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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내와 두브로브니크의 중심 길인 스트라둔(Stradun) 대로를 걸었다. 이 길을 걷다 보니 아주 특징적인 장면이 계속 눈에 들어온다. 여행객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한 손에는 모두 젤라또를 들고 있는 것이다. 누가 봐도 이곳에서 젤라또의 인기는 최고이다. 크로아티아의 젤라또는 안 먹을 수 없다고 알려져 있다.

나와 아내는 두브로브니크에서 유명한 젤라또 가게를 찾아가기로 했다. 우리가 가려는 돌체 비타(Dolce Vita) 젤라또 가게는 스트라둔 대로에서 한 블록 들어간 골목에 자리잡고 있다. 흥미로운, 골목 속 숨은 가게 찾기를 해야 하는 곳이다. 지도에서 보는 것보다 골목 사이의 간격은 아주 짧아서 젤라또 가게가 있는 골목 입구를 하마터면 지나쳐버릴 뻔 했다.
 
돌체 비타. 두브로브니크의 골목에 위치한 유명 젤라또 가게에 여행객들이 몰린다.
▲ 돌체 비타. 두브로브니크의 골목에 위치한 유명 젤라또 가게에 여행객들이 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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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벽에 붙은 가로등 모양의 간판에 빨간 아이스크림이 그려져 있었다. 주문하면서 겪어보니, 가게의 여종업원은 듣던 대로 무뚝뚝한 편이다. 하지만 젤라또의 양은 콘이 넘쳐날 정도로 담아준다. 이 가게도 그렇고 두브로브니크의 젤라또는 빨리 먹지 않으면 손에 젤라또가 넘쳐 흐르게 될 정도로 양이 많은 편이다. 나는 큰 젤라또 콘 2개를 사서 아내가 있는 골목길 실외 좌석에 앉았다. 
 
젤라또. 맛이 상큼한 젤라또를 파는 가게는 두브로브니크 여행의 필수코스이다.
▲ 젤라또. 맛이 상큼한 젤라또를 파는 가게는 두브로브니크 여행의 필수코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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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라또 맛은 상큼하고 값도 저렴하지만 가게 명성만큼 젤라또의 맛이 특별하지는 않다. 우리나라 디저트 가게에서 먹어본 젤라또 맛도 워낙 훌륭해서 이제는 유럽에서 먹는 젤라또 맛과 크게 차이가 난다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젤라또보다도 더 눈길이 가는 것은 가게가 위치한 골목길이었다. 두브로브니크 사람들은 이 좁은 골목에도 테이블을 놓는다. 계단으로 계속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에 비집고 들어선 좌석에 앉아 젤라또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정겹기만 하다.

좁은 골목의 카페에서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들은 이곳 주민들에게는 일상이지만 이방인인 나에게는 너무나 평화롭게 다가온다. 밤이 되면 구시가의 골목 전체가 거대한 식당 같은 기분이 들 정도이다. 작은 골목의 테이블에 앉아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려니 내가 마치 현지에 동화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젤라또 가게에서 나온 우리는 필레 게이트(Pile Gate) 앞으로 향했다. 스트라둔 대로가 시작되는 곳에 아름다운 오노프리오(Onofrio) 분수가 있기 때문이다. '오노프리오'라는 이름은 1448년에 이 분수를 만든 이탈리아 출신 건축가 오노프리오 데 라 카바(Onofrio de la Cava)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 분수대는 당시 시민들에게 식수를 공급하던 급수대이자 분수인데 이 분수대에서 흐르는 물은 지금도 식수로 마실 수 있다.

중세시대부터 이 분수의 물은 무려 20km나 떨어진 리예카 두브로바츠카(Rijeka Dubrovacka) 강에서 스르지(Srdj) 산을 돌아 끌어들였다. 리예카와 두브로브니크 사이에 놓인 이 수로는 크로아티아 역사에서 최초로 건설된 역사적인 수로였다. 당시로서는 멀리 떨어진 수원지로부터 물을 공급받는 시설이 생겼다는 사실 자체가 획기적으로 생각되던 시절이었다.
 
오노프리오 분수. 크로아티아에서 최초로 건설된 수로를 통해 식수가 공급되고 있다.
▲ 오노프리오 분수. 크로아티아에서 최초로 건설된 수로를 통해 식수가 공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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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커다란 분수대가 미학적으로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는 어디에도 없는 16각형의 대리석 벽돌 돔 형태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수대의 한가운데에 돔 모양의 석조 물통이 있고, 그 아래에 16개로 둘러싸인 각 면에서 청량한 물이 그치지 않고 계속 흘러나오고 있다.

