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망 받던 천재 지휘자가 청력을 잃게 되면 어떤 기분일까. 그는 계속해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수 있을까. 연극 <내 모든 걸>(김원진 작)은 청력을 잃은 천재 지휘자 건우(김기정 배우)가 수화를 배우게 되면서 겪는 내면의 변화를 다뤘다. 마지막에 건우는 청각장애인을 위한 열린 음악회의 지휘를 맡는다. 그에게 과연 무슨 일이 있어났을까.

연극의 장점을 최대한 발휘한 좋은 작품이 대학로에서 상영 중이다. 바로 <내 모든 걸>이다. 이연컴퍼니에서 제작·기획한 이 작품은 무대 위 사운드와 침묵을 이야기에 엮었다. 자신에 일에 집중하는 지휘자 건우의 모습. 흑백 팸플릿 속 그는 애절하면서도 환희에 가득 찬 표정이었다. 대학로 한성아트홀 제2관에서 막을 연 연극 <내 모든 걸>은 12월 16일 막을 내린다.

어떤 예술가는 심각한 장애나 충격적인 일을 겪고 자신의 역량을 극적으로 끌어올리는 기적을 보인다. 베토벤, 고흐 등은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 가장 강렬한 삶의 진리를 깨닫고서 길이길이 남는 명작을 만들었다. 연극 <내 모든 걸> 주인공 건우는 30대 중반으로 앞날이 창창한 지휘자다. 그에게 청력이란 가장 큰 무기이기도 했다. 지휘를 하는 내내 그는 예민하게 수많은 악기들의 화음과 조율 그리고 음정과 박자를 파악해 지적하며 균형 있게 지휘해 나갔다. 건우는 틀에 맞춰진 고전 음악들이 완벽히 재현되도록 했다.
 
 연극 <내 모든 걸> 포스터. 천재 지휘자 건우는 청력 잃은 상실감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연극 <내 모든 걸> 포스터. 천재 지휘자 건우는 청력 잃은 상실감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 이연컴퍼니


극복해야 할 시련과 맞닿은 지휘자

건우는 의사인 친구에게서 삶이 무너지는 이야기를 듣는다. 자신이 청력을 잃고 있다는 것이다. 너무 예민했던 건우는 그저 지휘자라는 직업 때문에 생긴 반응이라고 치부해왔다. 좌절하고 있는 그의 집으로 30대 초반의 발랄한 통역사 이유가 찾아온다. 지휘자는 깐깐하고 대인관계를 싫어하고 고독하고 또 자존심이 강한 남자다. 그런 그는 일개 통역사로부터 수화 배우기를 강하게 거부한다. 하지만 통역사는 돈을 벌기 위해 지휘자를 가르쳐야 한다는 목적으로 매일 찾아온다. 그러던 중 지휘자는 완전 청력을 잃는다.

지휘자는 자신을 청각 장애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비웃음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장애인이라는 신분 자체가 평균보다 낮은 신분이라고 여기고 있던 그였다. 그러나 통역사는 점차 그에게 깨달음을 준다. "숨지 말고 당당해져라", "자신을 자랑스러워해야 자랑스러운 자가 되고 부끄러워하면 부끄러운 자가 된다"는 이야기와 함께 청각 장애를 가진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휘자는 용기를 얻는다. 하지만 자신이 무대에 서게 되는 기회가 오자 다시금 두려움을 보인다.

청력 상실은 그에게 큰 사건이었고 혼자서는 쉬이 극복하기 힘든 업보였다. 그는 항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왔다. 사람들의 반응과 시선 그리고 박수갈채가 그의 존재 이유였다. 스스로를 칭찬하기보다 남의 칭찬에만 익숙해 있었다. 그러나 그렇기에 남과 얽혀있던 이러한 매듭을 풀 수 있는 자도 오직 자신뿐이다. 지휘자는 통역사의 끈질긴 설득 끝에 청각 장애인으로서 첫 무대에 서게 된다. 이에 통역사 역시 자신의 아버지를 위한 음악회를 열 수 있다면 기뻐한다.
 
