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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에서 진행한 4·3 평화기행(11월 3~4일)에 다녀왔다. 함께 한 회원들 중 4·3을 잘 알고 있는 회원부터, 이번 기행을 준비하며 4·3이란 말을 처음 들었다는 회원까지 배경지식에 대한 출발선은 각기 달랐다.

그러나 1박 2일 평화기행을 마치고 나니 제주를 좀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지금까지 껍데기 제주만 알고 다녔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현장에서 4·3희생자 가족의 증언을 들으며 그 당시 역사가 한순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귀한 시간이었다.
 
마음 시리도록 아름다운 제주의 가을길을 걸었다
 마음 시리도록 아름다운 제주의 가을길을 걸었다
ⓒ 제주다크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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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혹한 4·3의 역사와 함께 펼쳐진 제주의 들과 바람과 바다는 너무나 아름답고, 맑고 푸르러 그 푸르름에 눈이 베이고 가슴이 시렸다.

어째서 그런 학살이 무참하게 벌어질 수 있었는지... 그리고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4·3을 알지도 못하고 진상규명과 정명을 가지지 못했는지... 생각할수록 가슴이 답답하고 먹먹한 일이었다.  

일제 강점기가 끝나고 자주통일 민주국가를 세우려는 민중의 염원은 인민위원회 구성으로 드러났다. 특히 주민들의 신임이 매우 두터웠던 제주 인민위원회는 미군정의 입장에서는 지배하기 어려운 골치 아픈 곳이었을 것이다. 미군정의 입장인 신탁통치에 반대하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선거를 보이콧하며 미군정이 내세운 반쪽짜리 이승만 정부를 인정하지 않은 2개의 선거구가 모두 제주에 있었다니. 이 얼마나 대단한 곳이었던가!

온전한 민족해방과 자주 독립 국가를 염원하며 친일파 청산으로 민족정기가 바로 선 국가를 건설하려는 사람들에게, 미군정과 이승만은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였고, 그들을 학살했다.
 
4·3평화공원 위령제단에서. 3만여 명이 넘는 희생자들을 기리며
 4·3평화공원 위령제단에서. 3만여 명이 넘는 희생자들을 기리며
ⓒ 제주다크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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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은 우리 민족의 존엄과 정기를 말살한 사건이기도 했다. 일제 만행보다 더하면 더한 사건을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서 저질렀고, 은폐하고, 왜곡했기에 우리는 알지 못했다. 죽음과 연좌제의 위협에 시달렸던 피해자들은 6.25 발발 시 너도 나도 국군에 자원해 '빨갱이 가족'이란 이름을 벗고자 몸부림을 쳤다고 한다.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우리에게 빨갱이는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고 뼛속 깊이 스미며 각인되어 지금도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나라의 사상의 자유와 인간존엄은 4·3때부터 살해당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빨갱이 학살로 시작한 건국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다름을 인정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고, 각 개인의 존엄과 인권이 인정되지 않는 사회가 된 것은 아닐까.

이제라도 4·3을 바로 잡아야 하는 이유는 피해자들의 인권을 위한 것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 전반에 깔려있는 레드콤플렉스로 인한 전 국민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인권이 유린되면서 생긴 구석구석에 비틀린 삶과 문화를 바로 잡게 되는 매우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섯알오름 예비검속 학살터에서
 섯알오름 예비검속 학살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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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의 역사 중에 3·1절 기념대회에서의 발포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제주 전 도민이 장사도 하지 않고 직장도, 학교도 가지 않는 총파업을 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가슴이 뜨겁게 벅차올랐다. 그 시대에 그런 막강한 민중의 힘을 보여주었다니 대단하고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런 자부심 있는 역사는 배우지 못했는지. 어쩌자고 조선 민족은 안 된다는 자조 섞인 소리만 듣고 산 건지.

이것은 자존과 존엄의 문제다. 저 시대에도 펄펄하게 살아있던 인간존엄이, 민주주의 시대라는 지금 약해진 것은 어쩌면 비틀린 역사를 바로잡지 못한 것에서 오는 비루함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제주도민 학살을 거부한 여수 순천 14연대 군인들과 제주 경찰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당당히 사유하고 불의를 거부하는 인간의 모습에 자부심과 존경심이 들었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과 '무사유의 죄'가 떠오르기도 했다. 나는 저런 시대에 어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나치 전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처럼 상관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라며 자신은 죄가 없다고 변명하는, 무사유하는 평범한 악인이 되어있지는 않았을지, 과연 저 군인과 경찰들처럼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을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돌아보게 되는 시간이었다.

4·3은 시간이 지나 예비검속으로, 보도연맹 학살사건으로, 5·18 광주 민중항쟁으로 이어졌다. 한번 뒤틀린 역사는 비틀린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국민들의 피를 요구했다. 4·3 평화기행은 왜곡된 역사를 지금이라도 바로 잡아야 영혼이 잠식되어 비틀린 민중의 삶이 바로 선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대정 알뜨르비행장 터 앞에서
 대정 알뜨르비행장 터 앞에서
ⓒ 제주다크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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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죽음, 고문과 협박 속에서도 항쟁을 계속하고, 이를 기록하고 알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이런 참담한 역사 속에서도 우리나라 사람이란 것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4·3을 소재로 소설을 썼다는 이유로 정보기관에 연행되어 고초를 겪었다는 현기영 작가의 말을 빌려 끝맺음하려 한다.

"이길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서 항복하고 굴복해야 하나? 이길 수 없는 싸움도 싸우는 게 인간이란 거지."
  
제주4·3 평화공원 기념관
 제주4·3 평화공원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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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후유장애인 고 진아영 할머니 삶터가 있는 월령리 해안가에서
 4·3 후유장애인 고 진아영 할머니 삶터가 있는 월령리 해안가에서
ⓒ 제주다크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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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글쓴이 임미라님은 사천여성회 회원입니다.


태그:#제주43, #70주년, #평화기행, #유적지, #제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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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고 싶은 길 - 제주다크투어’는 제주에 위치한 비영리 단체입니다. 제주다크투어는 여행 속에서 제주 4.3을 알리고 기억을 공유합니다. 제주를 찾는 국내외 사람들과 함께 제주 곳곳의 4.3 유적지를 방문하고 기록하며 알려나가는 작업을 합니다. 국경을 넘어 아시아 과거사 피해자들과도 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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