각 16면의 분수에는 각 면마다 다른 모습을 한 얼굴조각이 세밀하게 장식되어 있다. 16개의 면에 수도꼭지가 16개 있는데, 이 얼굴 조각의 입에서 나오는 수도꼭지를 통해 배수 풀로 물이 떨어져 흐른다. 16개의 얼굴에서 흘러나오도록 디자인 된 물줄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오노프리오 분수는 규모도 크고 지리적으로도 두브로브니크 구시가를 들어오는 입구에 있어서 가장 많은 관광객들을 볼 수 있는 곳이다. 햇살이 내리쬐는 시간에도 항상 시원한 물이 졸졸 흐르고 있어서 발길을 쉬어가기에도 적당한 곳이다. 퇴색하고 낡은 돔은 자연스레 중세의 옛 정취를 불러 일으킨다.

나는 분수대 앞 기단에 한동안 앉아서 지나가는 여행객들을 구경하였다. 그러다가 옆에 서 있던 한 여행객으로부터 분수대와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산자락에 기대어 시가가 발달한 두브로브니크에서 식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야기였다.

"두브로바츠카 강에서부터 수로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에는 물을 훔쳐가려는 사람들이 많았어. 수로가 통과하는 마을 주민들이 자신들의 밭에 공급하거나 가축용 식수로 사용하기 위해 물을 몰래 끌어가려고 했던 거지."
"그래서 당시 두브로브니크 원로원에서는 이 물을 몰래 훔쳐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오른손이 잘릴 것이라고 공표하기까지 했어."
"물을 훔친다고 손을 잘라버렸으니 당시 법은 정말 살벌하네."


이 오노프리오 분수에서 시작되는 스트라둔 대로는 길이 500m의 대로이다. 이 길은 두브로브니크 성벽의 서문인 필레 게이트 와 성 블라이세(Saint Blaise) 광장을 연결하는 중심 대로이다. 플라차(Placa) 대로라고도 불리는 이 길에는 두브로브니크를 대표하는 레스토랑과 카페, 아이스크림 가게, 서점 등이 즐비하게 늘어서 성업 중이다.

스트라둔 대로는 원래 본토와 작은 섬을 가로막고 있던 운하를 메운 길이다. 도시 가운데를 흐르며 도시를 섬과 그 맞은편 해안육지로 양분했던 계곡 같은 운하 위로 길을 낸 것이다. 이 대로를 중심으로 두브로브니크는 남북으로 양분되는데, 이탈리아인들에 의해 건설된 대로의 남쪽이 역사적으로 더 오래된 구역이다.

1272년에 자치권을 얻은 두브로브니크 시가 이 스트라둔 대로를 완성한 이후, 도시에 많은 변화가 생겨났다. 이때부터 두브로브니크는 로마의 법률과 이 지역의 관습을 참고한 자체 법률이 만들어졌다. 이 길로 인해 도시가 하나로 합쳐짐으로써 더 큰 성장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스트라둔 대로. 오랜 세월 사람들의 발길로 닳은 대리석 바닥이 반짝반짝 빛난다.
▲ 스트라둔 대로. 오랜 세월 사람들의 발길로 닳은 대리석 바닥이 반짝반짝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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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스트라둔 대로가 유명한 것은 아름다운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이 길이 낮이나 밤이나 반짝반짝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사람들이 걸어 다니며 대리석 돌 바닥이 마모되어 반들반들하게 빛나고 있는 것이다.

이 길은 이른 아침에 음식재료를 공급하는 트럭들 외에는 들어올 수 없는 길이어서 수많은 여행자들의 보행자 천국이 되어 있다. 넓은 대로에 외국의 수많은 관광객 인파가 몰리게 되자 대리석 길은 더욱 더 빛나게 되었다. 워낙 바닥이 반질반질해서 발을 바닥에 디딜 때마다 기분이 맑아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 스트라둔 대로의 동쪽 끝에는 스폰자 궁(Sponza Palace)이 있다. 1522년에 건축가 파스코예 밀리체비치(Paskoje Miličević)가 당시 드브로브니크에 유행하던 후기 고딕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을 함께 반영하여 건설하였다. 당시 이 건물은 해상무역 국가였던 라구사 공화국(Ragusa Republic)의 모든 무역활동을 취급하던 세관이었다.
 
스폰자 궁. 17세기의 대지진에도 살아남은 역사적인 건축물 중의 한 곳이다.
▲ 스폰자 궁. 17세기의 대지진에도 살아남은 역사적인 건축물 중의 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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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직사각형 형태로 지어진 이 건물은 두브로브니크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꼽힌다. 1667년에 두브로브니크를 강타했던 대지진에도 손상을 입지 않은 채 본 모습이 그대로 보존된, 몇 안 되는 건물 중의 한 곳이다. 건물 앞에서 보면 우아한 아케이드와 함께 기다란 고딕 양식의 창문이 역사적 체취를 강하게 풍기고 있다.

나는 아내와 함께 입장권을 사서 스폰자 궁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예전에 많은 무역인들이 모이는 장소로 이용되었던 중앙 홀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중앙 홀은 현재 미술관 전시실이 되어 크로아티아 현대미술 화가들이 남긴 작품들이 벽면마다 가득 전시되어 있다.

