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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콜라스 루츠(1631, 렘브란트 반 레인, 프릭 컬렉션,뉴욕)
ⓒ 프릭 컬렉션	관련사진보기

 
그림 속 그가 내게 쪽지를 건네며 말을 건네는 듯 연극적이다. 입고 있는 모피코트의 털 하나하나 세심하게 표현되었고 심지어 정전기가 일어 곤두서 있는 털의 표현도 기가 막히다. 옆으로 누워있는 털, 모자를 이루고 있는 살짝 더 두꺼운 털.

남자의 콧수염까지 털의 표현기법도 다채롭다. 표백한 듯 새하얀, 탄력 있고 부드럽게 목을 감싸는 레이스는 또 어떤가. 조명은 얼굴에 집중되고 배경은 어두워 성스러운 기운마저 감도는 이 그림은 '나는 화가다'라는 말의 결정판이다.

한 눈에도 부티가 철철 넘치는 이 남자는 '암스테르담 상인 니콜라스 루츠'다. 그는 러시아와 모피교역을 하는 상인이다. 그의 직업과 부를 상징하는 의상과 무역서신, 신중한 표정과 위엄 있는 자세의 이 그림은 '위대한 화가 렘브란트'의 작품이다.

그것도 25살에 처음으로 주문받아 그린 초상화의 수준이 이러하다. 렘브란트 이름 앞에 '위대한'이란 말을 붙인 이유는 이 뿐만이 아니다. 렘브란트는 초상화에 생명을 불어 넣었다. 마치 그가 내 눈앞에 있는 것처럼.

렘브란트 하르멘스존 반 레인(1606-1669)은 네덜란드 레이덴에서 제분업자 아버지와 귀족 출신 어머니 사이 아홉 형제 중 여덟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유한 집안에서 그는 어릴 때는 라틴어 학교를 다녔고 14살이 되었을 땐 레이덴 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미술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야코프 반 스와넨부르흐의 도제로 들어간다. 야코프는 이탈리아를 유학하고 온 화가였으며 렘브란트는 3년 동안 이곳에서 공부한다.

이후 역사화로 유명한 라스트만의 조수로 6개월을 보낸다. 17세기에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지 않은 화가가 어디 있겠는가. 라스트만 역시 로마 유학파로 당시 이탈리아를 휩쓸던 카라바조의 그림을 봤다. 그러니 라스트만 역시 그의 영향을 받는다. 렘브란트는 이탈리아 유학을 하지 않고도 두 스승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이탈리아 미술의 흐름을 파악하고 있었다.

1625년 19살의 렘브란트는 18살의 얀 리벤스와 레이덴에 공동화실을 차린다. 그림신동으로 유명했던 리벤스는 열 살 무렵부터 라스트만의 화실에서 수업을 받았다. 두 청년은 같은 모델을 그리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의 그림을 모작하며 예술적 영감을 주고받는다.

이 기간에 렘브란트는 많은 자화상을 그리며 두상 연습과 얼굴 표정에 따른 감정 변화에 대한 연구를 거듭한다. 그리고 키아로스쿠로(빛과 어둠, 빛과 그림자를 통해 양감을 나타내는 명암법)를 이용한 그림들을 본격적으로 공부한다.

네덜란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문주의자이자, 외교관이며, 헨리 왕자의 비서인 콘스탄틴 하위헌스가 그들의 화실을 방문했다. 그는 그들의 그림을 보고 단박에 그들이 범상치 않음을 간파했다. 그는 이 두 젊은 화가를 네덜란드를 짊어질 걸출한 화가라 평하며 이렇게 말했다.

"방앗간 집 아들 렘브란트와 얀 리벤스야말로 네덜란드가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이탈리아 회화의 자랑인 위대한 역사화의 전통은 절대 따라잡을 수 없으리라는 시각을 지울 수 있다."

이탈리아 거장들과 맞설 화가가 되리라는 걸 일찍이 알아봤으니 그의 안목도 범상치 않다. 이후 그는 이들을 후원하며 여러 사람들로부터 그림 주문을 확보해 주었다. 렘브란트 운명의 전환점이 만들어진 거다.

1931년 드디어 렘브란트는 처음으로 직접 초상화 의뢰를 받게 되는데 그 그림이 바로 '암스테르담 상인 니콜라스 루츠'다. 렘브란트는 이 그림으로 초상화 부문 스타 화가가 된다. 다음해에는 그의 역작인 단체 초상화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초상화'가 그려졌다. 당시 네덜란드는 성공한 부르주아, 성직자, 공무원, 귀부인 할 것 없이 초상화 열풍이던 시기다.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으로 이사한 후 화상인 반 오일렌뷔르흐의 집에 머물게 되는데 그의 사촌인 사스키아 반 오일렌뷔르흐를 만나 1634년에 결혼한다. 화가로서 점점 명성이 높아갔다.

게다가 귀족 출신의 부유한 사스키아와 결혼했으니 그의 지위는 한층 상승했고 부는 쌓여갔다. 둘은 서로에게 흠뻑 빠졌다. 그는 그녀를 모델로 많은 그림을 그렸는데 특히 꽃의 여신 플로라로 그녀를 표현하기도 했다. 그의 따뜻한 시선과 그녀의 표정에서 둘의 충만한 사랑이 느껴진다.

