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08 09:28최종 업데이트 18.11.08 09:44
경복궁 서쪽 담을 끼고 영추문을 지나 백악산 가까이 창성동에 가면 넓은 장소에 커다란 건물이 들어서 있는 곳이 있다. 이곳은 현재 청와대 경호동인데 1989년 이전까지는 학교가 들어서 있었다.

당대의 명문여학교 중의 하나였던 진명여자고등학교로 오랜 역사를 자랑하였다. 근대기에 세워진 다른 사립 여학교들이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것에 비해, 이 학교는 한국인에 의하여 설립된 최초의 여학교라는 데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학교를 설립한 사람은 고종의 후궁으로 영친왕의 친모인 '엄귀비(嚴貴妃, 1854-1911)'였다.               


엄귀비의 공식 명칭은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인데, 세상에서는 보통 '엄귀비'로 불린다. 8살 때 궁녀로 궁에 들어와 명성황후 민씨의 시위 상궁으로 있다가 고종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게 된다. 이를 안 명성황후는 엄상궁을 궁 밖으로 쫓아낸다. 그러나 명성황후가 을미사변으로 세상을 떠나자, 고종은 다시 엄상궁을 궁으로 불러들인다.

엄상궁이 42세의 늦은 나이에 영친왕을 낳자 정식으로 후궁의 첩지를 받는다. 이후 귀인, 순빈, 순비에 순차적으로 봉해진다. 고종은 엄씨를 황후로 세우고 싶어 했으나 큰 반대에 부딪혔다. 엄씨의 신분이 원래 평민이었고, 후궁은 왕비가 될 수 없다는 궁중의 법도 때문이었다. 그래서 결국 황후 바로 아래이자 후궁 중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황귀비'에 봉한다.

고종이 새로 황후를 들이지 않자 엄귀비는 황후나 다름없었다. 엄귀비는 아관파천으로 고종, 순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갈 때에도 함께 한다. 그러나 경술국치 후 귀비로 바로 격하되고, 이듬해 1911년 덕수궁 함녕전에서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난다. 엄귀비는 매우 영민한 사람이었으며, 사람을 잘 다루었다고 한다. 교육 사업에 관심이 많아 진명여학교 외에 숙명여학교, 양정의숙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화실에서의 나혜석. '신여성 도착하다' 전 도록에서 재촬영 ⓒ 황정수

 
1906년에 설립된 진명여학교는 1912년에 진명여자보통학교와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로 분리되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다. 이때 쯤 진명여학교를 다닌 가장 유명한 인물은 단연 정월(晶月) 나혜석(羅惠錫, 1896-1948)이다.

나혜석은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나 1910년 수원 삼일여학교를 졸업하고, 진명여학교에 편입한다. 1913년 졸업할 때에는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최우등으로 졸업하여 신문에 보도되기까지 하였다.

여고보를 졸업한 나혜석은 일본에 먼저 유학한 오빠 나경석의 권유로 도쿄에 있는 '여자미술전문학교' 서양화부에 입학한다. '여자미술전문학교'는 남자들이 다니는 도쿄미술학교에 대응해서 만들어진 곳으로 일본 최초의 여자미술학교였다.

나혜석이 그림을 전공하게 된 것은 어려서부터 그림 재주가 있는 것을 눈여겨 본 나경석이 미술학교 입학을 권유하였기 때문이다. 나혜석은 학교에서 그림을 가장 잘 그렸으며, 꽃이나 벌레 등을 그려 선생에게 찾아가면 늘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그동안 한국미술사에서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라고 잘못 불러온 '여자미술전문학교'는 보통 '여미전(女美專)'이라 약칭해 불렸는데, 이 학교는 나혜석 이후 백남순, 정온녀, 박래현, 천경자 등 뛰어난 후배들이 들어온다. 이들은 훗날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가 된다. 특히 '여미전'에는 도쿄미술학교의 뛰어난 화가들이 교수로 나와 수준 높은 미술 수업을 들을 수가 있었다.

1918년 여미전을 졸업한 나혜석은 귀국하여 숙명여학교 미술교사로 잠시 재직하다 건강 문제로 사직한다. 1921년에는 경성일보사 '내청각(來靑閣)'에서 개인 전시회를 여는데, 한국 여성으로서는 처음 하는 미술 개인전이었다.