중앙 홀 한쪽 부속건물에는 14세기에 있었던 라구사 공화국의 조폐국 흔적이 남아있다. 과거 라구사 공화국에서 은행, 귀중품 창고, 무기고, 보세창고로 이용되던 건물들의 내부는 현재 박물관 전시실과 기록보관소로 이용되고 있었다. 나는 두브로브니크에 대지진이 발생하기 이전부터 전해져 온 유물과 세관 자료들을 온전히 관람했다.
 
스폰자 궁 중앙 홀. 중세의 무역상인들이 모여들던 곳이 이제는 미술관이 되어 있다.
▲ 스폰자 궁 중앙 홀. 중세의 무역상인들이 모여들던 곳이 이제는 미술관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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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에 창고로 사용되던 건물의 아치에는 두브로브니크를 제대로 특징 짓는 글이 새겨져 있다.

'우리의 법은 속임을 당하거나 속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우리가 물건을 계량할 때에는 신께서도 함께 하신다.'

정말이지 중세 무역의 중심도시다운 문구 아닌가? 두브로브니크 무역의 역사에서 되풀이된 시행착오와 잘못들을 바로잡아 온 '계량'의 중요성을 한 마디로 함축해서 담고 있는 것이다. 무역과 상업 행위에서 물건의 계량이 얼마나 엄중한 것인가를 두브로브니크 사람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구 유고내전 전시실. 구 유고연방군으로부터 포격을 받은 슬픈 역사를 전시 중이다.
▲ 구 유고내전 전시실. 구 유고연방군으로부터 포격을 받은 슬픈 역사를 전시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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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인상적인 만남은 구유고 내전 관련 전시실에서도 이어졌다. 이 전시실에는 크로아티아가 구유고 연방에서 탈퇴할 때 유고 연방군인 세르비아-몬테네그로 군대로부터 7개월간 포위되어 무차별 공격을 받았던 두브로브니크의 슬픈 역사가 담겨 있었다.

전시관의 자료를 어렵게 해석해 본 내용은 이러했다. 1991년 6월 25일 크로아티아가 구유고 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하자 크로아티아 내에 살고 있던 세르비아인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세르비아의 유고연방군과 함께 크로아티아 내 여러 지역을 점령했다. 1991년 10월부터 구유고 군은 두브로브니크를 전면 봉쇄했고, 12월에는 대대적으로 포격과 파괴를 시작했다. 당시 두브로브니크는 650회 포격을 받았고, 건물의 56%가 파괴됐다.

두브로브니크에서의 살육을 멈추기 위하여 당시 유럽연합은 세르비아에 대해 강력한 제재를 시행하였고, 각국의 언론들도 세계문화유산인 두브로브니크 파괴를 강하게 비판했다. 프랑스 학술원장 등 세계 각지의 지성인들이 인간 사슬을 만들어 도시를 방어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두브로브니크의 젊은 방위군들은 폭탄이 떨어지는 두브로브니크를 육탄으로 사수했다.
 
구 유고내전 전시실. 당시 젊은 나이에 스러져간 크로아티아 방위군들을 기리고 있다.
▲ 구 유고내전 전시실. 당시 젊은 나이에 스러져간 크로아티아 방위군들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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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5월, 크로아티아 방위군은 치열한 전투 끝에 결국 두브로브니크를 탈환했다. 스폰자 궁 전시실에는 당시 폐허 속에서 죽어간 젊은 크로아티아 방위군 병사의 사진들이 벽면에 가득 걸려 있다. 한눈에 봐도 죽음을 맞이하기에는 너무 젊은 얼굴들을 하고 있다. 방위군들의 사진 앞에 두브로브니크 시민들이 바친 처연한 꽃들이 놓여 있다.
 
두브로브니크 방어 지도. 자유를 지키려 했던 두브로브니크의 역사가 펼쳐진다.
▲ 두브로브니크 방어 지도. 자유를 지키려 했던 두브로브니크의 역사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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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실 안은 젊은 나이에 스러져 간 크로아티아 방위군들을 보는 시민들의 숙연한 모습으로 적막이 흐르고 있다. 당시 두브로브니크를 지키던 이들이 펼쳐보았던 두브로브니크 방어지도가 보는 이들의 심금을 울린다. 이렇게 평화로운 햇살이 쏟아지는 두브로브니크가 불과 27년 전에 이런 고통을 겪었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는다.

전시실에는 내전을 겪은 두브로브니크 시민들이 뼈저리게 느꼈을 한 마디가 적혀 있다. '자유는 세상의 그 어떤 보물과도 바꿀 수 없다.' 포격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 쟁취한 자유는 두브로브니크 시민들에게 이렇게도 소중한 것이었다.
 
두브로브니크 시. 스폰자 궁 앞에는 한낮의 따스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 두브로브니크 시. 스폰자 궁 앞에는 한낮의 따스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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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스폰자 궁 앞, 수많은 여행객 머리 위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햇살은 두브로브니크에 쏟아지는 자유의 햇살이었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만 기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슬로베니아, 체코, 슬로바키아 여행기를 게재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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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