도 같은 농민의 사회적 가치를 온전히 책임지는 본질적 대안은 될 수 없다.

결국 농민들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게 가장 이상적이고 효과적인 소득보전대책일 것이다. '재산 및 노동 유무를 따지지말고 무조건, 모든 농민에게 보편적으로, 농가가 아닌 농민 각자에게 개별적으로, 그것도 월급처럼 정기적으로, 현물이 아닌 현금으로, 게다가 충분히 넉넉히' 지급해야 한다.

물론 이렇게 묻고 따지는 국민들이 적지 않다. "도대체 왜, 농민에게 기본소득을 줘야 하나?" 심지어 일부 농민들 스스로도 여전히 이해와 신뢰가 부족하다.

답은 간단명료하다. 농민이 농사만 지어서는 먹고살 수 없기 때문이다. 농가 평균 농업소득은 한해 1000만 원에 불과하다. 농민이 농촌에서 먹고 살 수 없다면 폐농·이농으로 내몰려 결국 도시난민이나 도시빈민으로 전락하고 만다. 심각한 사회적·국가적 문제가 된다.

시장주의를 신봉하는 일부 국민들의 의심은 또 이어진다. "아니, 농사를 지어서 먹고 살기 어렵다고? 그렇다면 굳이 농민이 농사를 계속 짓는 이유가 뭐야? 다른 살 길을 찾아야 하는 것 아닌가?"

국민의 생명과 생존을 보장하는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농민의 공익적 소임, 사회적 책무는 결코 게을리하거나 포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국민들 가운데 누군가는 반드시 농사를 지어야 한다. 그것도 순정한 소농·영세농이라야 국토의 생태환경과 국민의 생명을 걱정하고 책임지면서 좋은 농사를 지을 수 있다. 소수의 상업적인 기업농이나 사사로운 장사농을 앞세우는 대규모 농사는 농업이 아니라 공업, 상업, 서비스업처럼 변질·타락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농민에게만 줘야 하나? 도시노동자, 도시빈민도 먹고살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인데?" 인간적으로 안타깝지만, 도시민에게는 주지 않는 게 좋겠다. 농촌을 떠나 도시의 빈민으로 전락한 도시난민들은 당장 농촌으로, 지역으로 하방하는 게 최상책이 아니겠는가. 농촌에 내려가서 스스로 농민으로 전향하면 당당히 농민 기본소득의 정상적인 수혜자로 대접받을 수 있다.
 
2016년  촛불혁명의 주역인 시민들은 농민과 국민이 함께 잘사는 '농부의 나라'를 염원하고 있다.
▲ 광화문 촛불광장 2016년 촛불혁명의 주역인 시민들은 농민과 국민이 함께 잘사는 "농부의 나라"를 염원하고 있다.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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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 기본소득제는 국토 균형발전 및 지역 분권자치 정책

이처럼 농민 기본소득제도의 진실과 궁극의 목적은 오로지 농민을 편향적으로 우대하려는 게 아니다. 도시민을 역차별하고 농업이나 농촌지역에 특혜를 주려는 건 더욱 아니다. 농민과 도시민이, 생산자와 소비자가 농도상생으로 '함께 살자'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과밀한 도시인구를 과소한 지역으로 분산재배치, 국토의 균형발전을 촉발하고 견인하는 전향적 투자지원정책으로 얼마든지 기능할 수 있다.

사실상 기본소득과도 같은 효과를 발위하는 독일 등 EU(유럽연합)의 농가직불금도 결국 농민의 이농으로 인한 도시빈민화, 도시과밀화를 차단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국민의 2%가 농민이지만 60%가 농촌에 사는 독일의 농업 직불금제도는, 국토의 균형발전과 지역의 분권자치를 위한 합리적 정책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런데 과연 농민 기본소득이 농정의 문제를 푸는 만능열쇠, 만병통치약일까?" 그건 당연히 아니다. 오로지 기본소득만으로 농민의 민생고, 농정의 실타래를 풀 수는 없다. 기본소득과 더불어 농가소득 제고 및 생산성 증대, 농산물 가격안정, 농촌복지, 농촌마을공동체 재생 등 기본적 농정 체계와 질서는 변함없이 개선·강화돼야 한다.

아울러 무상교육, 무상의료, 안정고용, 사회주거 등의 기본적 사회복지서비스의 혁신이 EU 수준으로 선행·병행되어야 한다. 법·정책·제도 이전에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 사회안전망(social safety net)이라는 아늑한 울타리와 비빌 언덕이 한국 사회 전반과 기저에 강고하게 구축돼야 한다.

공익농민을 위한 기본소득 제도는 농민들이 농사로 돈을 벌어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이기적·고행적 상업농의 굴레에서 해방시켜줄 것이다. 그 결과 사람과 자연을 살리는 이타적이고 창조적인 공익농사를 짓는 사회적 농부로 다시 태어나게 할 것이다. 사람이 돌아오는 농촌, 사람 사는 세상을 앞 당기고 말 것이다. 결국 스스로 서는 농민이 국민의 생명을 지키고, 저절로 살아가는 농촌이 도시와 국가를 재생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정기석씨는 마을연구소(Commune Lab) 소장입니다. 11월 중으로 '농민에게 기본소득을!'이라는 책을 출간할 예정입니다.


태그:#농민기본소득, #쌀, #목표가격, #농민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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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연구소(Commune Lab) 소장, 詩人(한국작가회의)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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