당시 이 전시는 천재적인 여류화가의 전시라 하여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나혜석은 자신의 뛰어난 역량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반인에게 미술을 보급하기 위한 것이라는 공익적인 포부를 밝혀 여성 활동가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개인전이 끝나고 남편 김우영(金雨英, 1886-1958)이 만주국 안동의 부영사가 되자,  안동에서 살며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며 지낸다. 그렇게 지내던 중에 화가로서 한계를 느끼고 몹시 힘들어 한다. 마침 1927년에 남편 김우영이 유럽과 미국을 시찰하러 가게 되자 함께 여행길에 올라 한국 여성 최초로 구미 여행에 오르는 인물이 된다. 그는 구미 여행길에서 많은 견문을 넓혀 자신의 미술 세계에 혁신을 가져올 정도로 많은 발전을 한다. 

나혜석은 작품 제작에 욕심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작품 발표에도 적극적이었다. 일제의 문화정치 일환으로 조선미술전람회가 창설되자 1회부터 참여하여 입선을 한다.

전람회가 열리자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이 구경을 왔는데, 마침 나혜석의 작품 앞에 이르렀다. 주변에서 나혜석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려주자 총독은 "나군은 활동가라고 들었는데, 그림도 그리던가?" 하며 놀라워했다고 한다. 그만큼 나혜석은 이미 여성 활동가로 유명하였던 신여성이었다.
 

나혜석 '봉황문의 남문' 1923년 ⓒ 황정수


또한 2회 전람회에서는 <봉황성(鳳凰城)의 남문(南門)>이라는 작품으로 4등상을 받아 세상을 놀라게 한다. 이 또한 한국 여성으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혜석의 미술계 발걸음 하나하나는 모두 여성으로서는 최초의 일이 되었다.

이후에도 1926년에는 <천후궁(天后宮)>으로 특선을 하고, 1931년 10회에서는 출품작 두 점이 모두 입선되는 등 1933년까지 꾸준히 출품하였다. 이후 개인적인 사정으로 출품이 사라지자 많은 전문가들이 그의 부재를 아쉬워했다.

나혜석은 1933년 '여자미술학사'라는 미술학원을 차려 후진을 양성하고자 한다. 이미 1922년 만주 안동에서 '여자야학'을 운영한 적이 있었는데, 경성에 돌아와 본격적으로 화숙을 경영하고자 한 것이다.

'여자미술학사'라는 이름을 지은 것은 자신이 도쿄에서 유학한 모교 '여자미술전문학교'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나 이 화숙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불륜과 이혼 등 사회적 문제에 얽혀 삶이 흐트러지자 곧 문을 닫고 만다.

김우영과의 이혼 후 나혜석의 삶은 급속도로 나빠지고 화가로서의 활동도 위축된다. 가족이나 친지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오빠의 경제적 지원도 끊긴다. 계속 이어지는 급진적인 사상의 글과 개인사적 소송 등이 이어지며 사회로부터 비난과 조소를 듣고, 아이들까지 보지 못하는 고통으로 나혜석의 심신은 병들어갔다.

1935년에는 수덕사에서 불공을 드리며 자신을 찾아온 학생들에게 유화를 가르치기도 하나 정상적인 화가로서의 삶은 아니었다. 1940년에는 창씨개명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조선총독부의 감시를 받게 되어 방랑생활을 한다. 점차 몸은 피폐해지고 1944년에는 인왕산 자락 모교 근처에 있는 청운양로원에 들어가는 등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다.

이후에도 여러 곳을 떠돌던 나혜석은 1948년 12월 원효로에 있는 시립 자제원(慈濟院) 병동에서 무연고자로 세상을 떠난다. 죽음을 맞이한 4개월 후인 1949년 3월 14일이 되서야 무연고자 시신 공고가 나며 신원이 밝혀져 죽음이 알려지게 된다. 한 시대를 풍미한 뛰어난 화가의 참으로 허망한 죽음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서양화가

문화사에서 보통 '최초'라는 불리는 것들은 대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하고 때론 위대하다고 불린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까지 늘 훌륭한 것은 아니다. 한국 근대 서양화단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두드러져 초기의 화가들에 대한 평가도 이와 유사하다.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라 불리는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 1886-1965)은 1909년 도쿄미술학교 양화과로 유학하여 유화를 공부한다. 이어 동우(東愚) 김관호(金觀鎬, 1890-1959)가 1911년, 유방(維邦) 김찬영(金瓚永, 1889-1960)이 1912년에 계속해서 같은 학교에 입학한다.