 연극 <내 모든 걸> 공연 장면. 청력을 잃은 천재 지휘자 건우는 수화 선생님 이유를 만나서 마음을 열게 된다. 연극 '내 모든 걸' 커튼콜 유튜브 동영상 캡쳐.

연극 <내 모든 걸> 공연 장면. 청력을 잃은 천재 지휘자 건우는 수화 선생님 이유를 만나서 마음을 열게 된다. 연극 '내 모든 걸' 커튼콜 유튜브 동영상 캡쳐. ⓒ 이연컴퍼니

  
간접 경험을 선사하는 무대

결국 그는 음악을 통해 고요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 속에 항상 음악이 흐르고 있음을 깨닫는다. 스스로 매듭을 풀고서 예술적 고통을 환희로 승화시켰다. 아마 이 장면에서 관객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지켜봤으리라. 흐르던 음악 소리는 지휘자 시점에서 뚝 끊겼고 극단은 고요함으로 가득 찼다. 오직 지휘자의 처절한 몸부림만이 극대화되어 조명으로 비춰졌다.

관객들은 청각 장애인이 되어 그 느낌을 가슴으로 들었으리라. 와중에 통역사 아버지가 관객석 한 군데에 자리를 잡았다. 진정 그 음악회는 관객, 즉 청각이 불편한 사람들을 위한 무대였다. 문뜩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연극이 일반인이 아닌 진정 청각 장애인들을 위한 연극을 반전처럼 설정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감탄스러웠다. 연극의 본질과 주제가 가슴으로 느껴졌다. 정말이지 청각 상실은 음악을 감상하는 데 아무런 불편도 아니었다. 그만큼 지휘자는 표정과 몸짓으로 허공을 휘저으며 음악이 전할 법한 파장을 관객들에게 날리고 있었다. 모든 심신이 음악으로 소용돌이치는 장면이었다. 연극 장면을 통틀어 가장 멋진 장면이었다.

통역사 아버지는 딸에게 줄 꽃다발을 꼭 쥐고서 울고 있었다. 관객들은 아버지에 동화돼 함께 눈물을 흘렸다. 언어는 가끔 거짓을 전달하지만 마음은 절대 거짓을 보이지 않는다. 지휘자는 마음으로 음악을 지휘하고 느끼는 법을 무대에서 홀로 터득하고 있었다. 그리고 청각 장애인들을 위해 인순이 노래를 수화로 선보였다. 무뚝뚝하던 그의 얼굴이 풀어지면서 수만 가지 근육이 꿈틀거림은 물론이다.

흔한 줄거리 그러나 대작이 될 가능성

멋진 연극이었다. 짧은 시간에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다만 몇 가지 아쉬운 점도 있다. 여자의 기면증 설정은 연극 이야기 상 불필요해 보였다. 가난한 집안과 아빠 병원비를 벌려 힘겹게 살아가는 발랄한 여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해도, 기면증 설정이 정말 극 전개에서 꼭 필요한지 체감하기 어려웠다. 훌륭한 무대 가운데에서 또 기면증으로 쓰러지지는 않을까 조마조마 해야 했고 극 몰입에 방해가 될 수밖에 없었다.

가난하지만 발랄한 여자, 잘 나가지만 무뚝뚝한 남자라는 설정도 진부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둘은 젊었고 애인도 없었다. 둘의 관계가 사랑으로 발전할 거라는 암시를 충분히 예측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연극에는 로맨스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지휘자가 자신을 이겨내는 고뇌를 좀 더 조망했으면 어땠을까. 지휘자만을 주인공을 내세워 그의 심리를 연극 상에서 훌륭히 표현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남았다.
내모든걸 연극내모든걸 이연컴퍼니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학술문화, 과학 및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