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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후반 나이에 2018년 4월부터 7월까지 필리핀 바기오에서 어학 연수한 경험을 나누고자 합니다. - 기자말

수업 중에 쪽지를 전달받았다. 수석 교사와 상담이 예정됐다는 내용이었다. 레벨 테스트 결과와 연수원 생활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눌 텐데, 잘못을 저질러 교무실에 불려갔던 학창시절처럼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 시대에 교무실, 상담실은 부정적 느낌이 강한 곳이었다. 50대 후반 나이에도 여전히 불안한 걸 보면 지금도 학창 시절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최악의 성적

상담실에서 수석 교사 야나(Yana)가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님은 밝은 미소를 띠며 친절하게 말을 건넸지만 나는 점점 왜소해졌다. 어학원 생활, 숙소, 식사, 동료와의 관계 등의 물음에 어색한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상담이 끝나기만 기다렸다.

"첫 시험은 어땠나요?"
 

드디어 나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나의 성적은 연수원 학생 중 최악의 수준. 시험 결과는 총 5단계로 평가된다. Excellent2, Excellent1, Basic2, Basic1, Foundational 순이다.

나는 말하기와 문법에서 Basic2, 읽기와 쓰기에서 Basic1 그리고 듣기에서 Foundational 등급을 받았다. 결과를 보니 한심하다는 생각뿐. 실망하지 말고 열심히 하라는 수석교사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았다. 영어 실력이 부족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점수로 확인되니 참담한 기분이었다.
 
첫 레벨 테스트 결과
▲ 성적표 첫 레벨 테스트 결과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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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시간. 교사에게 성적표를 보여주니 "성실하게 공부하면 3개월 뒤 놀라운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조언이 돌아왔다.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면 마지막에는 좋은 결과가 나올 거야!" 이 말은 내가 직장에서  자주 하던 말이었는데. 그 말이 부메랑이 되어 내게 돌아올 줄이야.
 
수석교사와 상담하는 모습
▲ 상담 수석교사와 상담하는 모습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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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주말

금요일이 되자 아침부터 어학원 분위기가 들뜨기 시작했다. 금요일 저녁부터 외출과 외박이 허용돼서다. 강의실도 식당도 종일 왁자지껄한 분위기였다. 젊은 친구들은 무리 짓기에 여념이 없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시내로 진출해 음주가무로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를 해소하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젊음이라는 무기가 있어 국적이 달라도, 영어가 서툴러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후 강의가 끝나자마자 정문에 많은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수위실에 이름을 기재하고 기숙사 열쇠를 맡기면 외출할 수 있다.
 
정문에서 외출을 위해 인적사항 기재 모습
▲ 외출 정문에서 외출을 위해 인적사항 기재 모습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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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함께 외출할 동료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기에 첫 금요일 저녁을 연수원 도서관에서 보냈다. 책을 펼쳐도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불타는 금요일 밤에 갈 곳도, 만날 사람도 없다는 것이 서글펐다.

더구나 그날은 나의 생일이었다. 결혼 이후 생일을 혼자 보내기는 처음이었다. SNS로 식구들에게 축하받았지만 뭔가 빠진 듯한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는 연수생들에게 사연을 밝히지 않고 아이스크림 하나씩 돌리는 것으로 생일을 자축했다.

필리핀 바기오에서 맞는 첫 주말. 눈을 뜨니 켜켜이 쌓여 있는 산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산과 산 사이에 깔린 짙은 안개의 틈을 비집고 아침의 태양이 떠올랐다. 햇살이 퍼지면 세상은 온기가 돌며 깨어난다. 해발 1500미터 바기오에서 맞는 일출은 히말라야를 생각나게 했다. 히말라야에서 밤새 침낭에 웅크리고 누워 추위에 떨면서 맞는 아침은 환희 자체였다.
 
바기오의 아침 모습
▲ 바기오의 아침 바기오의 아침 모습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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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을 여니 싱그러운 명지바람이 온몸을 감쌌다. 바기오에서 처음 맞는 주말 아침은 여유로웠다. 아침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쉴 틈 없이 진행되던 수업도, 매일 제출해야만 했던 과제도 없는, 완전한 휴식이 주어진 것이다. 기숙사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커피를 마시며 베란다에 앉아 있자니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았다. 고요, 침묵, 멈춤, 청명, 투명, 맑은 하늘, 정적 그리고 멍하니 앉아 있는 나까지 완벽한 아침이었다.
 
지프니에서 차비 내는 모습
▲ 차비 지프니에서 차비 내는 모습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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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식사를 하고 쇼핑몰에서 3개월 동안 사용할 물품을 구입하기 위해 외출했다. 어학원이 시내에서 떨어져 있어 '지프니'로 이동했다. 지프니는 대표적인 필리핀 대중교통으로 미군 지프를 개조해 많은 사람이 탈 수 있게 만들었으며 외부를 화려하게 치장했다.

20명 정도가 정원인 지프니는 뒷사람이 차비를 건네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운전사에게 전달되고 거스름돈 역시 같은 방법으로 승객에게 전달된다. 운전석에서 승객이 앉은 자리가 보이지 않는데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요금이 오가는 모습은 경이로웠다.
 
바기오 시내 모습
▲ 바기오 시내 바기오 시내 모습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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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를 가득 채운 차량, 화려한 쇼핑몰, 상춘객으로 가득한 공원 모습까지 일주일 만에 접하는 도심 모습은 모든 것이 새로웠다.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은 세상에 첫발을 뗀 아기처럼 하나씩 배워간다는 의미일 테다. 영어도, 생활도 잘 적응하리라 기대하며 그렇게 첫 주말을 보냈다.

태그:#필리핀, #바기오, #어학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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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자발적 백수가 됨. 남은 인생은 길 위에서 살기로 결심하였지만 실행 여부는 지켜 보아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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