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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위한 의미있는 '무엇'이 필요한가요? 계간지 <딴짓>의 발행인인 프로딴짓러가 소소하고 쓸데없는 딴짓의 세계를 보여드립니다. "쫄지 말고 딴짓해!" 밥벌이에 지친 당신을 응원합니다.[편집자말]
사실 말할 때마다 나는 이 '프리랜서'라는 용어가 낯설고 불편하다. '프리랜서의 휴가'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면서도 '나는 정확히 말해서 프리랜서는 아닌데'라고 생각한다.

프리랜서란 직업이 아니고 상태다. 어떻게 보면 '프리랜서'라는 말은 직업보다는 '삶의 태도'에 가깝다. 프리랜서는 자기가 일하고 싶을 때만 일하는 사람도 아니고, 일하고 싶은 곳에서만 일하는 사람도 아니고, 하고 싶은 일만 하는 사람도 아니다.

계약에 따라 매일 정해진 장소에 가야 할 때도 있고, 일이 고역이라 그만두고 싶지만 이 바닥에서 평판이 안 좋아질까 봐 꾸역꾸역 끝내는 때도 있다. 일감은 불규칙하게 들어와 회사에서처럼 업무 강도를 조절할 수도 없다. 그러니 프리랜서는 이러한 정의보다 더 철학적이고 서정적인 관념으로 묶이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자유의 값에 놀라며, 혀를 내두르며, 불평불만을 쏟아내며 뒤 돌았다가 기어이 다시 와서 그 비싼 값의 자유를 사는 사람. 자유의 값을 치르느라 일감을 찾아다니고, 영업하고, 더 많은 일을 하는 데도 더 적은 돈을 받고, 법의 테두리망 밖에 있는 것을 감내하는 사람. 직장인 대출을 받지도, 명절에 회사에서 나오는 사과며 배를 받지도, 연차나 휴가도 언감생심인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프리랜서다.
 
제주로 향하는 비행기, 프리랜서의 특권은 비행기값이 싼 날에 맞춰 떠날 수 있다는 것!
 제주로 향하는 비행기, 프리랜서의 특권은 비행기값이 싼 날에 맞춰 떠날 수 있다는 것!
ⓒ 박초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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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프리랜서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재미있게도 프리랜서의 장점은 바로 그 단점 때문에 얻어질 때가 많다. 여러 일감을 한 번에 하고 있으니 내 목줄을 쥔 사람이 한둘이 아니고, 그러기에 한 개의 목줄쯤 끊어져도 생계에 큰 지장이 없다.

프리랜서라고 고개 빳빳하게 들고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정말 이건 아니다 싶을 땐 정중하고 단호하게 일을 거절할 수 있다. 하나의 굵은 밧줄에 매달려 살기보다 여러 개의 가느다란 줄에 몸을 묶고 사는 사람이랄까.

게다가 영업부터 마케팅, 회계까지 모두 혼자 하다 보니 피곤하지만 그 모든 수확 역시 내 것이다. 가끔 조직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착각하는 이들을 보게 된다. 그 껍질을 벗어내면 그 안의 개인이 얼마나 연약한지 모르는 것이 안타깝다.

그러나 프리랜서는 아무리 연약한 껍데기일지언정 자신의 껍데기를 두르고 세상에 나간다. 글을 써도 내 이름으로 나가고, 출판 마케팅을 해도 뒷면엔 내 이름이 새겨져 있다. 부딪치고 깨져도 그만큼 껍데기가 단단해지기에 가치가 있다. 땅주인이 되기엔 시작부터 글렀고 소작농은 도저히 적성에 안 맞아, 척박한 산으로 올라간 화전민 같다.
    
이런 프리랜서에게도 휴가는 필요하다
  
주말에 잠시 머문 제주의 숙소
 주말에 잠시 머문 제주의 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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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프리랜서에게도 휴가는 필요하다. 비록 여름휴가도 연차도 없지만, 그래서 쉬는 만큼 일을 못 하는 비용은 고스란히 내가 지불해야 하지만 말이다.

시장에 가면 하루를 쉬는 것이 하루 치의 매상을 날리는 셈이라 자리를 뜨지 못하고 365일 일하는 상인들을 본다. 프리랜서도 마찬가지다. 허나, 돈만 재산은 아니다. 시간도, 젊음도, 건강도 재산이다. 쉬지 않으면 결국 금방 소진된다.

이다혜의 <프리랜서 매거진>에서 프리랜서로 일하는 신예희 일러스트님을 인터뷰한 걸 읽은 적이 있다. "어떻게 여자 나이 마흔이 넘어서도 프리랜서로 살 수 있을까요?" 그 질문에 그녀의 대답은 현실적이고 명쾌했다.

"돈 모아요! 건강 관리 잘하고요!"

뭐 대단한 노하우인가 싶지만 저 두 가지에 충실하기는 쉽지 않다. 출근과 퇴근을 누군가 통제해주지 않는 프리랜서는 더욱 그렇다. 누군가 끊어주지 않으면 밤늦도록 일할 때가 많고(글을 쓰는 지금, 시곗바늘은 새벽 세 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어쩌다보니 한 달 내내 쉬지 않고 일하기도 한다.

쉬지 않으면 대표적으로 두 가지 문제가 생긴다. 하나는, 역시 건강이다. 지금이야 괜찮지만 체력도 평생 동안 소진해가며 쓰는 육체의 자원이다. 오래 일하고 싶다면 지금 덜 일 해야 한다.

