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져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르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영화 <풀잎들> 포스터

영화 <풀잎들> 포스터 ⓒ 전원사


지난달 25일, 홍상수 감독의 신작 영화 <풀잎들>이 개봉했다. 잔잔한 바람에도 열심히 흔들리는 카페 앞 고무 대야 안의 풀잎들을 비추며 시작되는 영화는 대번에 시를 기억하는 관객들로 하여금 김수영의 <풀>을 떠올리게 한다. 카페가 있을 것 같지 않은 곳에 자리 잡은 골목안 커피집과 그곳에서 볼 수 있는 인간군상, 그리고 그 근처 식당에서 마주한 사람들은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우는 풀잎들에 딱 들어맞는다.

영화 속 노배우(기주봉 분)는 한참 때 통영에서 날리던 사람이었지만, 함께 극단을 하던 대표와도 틀어지고 한 채 있던 집마저 팔아 써버리고 여자 후배에게 방 한 칸을 얻어보려고 한다. 노배우는 말로는 월세는 내겠다고 하지만 어째 그 말조차 미덥지 않다. 후배는 한때는 흠모했을지 존경했을지 모를 선배 앞에서 "원칙이라 어쩔 수 없다"며 나지막하면서도 완강하게 거절한다.

그리고 역시나 후배인 듯한 소설가에게 "함께 제주도에 내려가 글을 써보면 어떻겠냐"고 청을 넣는, 한때는 연극인이었으나 이젠 글을 쓰겠다는 늙수그레한 남자(정진영 분) 역시 "글은 혼자 쓰는 것"이라는 거절에 부딪힌다.

나이가 든 홍상수의 '페르소나'
 
 풀잎들

풀잎들 ⓒ 전원사


유지태였고, 김태우였고, 유준상이었으며, 이선균이었던 홍상수의 '페르소나'들은 어느덧 나이가 들어 이제 기주봉, 정진영이 되었다. 여자만 보면 어떻게 해보려는 그 예의 습관성 바람은 방식과 방법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그 본성을 놓치지 않는 듯 보였다. 하지만 한때는 잘 나가는 대학 교수였고, 영화감독이던 그들은 어느덧 현업에서 밀려나고 멀어진 본의 아닌 '은퇴자'들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북촌인지 서촌인지, 대다수 홍상수 영화에서 배경이 되던 한옥은 <풀잎들>에서도 여전하다. 오가던 사람들이 얼마 되지 않는 인연으로 혹은 한 술집에서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합석을 하고, 술을 나누고,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가는 방식 역시 과거 그가 보여줬던 영화들과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밤새도록 '연애'를 하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쓰며 공회전을 해도 언젠가는 돌아갈 '현장'이 있던 과거 영화 속 그들의 모습과는 좀 달랐다. 어쩐지 동네조차도 삶의 현장에서 멀어진 곳 같아 보였다. 그건 비단 홍 감독이 나이가 들어서, 그의 페르소나들이 나이가 든 사람들이어서만은 아니다.

19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 기세 좋게 청룡 영화상 신인 감독상을 수상하고, 이어 1998년 <강원도의 힘>으로 감독상을 거머쥐는 등 홍상수라는 사람의 화법이 통하던 그 시절은 그 '바람'같고, 표리부동한 비도덕적인 인간들이나마 그래도 세상에 발 디밀어 살아갈 여지가 있던 때였다. 그들이 밤 새워 논하고 어울리던 그 허황되고 공허하던 문화라든가, 인간이라든가, 사랑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그래도 감독의 비아냥거림을 받으며 삶의 한 자리로 '포용'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20여 년, 그 바람 같던 주인공이 되어버린 감독 자신이 영화 개봉 소식조차 세상에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개인적 사정은 그렇다 치자. 어쩌면 그가 영화를 통해 말해왔던 것들이 '자본'에 둘러싸인 영화, 혹은 문화라는 이름의 '상품' 세계에서 '별책 부록'은커녕, '잡담꺼리'조차 되지 않는 처지가 되었기 때문 아닐까? 그 어느 때보다 <풀잎들>의 공간이 '멈춰진 세상', 혹은 '방기된 세상'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그 '무위'가 그 어느 때보다도 무기력하게 전해진다.

