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11 11:19최종 업데이트 18.11.11 11:19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를 폭살시킨 의열단 박재혁 부산시 동구 초량동 이바구길 초입(초량교회와 초량초등학교 사이)에 의열단 박재혁 열사에 대한 사진과 기록이 전시돼 있다. 일경에 체포 직후 중상을 입었음에도 일제가 주는 음식과 물을 일절 거부한 채 곡기를 끊고 순국한다. 부산상업학교(부산상고 전신) 시절부터 항일운동을 하였다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총독부 경찰은 박재혁이 부산에 도착한 것을 이미 탐지하고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가 상하이와 싱가포르 등을 왕래하면서 모종의 역할을 하고 있음이 상하이 주재 일본 영사관 경찰의 첩보를 통해 입수된 것이다.


오택은 박재혁이 입국한 이후 일본형사 사까이(坂井)가 찾아와 자신에게 박재혁의 입국 이유에 대해서 물은 것에 불안감을 느끼고, 상황이 좋지 못함을 박재혁에게 알리기 위해 백방으로노력한다.

오택의 회고를 들어보자.

범어사로 사람을 보내 어제 일(일본 형사들이 박재혁 동향에 대한 오택에게 질문한 일)을 전하고서 주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편지를 가지고 간 사람이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래서 그 밤도 깊도록 무슨 소식이 올까 고대하다가 피곤해 잠이 들었던 모양인데 꿈에 박형이 붉은 두루막을 입고 공중으로 날아다니는데 조선 사람들은 모두 쳐다보고 떨어질까 걱정을 하고 일본인들은 괴변이라고 총살하자고 모의하여 군경 상인들의 총질을 함으로 나는 차마 볼 수 없어 눈을 감고 으악 소리를 지르며 놀라서 깨었다. 

심령상 불상조가 확실하여 밤새도록 우울하였다. 나는 박형이 동래로 가고부터 만일을 알 수 없어 야간은 물론이고 주간도 문밖을 나가지 않고 궁리만 하고…소식이 오기만 고대하고 있었다. 

이 날은 9월 13일인데 어제부터 가랑비가 내려 오전까지 가을비가 오락가락 하다가 오후에야 겨우 그쳤다. 갑자기 내 집 문전에 자동차 소리가 나더니 박형이 불쑥 들어온다. 나는 반갑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여 4,5일 동안 어디서 어떻게 지냈느냐 물은 후 간 밤 꿈 이야기를 하니 박형 역시 어젯밤 2시간에 최종 결심을 했다고 한다. 

동래서도 해운대서도 왜경의 조사를 당하였음으로 범어사 원효암까지 피신하여 심사숙고를 하였으나 도저히 호기를 고대할 수 없다. 차일피일하는 동안에 만일 사건이 발각이 되면 나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악형만 남을 것이니 차라리 대상의 대소를 불구하고 나의 결심을 단행하는 것이 본의라고 단정을 내리고 말았다고 냉엄한 어조로….

가족을 나에게 부탁하는 동시에 친지에게는 추호도 피해가 없도록 단독 책임을 지겠다고 말하였다. 나는 부지 중 석별의 눈물이 앞을 가리고 말문도 닫혔다. (주석 1)

이 자료에 따르면, 박재혁은 귀국 후 동래경찰서와 해운대경찰서에서 두 차례 일경의 예비검속을 당한 것으로 돼 있다. 일경이 불시에 귀국한 그의 행적을 추적하고 동향을 주시해온 것이다. 그래서 박재혁은 거사를 서둘렀다.
  

의거 전날 기념촬영사진 최천택(오른쪽) 선생과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 하루 전날 찍은 사진이다 ⓒ 개성고등학교역사관 제공

 

오택과 헤어진 박재혁은 최천택과 함께 용두산 공원에 올라가 부산경찰서 주변을 정찰한 다음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은 해방 후 <민주중보>(1946. 3. 1)를 통해 국민에게 최초로 알려지게 되었다.

가을이 무르익어가는 1920년 9월 13일. 두 젊은이가 싸늘한 표정으로 용두산에서 부산경찰서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이들의 얼굴엔 비장한 결의마저 감돌고 있었다. 

이들이 바로 소정 최천택과 의열단원 박재혁이었다. 

한동안 부산 경찰서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소정이 확고한 어조로 물었다. 

"재혁아, 일을 해치우고 압록강을 거쳐 상해로 가는데 며칠이나 걸릴까?"

"4일이면 충분하네. 왜 그러나?"

"그러면 됐다. 자네는 서장실에 폭탄을 던지고 혼란한 틈을 타서 곧장 피신하게. 뒷 일은 내가 맡겠네."

"그럴 순 없어. 자네를 희생시키고 어떻게 나 혼자 피신할 수 있단 말인가"

"걱정말게. 내가 경찰에 붙잡히게 되면 4일 뒤 자백을 할게. 나는 주범이 아니니까 그들도 심하게 다루지 못할꺼야."

소정은 혼자 피신하기를 완강히 거부하는 박재혁을 간신히 설득하여 약속을 받았다. 

동지애로 뭉쳐진 소정과 박재혁의 뺨엔 한줄기 눈문이 흘러내렸다. 

이들은 두 손을 굳게 잡고 내일(14일)에 있을 거사의 성공을 다짐한 후 기념사진을 찍고 헤어졌다. (주석 2)

마침내 운명의 날 14일이 밝았다. 오택의 <유고집>을 통해 이날 박재혁의 행적을 살펴본다. 

"내 집(좌천동 573) 문 앞에 돌연 자동차 소리가 나더니 "박형이 불시에 들어온다. 반갑고 놀랍기도 하여 같이 방으로 들어와 그동안 지난 일을 서로 두서없이 말했다. 

그는 시간이 절박하다며 맡겨둔 물건을 내어달라고 독촉했다. 나는 암실에 들어가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들고 나왔다. 그는 포지(包紙)를 벗기고 흰색 수건에 곱게 쌌다. 마치 병자에게 줄 물약처럼 보였다…."

오택은 박재혁의 동지로서 박이 상해에서 갖고 온 폭탄을 보관하고 있었다.(일설에는 소정의 당숙모 변봉금이 보관했다고도 함).

이들 두 사람은 좌천동 정공단(鄭公壇)에 올라가 거사 사실을 알린 뒤 천지신명에게 죽음을 맹세하는 고유(告喩)를 올렸다.

박재혁이 오택과 헤어진 시각은 정확히 하오 1시 30분. 이때는 비도 그쳐 있었다.

박재혁이 중국고서적 상인을 가장하여 부산경찰서로 간 것은 1시간 뒤였다.

손에는 중국고서적 밑에 폭탄을 넣은 궤짝을 들고 있었다.

그는 마치 공무가 있는 것처럼 가장하여 서장실로 곧장 들어갔다. 

전날 용두산에서 서장실을 눈여겨 봐 두었기 때문이었다. (주석 3)

주석
1> 김삼근, <오택유고>, 119~121쪽.
2> <외롭게 살다 간 항일투사 소정 최천택>, <어둠을 밝힌 사람들>, 172쪽, 부산일보사.
3> 김삼근, 앞의 책, 122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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