이들 세 사람은 도쿄미술학교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여 한국의 미래 서양화단을 짊어질 것이라 기대하던 재원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귀국하여 이상과 현실의 괴리라는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서양화단을 떠나고 만다.

고희동은 처음에 시작했던 동양화로 회귀하고, 김관호는 서예에 전념을 하였으며, 김찬영은 문학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다 끝내 골동품 수집에 열을 올린다. 이들은 서양화를 한국에 유입한 초기의 공적은 크나 평생 서양화가로서 살지 못한 결손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과 비교할 때 나혜석의 삶은 독보적이다. 나혜석은 비슷한 시기에 도쿄의 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온 이후 한 평생 거의 서양화를 손에서 놓지 않고 산다. 학교 교사를 하면서도 그림을 그렸고, 남편을 따라 구미를 돌아다닐 때에도 그림을 그렸고, 세상을 버리고 산 중에 있을 때에도 그림을 그렸다. 그는 천생 화가였다.

당시는 여성이 사회적 활동을 하기 어려운 시절이었으나, 나혜석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세상과 맞서며 여성으로서의 주체적 의지를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성격이 더욱 세상에서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지만, 그때마다 그를 지켜준 것은 그림이었다.

그는 여러 역경이 있을 때에도 항상 붓을 놓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나혜석은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어떤 남성들보다 더 그림을 사랑하고 한평생 그림을 그린 화가였다. 그러한 까닭에 필자는 나혜석을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서양화가'라고 불러도 좋다고 생각한다.
     

나혜석 '선죽교' 1933년

현재 전하는 나혜석의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평생 많은 그림을 그렸으나 1933년경에 화실에 불이 나 그림 대부분이 타버려 전하는 것이 적게 된 것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나마 전하는 작품도 그가 조선미술전람회 등에 출품하였던 작품들의 도판과 비교해 보면 현저하게 수준이 떨어지는 것들이 많다. 그런 상황 속에서 그나마 대표작을 꼽으라면 <화령전 작약> 등 우수한 작품도 몇 있지만, 필자는 1933년에 그린 <선죽교>를 꼽는다.

<선죽교>는 개성에 있는 유서 깊은 선죽교를 그린 것이다. 선죽교는 고려 유신 정몽주가 비운의 죽음을 맞은 고려 왕조에 대한 한이 서린 곳이다. 4호 크기의 송판에 유채로 그린 것이다. 필치가 강건하고 구성이 야무지다. 여리고 조밀한 흔적이란 조금도 없다. 붉은 색조의 갈색과 흙빛이 일제가 추구한 '향토색'의 전형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그보다는 고려의 유지를 이으려는 정몽주의 핏빛어린 기상이 어려 무게감을 더하는 듯하다.

급진적인 여성 운동가 나혜석

나혜석은 도쿄에서 미술을 주로 배웠지만, 그 외에 문학 활동에서도 재능을 보이고 당시 새로운 사조로 관심을 끈 여성운동에도 많은 관심을 갖는다.

그는 자유연애에 깊이 빠졌는데, 유학시절 '최소월(崔素月)'이라 불리던 감성적인 문학청년 최승구(崔承九, 1892-1917)와의 사랑은 당시 유학생들 사이에 커다란 화제였다. 그러나 최승구는 1917년 26살의 이른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난다.
 

나혜석과 김우영의 결혼식 '신여성 도착하다' 전 도록에서 재촬영. ⓒ 황정수

 
상심한 나혜석은 삶의 희망을 잃는다. 그러던 차에 마침 시국 사건으로 자신의 변호를 맡아 온 변호사 김우영의 집요한 구애를 받는다. 나혜석은 다시는 연애를 하지 않을 결심을 하였으나, 김우영의 진지함에 결국 굴복하여 결혼을 하게 된다. 이때 나혜석은 결혼 허락의 조건으로 세 가지 조건을 붙여 세간의 화제가 된다. 김우영에게는 전처와의 사이에 아이가 있었다.
 
