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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에 <스트레이트> 봤어요?"
"아뇨, 왜요?"
"우리 책 나왔어요. 불온서적으로."


지난 월요일 아침, 사무실에 출근해 아침회의를 준비하고 있는데 부장님이 슬그머니 다가와 소식을 전해줍니다. 궁금해서 찾아봤더니 MBC 탐사보도 프로그램 <스트레이트>에 책 <벤처야설>이 불온서적으로 거론됐다고 합니다.

스타트업 창업자들 애환 다룬 책이 불온서적?
 
MBC <스트레이트>에 불온서적으로 언급된 <벤처야설>
 MBC <스트레이트>에 불온서적으로 언급된 <벤처야설>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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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연은 이렇습니다.

지난 4일  이 방송은 박근혜 정부 청와대 캐비닛에서 광주에 있는 모 작은도서관에 대한 사찰 문건이 발견됐다고 보도했습니다. 이 문건은 "좌파성향단체가 작은도서관에 불온서적을 비치해 이념 전파를 획책하고 회합 장소로 이용한다"면서 "좌파 활동공간으로 변질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결론 내립니다. 그러면서 언급된 책이 바로  저희 책 <벤처야설>과 <체 게바라 평전> 등입니다. 정부에 비판적인 서적을 소장하고 있다면서요.

그 장면을 보는 내내 도대체 무슨 일인지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습니다. 우선 박근혜 정부에서 왜 이런 책을 불온시했는지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더군요.

2013년에 출간된 <벤처야설>은 스타트업 창업자들의 애환을 짚어주면서 동시에 스타트업 업계의 뒷이야기를 신랄하고 재밌게 풀어내 '스타트업계의 나꼼수'라 불리던 동명의 팟캐스트를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이 사실을 보도한 <스트레이트>조차도 "벤처 창업의 성공 비법을 다룬 이 흔한 실용서를 국정원은 불온서적이라고 했다"라며 이해할 수 없다는 식으로 보도했습니다. 혹시 '창업 분야의 나꼼수'라는 카피에서 '나꼼수'라는 단어만 보고 무작정 불온서적 취급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얼핏 스쳐 지나갔습니다.

이 책을 기획했던 부장님께 여쭤보니 책이 출간된 후, 관계 부처 공무원들이 이 책을 싫어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합니다. 책 속에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이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업계의 현실에 대해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있는 책이다보니, 정부 제도의 비합리성을 지적한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부분들이 관계 부처 입장에서는 뼈 아프게 들렸을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예산 집행의 비합리성을 들어 공무원들의 무책임함을 꼬집는 내용도 있으니까요.

그렇다고는 하나 단순히 정부 정책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우리나라 최고의 정보기관이라고 하는 국정원에서 이 책을 불온서적으로 분류했다는 게 납득이 잘 가지 않습니다. 동시에 박근혜 정부의 사찰이 얼마나 광범위하고 무차별적이었는지 새삼 소름이 돋기도 합니다.

남의 일로만 생각해왔던 '출판계 블랙리스트'
 
박근혜 정부에서 불온서적으로 취급했던 <벤처야설> 표지. 2013년에 출간된 이 책은 벤처창업자들을 위한 실용서로, 불온서적과는 거리가 멀다.
 박근혜 정부에서 불온서적으로 취급했던 <벤처야설> 표지. 2013년에 출간된 이 책은 벤처창업자들을 위한 실용서로, 불온서적과는 거리가 멀다.
ⓒ e비즈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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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일로 새삼 '출판계 블랙리스트' 문제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봤습니다. 사실 제가 근무하는 출판사는 IT 비즈니스 서적을 주로 펴내는 경제·경영 출판사로서 정치적 시각의 책을 내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하여 출판계에서 블랙리스트 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을 때도, 그저 남의 일로만 생각하고 강 건너 불 구경하듯 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막상 제가 일하는 회사에서 낸 책이 이런 취급을 받았다고 생각하니 억울함과 황당함을 느낍니다.

'마음의 양식'을 만든다는 신념과 자부심으로 지금까지 출판업에 종사해왔던 직원들 입장에서는 이번 사태를 바라보며 착잡한 심경을 느낍니다. 일부 정부 정책에 비판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멀쩡한 실용서가 불온서적이 되고, 그 책을 소장했다는 이유만으로 도서관을 '좌파 아지트'로 규정해버린 박근혜 정부의 전근대적 발상에 내가 지금까지 어떤 세상에서 살아왔던 것인가 씁쓸합니다.

올해는 정부에서 지정한 '책의 해'라고 합니다. 대통령이 먼저 나서서 독서하는 모습을 보여줄 정도로 정부에서는 '책 읽는 사회'를 권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과 얼마전까지도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니 맥도 빠지고 겁도 납니다.

내가 만드는 책을 정부에서 사찰하고, 마음에 안 든다고 뒷조사까지 한다면 어느 누가 열심히 책을 만들려고 할까요? 하여 저는 문재인 정부에 호소합니다. 출판계 블랙리스트 문제를 끝까지 발본색원하여 주동자들 뿐만 아니라 부역한 이들까지도 엄히 처벌해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근본적으로 출판의 자유가 보장되는 그런 사회를 만들어주시길 간곡히 당부드립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김경준 기자는 e비즈북스·필로소픽 출판사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벤처야설> 기획자인 e비즈북스 이은일 님에 대한 취재를 바탕으로 쓰여졌습니다.


벤처야설 : 창업편

벤처야설팀 지음, e비즈북스(2013)


태그:#E비즈북스, #출판사, #블랙리스트, #벤처야설, #불온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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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사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한국근대사 전공) / 취미로 전통활쏘기를 수련하고 있습니다.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 기사 제보는 heig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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