둘은, 새로운 자극을 접하지 않으면 새로운 아이디어도, 콘텐츠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프리랜서야말로 매일 같은 공간으로 출근하는 회사원이 가지지 못하는 창의성이 있어야 하는 사람이다.
    
늦은 가을 휴가, 제주로 떠나다

하여, 늦은 가을을 맞아 나는 제주로 향했다. 프리랜서 형태로 단기간 근무하던 하나의 프로젝트가 끝난 참이었다. 10월 마지막 날부터 약 15일 정도 스스로에게 준 휴가였다. 제주에 있는 친척이 마침 집을 비워 그 집에서 지낼 수 있었다.

15일 동안 바다를 질리도록 보면서 글을 써오는 것이 목표였다. 일 년에 한 번 이상은 가는 제주라 새삼 관광지를 보고 싶지도,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다니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목표를 이루었느냐고?

제주로 가기 전날, 전에 프리랜서 형태로 일했던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사무실에 한 달에 한 번만 나오고 대부분은 온라인으로 하는 일이라 마음에 들었던 직무였다. 대표는 비슷한 프로젝트를 한 번 더 맡아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내일부터 휴가인데요'라는 말은 쏙 들어갔다. 비행기를 타기 전 급하게 회사와 미팅을 하고, 결국 일감을 안고 제주로 향했다.

쓰고 싶었던 글을 실컷 쓰고 싶어서 제주에 갔는데 막상 마음껏 글을 쓸 시간이 생기는 건 아니었다. 제주에서의 휴가도 일상인지라 장을 보고, 밥을 해 먹고, 옷을 빨고, 청소를 하는 일은 서울과 같았다.

그렇게 오전을 보내고 오후부터 가지고 온 일을 처리하다 보면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온전히 내 시간이 생겼다. 게다가 '휴가 중입니다, 연락하지 마세요'라고 간판을 내걸고 온 것도 아니니 프리랜서인 내가 휴가를 보내는 걸 알 리 없는 사람들이 업무 카톡을 보내왔다.

'넌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잖아'라고 말한다면 프리랜서에 대해 몰라도 한참 모르는 말이다. 프리랜서에게 '자체 휴가'란 이렇게 어렵다.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거나 유명세를 탄 사람이 아니라면 '좀 쉬고 싶어서요'라는 말로 일을 거절하긴 힘들다. 그럴 때 일을 거절하면 정말 중요한 이유 때문에 입을 열어야 할 때 그렇게 하지 못한다.
 
커피가 맛있는 제주 카페 '비브레이브'
 커피가 맛있는 제주 카페 "비브레이브"
ⓒ 박초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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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보기 좋은 서귀포시 카페 저스트인시튜
 바다를 보기 좋은 서귀포시 카페 저스트인시튜
ⓒ 박초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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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관광지를 돌아다니지는 않았지만 '관광객'으로서 내가 세운 원칙은 있었다. 좋은 카페를 다닐 것. 이왕이면 커피가 맛있거나 풍경이 좋은 곳으로 갈 것. 하여, 매일 아침 괜찮다는 카페를 검색해서 하루에 두 곳씩 자리를 옮기며 일했다.

디저트가 맛있는 곳, 바다가 잘 보이는 곳, 로스팅이 훌륭한 곳, 인테리어가 좋은 곳. 좋은 카페는 차고 넘쳤다. 매일 새로운 카페를 만나는 기쁨을 누리며 유목민처럼 이곳저곳을 배회했다.
    
어차피 그곳에서 하는 것이야 노트북에 코를 박고 타자를 치거나, 이고 지고 싸 간 책을 뒤적거리며 글을 발췌하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눈을 들면 바다가 있었다. 그 잠깐의 숨돌림에서 순간을 잡을 수 있었다.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오면 바닷 내음이 와락 감겼다.
 
서귀포시 카페 '아틀리에안'에서 본 풍경
 서귀포시 카페 "아틀리에안"에서 본 풍경
ⓒ 박초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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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가 서울과 무엇보다 다른 건 그 고요함이었다. 제주에 머문 지 며칠이 지나서야 나는 밤마다 느껴지는 이질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건 적막이었다. 서울에서도 홍대 한복판에 사는 나는 낮이고 밤이고 길가는 행인의 수다나, 경적을 울리는 차 소리, 집 앞 버스정류장의 안내음 소리에 시달리며 산다.

그 소음에 너무 익숙해져 내가 그것을 힘들어하는 줄도 몰랐다. 제주에서는 웬만한 시내가 아니고서야 거리가 조용하다. 내가 있던 서귀포시 서홍동에는 밤이면 개 짖는 소리 외에는 별달리 들리는 소리도 없었다.

그렇게 15일의 휴가 아닌 휴가를 보내고 서울로 돌아왔다. 일은 여전히 산적해 있고, 집 앞 대로변에서 나는 소리가 노크도 없이 담장을 넘어온다. 제주에서도 편히 쉰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바닷 내음을 묻히고 왔으니 얼마 간은 또 견딜 만 할 것이다. 프리랜서의 늦은 휴가는 이렇게 끝났다.
 
제주 해지는 풍경
 제주 해지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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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프리랜서, #딴짓, #엔잡, #박초롱, #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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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밥 벌어 먹고 사는 프리랜서 작가 딴짓매거진 발행인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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