지금 사랑하는 것처럼 평생 자신을 사랑할 것.
시부모 봉양과 아이들 돌보기를 요구하지 말 것.
자신의 화가 생활을 방해하지 말 것.

특히 두 번째로 요구한 '시부모 봉양과 아이들 돌보기를 요구하지 말라는 것'은 당시 시대상으로 보았을 때 아주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그럼에도 김우영이 받아들여 결혼에 이른다. 그러나 나혜석은 이에 머물지 않고 김우영과 신혼여행을 가는 대신에 김우영의 돈으로 최승구의 무덤에 비석을 세워 세간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나혜석의 자유로운 사고는 결국 유럽 여행 중 파리에 놀러갔다가 명사 고우(古友) 최린(崔麟, 1878-1958)을 만나게 되며 문제가 발생한다. 당시 최린은 '한국 최고의 신사'라 불리는 이였다.

인물도 좋고 사군자나 서예에 능한 예술가적 기질이 강한 감성적인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많은 나이 차이에도 만나자마자 불같은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곧 최린이 이성적으로 돌아와 다시 두 사람의 사랑은 급속히 식어버린다.

이를 눈치 챈 언론의 물음에 나혜석은 최린과의 연애를 인정하지만, 최린은 자신은 그런 적이 없다며 부정해 버린다. 그 당시 남편 김우영은 외유 중이었다. 그는 돌아와 이미 소문난 나혜석의 불륜에 화가 나 간통죄를 빌미로 하여 이혼을 요구한다.

결국 두 사람은 이혼한다. 이에 나혜석은 '이혼고백서'를 써 최린의 태도를 비난하고 거액의 위자료를 청구한다. 경제적 여유가 많았던 최린이 이를 수락하여 배상하자 이 스캔들은 막을 내린다. 그러나 최린과의 한때 사랑으로 나혜석은 많은 것을 잃고 결국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나혜석의 서촌 귀향과 엄귀비의 묘당이 있는 칠궁

나혜석은 화가와 여성 운동가로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다 결국 피폐해진 몸을 이끌고 자신이 청춘 시절을 보낸 진명여학교가 있는 서촌의 요양원에 왔다가 얼마 후 원효로의 자제원에서 죽음을 맞는다. 그런데 나혜석과 비슷하게 진명여학교를 세운 순헌황귀비 엄씨 또한 사후에 진명여학교가 있는 이곳으로 돌아오는 비슷한 길을 걷는다.
 

칠궁 중 엄귀비를 모신 덕안궁. ⓒ 황정수

 
궁정동에서 창의문 길을 넘어가다보면 청와대 왼쪽에 조선시대 것으로 보이는 작은 궁궐 같은 곳이 있다. 이곳을 '칠궁(七宮)'이라 부른다. 칠궁은 조선시대 역대 왕이나 왕으로 추존된 이들을 낳은 생모이면서 왕비가 아니었던 후궁 일곱 사람의 신위를 모신 묘당이다. 원래 조선시대에는 이곳을 '육상궁(毓祥宮)'이라 불렀다. 육상궁은 영조가 자신의 친모이자 숙종의 후궁이었던 숙빈 최씨를 위해 세운 사당이었다.

그런데 1908에 저경궁(儲慶宮), 대빈궁(大嬪宮), 연우궁(延祐宮), 선희궁(宣禧宮), 경우궁(景祐宮)이 육상궁 경내에 합사됨으로써 육궁(六宮)이 되었다가, 1929년 덕안궁(德安宮)이 다시 이곳으로 옮겨와 '칠궁'이 되었다. 이 중에 마지막으로 온 덕안궁이 고종의 후궁으로 영친왕의 생모가 되는 엄귀비의 신주를 모신 묘당이다.

1906년에 진명여학교를 세우고, 1911년에 세상을 떠난 엄귀비는 1929년에 자신의 신주나마 칠궁에 합사되어 자신이 세운 학교가 바라보이는 곳으로 돌아왔다. 행여 나혜석이 말년에 병든 몸을 이끌고 청운동으로 찾아온 것도 같은 이유일까?

특별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지만, 너무도 특별하게 한평생을 파란만장하게 산 인물들이라 혹시라도 어떤 인연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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