그리고 그럼에도 아직 살아가야 할 풀잎들
 
 풀잎들

풀잎들 ⓒ 전원사


그동안 살던 근거지 통영을 떠나 서울 하늘 아래 한 몸 뉘일 곳을 찾으며 삶의 터전을 마련하려 한다든가, 여자와 글을 통해 무기력한 삶의 돌파구를 마련하려 하는 '풀잎'이고 싶지만, 쉽지 않다. 어느덧 '단풍잎'이 된 그들의 맞은편에, 진짜 풀잎들이 있다.

통영에서 온 노년의 배우와 후배의 대화를, 그리고 카페 밖에서 '글 좀 써보겠다'는 연극배우 선후배의 이야기를 엿듣던 여성(김민희 분)은 한때 연극배우였던 신참 작가의 "같이 제주도에 내려가 펜션을 빌려 함께 글을 쓰자"는 노골적인 추파인지, 모호한 수작인지 모를 그것을 대번에 거절하고 애인인 듯한 남자를 따라 나선다.

하지만 그녀가 따라나선 것은 남동생(신석호 분)이었다. 그녀는 한 식당에서 남동생과 미래를 함께 하고 싶다은 여성(한재이 분)과 함께 식사를 한다. 그런데, 그녀는 미래 가족관계가 될지도 모를 여성에게 대놓고 남동생을 믿느냐, 사랑을 믿느냐며 어깃장을 놓는다. 그런 그녀를 남동생은 '노처녀 히스테리'라 치부해 버린다.

그런가 하면 그런 그녀의 뒤편에서는 얼마 전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여성(이유영 분)이 그 사랑하는 이의 동료로부터 애도와 추궁을 오가는 수모를 겪는다. 그녀를 폄하하는 그 남자 앞에서 하염없이 울며 '사랑'을 고백해야 하는 여성은 영화 속을 떠나, 실제로 홍상수의 영화 중 유일하게 해피엔딩이었던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을 통해 만난 김주혁과 이유영의 사랑을 '배려'해주는 자리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해가 저물어 다시 돌아온 카페. 역시나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두 남녀(안재홍, 공민정 분)가 그 절박한 감정을 지나 연민으로 다시 사랑을 시작한다. 그리고 세상을 조롱하고 엿듣기만 하던 여성은 커피 한 잔을 넘어 숨겨온 소주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단풍'들과 그 후배들의 자리에 합석한다. 결국 우리 옛말처럼 떠난 사람은 떠난 것이고, 삶은 여전히 다시 이어지는 것이다. 살아가는 이들은 여전히 그 삶의, 인연의 끈을 이어가게 마련이다. 여전히 카페 앞엔 풀잎들이 바람에 나부낀다.

따지고 보면, 단풍이라고 해도, 내일 떨어진다 해도, 풀잎은 풀잎이다. 홍상수의 영화는 어느덧 역사가 되어가고 있다. 1990년대의 파릇파릇하던 풀잎이 단풍이 되어가도록 묵묵히 그 세대를 끈질기게 그려내고 있다. 그렇다고 찬사를 보내는 것도 아니다.

홍상수 감독은 마치 사실화처럼 나이가 들어도 제 버릇 개 못주는, 심지어 이제는 삶의 굴레에서조차 밀려나버린 그 세대를 그대로 그려낸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얽히고, 때로는 엇갈리며 아직은 눕기에 이른 젊은 풀잎들 또한 놓치지 않는다. 김수영이 그렸던, 아니 '역사 속 민초'라 해석됐던 그의 시 속 풀잎은 아니지만, 여기 또 바람에 연신 나풀거리는 풀잎들이 있다. 우리 시대의 또 다른 만화경이다. 자기 중심적 개인주의자로 살아온 이들의 역사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실렸습니다.
풀잎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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