당시 암스테르담은 온갖 진귀한 물건들이 들어오는 무역 거래가 활발한 교역의 도시였는데 그는 이 엔틱한 물건들에 마음을 뺏겨 사 모으기 시작한다. 몰려드는 초상화 제작과 도제교육을 받고자 모여드는 학생들로 엄청난 돈을 벌지만 씀씀이가 그 속도를 앞섰다. 사스키아를 모델로 그린 많은 그림 속 그녀는 그가 사들인 진귀한 의상과 소품으로 잔뜩 치장하고 있다.

행복은 렘브란트를 질투했다. 행복의 정점에서 있는 그에게 '예술가에게 행복은 독'이라는 듯 하나씩 앗아간다. 렘브란트와 사스키아는 자녀 셋을 낳았으나 모두 얼마 살지 못하고 사망해 버린다.

마침내 네 번째 아이를 낳은 사스키아는 아이를 또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손에서 내려놓지 않고 애지중지 돌봤으나 잦은 출산과 아이를 잃은 스트레스가 겹쳐 아이를 낳은 지 9개월 만에 사망하고 만다. 1642년, 결혼 8년만인 그녀 나이 서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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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을 든 사스키아의 초상( 렘브란트,1641, 독일 드레스덴 미술관)
ⓒ 드레스덴 미술관	관련사진보기

이 그림은 '꽃을 든 사스키아의 초상'이다. 생전에 그려진 그녀의 마지막 초상화다. 첫 번째 초상화에서 보여지던 생기 넘치고 장난기 가득한 모습은 사라졌다. 화려하게 치장했던 모습도 사라졌다. 지친 표정에 희미한 미소를 띤 죽어가는 그녀는 가슴에 손을 얹고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며 붉은 꽃 한 송이를 내민다.

꽃을 받고 같이 영원한 사랑을 맹세할 사람은 바로 렘브란트 그 자신이다. 그도 그녀도 이별을 예감한 듯하다. 죽음 너머의 약속. 꽃을 들고 서 있는 그녀와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화폭에 담는 그의 모습이 상상이 되어 울컥한다. 렘브란트의 초상화는 그림 이상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기 이런 사람이 있다'라는.

사스키아를 끔찍이 사랑했던 렘브란트의 슬픔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9개월 된 아들 티투스를 키우기 위해 유모가 들어왔다. 그는 그녀와 잠시 연인이 된다. 사랑의 크기가 클수록 사별 후 허전함은 배가 되는 법. 누구에게라도 맘을 붙이고 싶었으리라. 이런 마음을 여성 편력이라 부르고 지탄한다면 인간은 도대체 얼마나 강해야 하는 존재인가.

외로움이 넘쳐 숨쉬기도 힘든, 그래서 사랑이 절박한 사람 앞에 도덕이 무슨 소용. 유모와 그런 관계라는 게 알려지며 청교도적인 시민들로부터 손가락질 받고 주문자들은 등을 돌리기 시작한다. 불행히 그녀와의 관계도 끝내 진흙탕 소송으로 끝이 난다. 이 와중에 그는 다시금 운명의 상대를 만나게 되는데 그녀는 그의 집에 가정부로 들어 온 헨드리케 스토펠스다.

렘브란트와 헨드리케 사이에 딸 코르넬리아가 태어났다. 둘은 사실상 부부 관계였지만 사스키아의 유언 때문에 둘은 끝내 결혼하지 못한다. 사스키아는 막대한 유산을 아들과 그에게 남겼는데 조건이 '결혼하지 말 것'이었다.

사스키아와 결혼 무렵부터 과소비로 인해 부채가 늘어났고 이후에 온갖 일들로 인해 주문이 줄어 수입도 크게 줄었다. 1658년 투자마저 실패로 돌아가 집과 모든 물품을 경매당하고 알거지 신세가 된다. 빚을 갚기 위해 죽은 부인(사스키아)의 묘까지 팔아야 했을 정도였단다.

아들 티투스와 헨드리케가 화상이 되어 그의 삶을 지탱해주며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몸부림쳤다. 티투스는 어느새 자라 그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이런 몸부림도 잠시, 1663년 그녀가 사망한다. 그리고 1668년 그의 버팀목이었던 아들마저 27세의 나이에 사망한다. 운명은 그에게 가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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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화상(렘브란트,1669,런던 내셔널 갤러리)
ⓒ 내셔널 갤러리	관련사진보기

 
이 그림은 그가 죽기 전 그린 마지막 자화상이다.
 

"나는 렘브란트의 마지막 자화상을 보았다. 추하고 부서진, 소름끼치며 절망적인, 그러나 그토록 멋지게 그려진 그림을. 그리고 갑자기 나는 깨달았다. 거울 속에서 사라지는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 스스로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그릴 수 있다는 것. 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가."(오스카 코코슈카)

주름진 얼굴, 가지런히 모은 두 손, 모든 걸 잃은 그의 눈동자에는 눈물이 맺혀있다. 슬픔, 체념, 회한, 성찰, 그를 마주하고 있노라면 수많은 감정들이 뒤엉킨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낸 그가 죽는 순간까지 이 그림을 그리며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고흐는 이 그림을 보고 '너무나 비극적'이란 말을 수없이 되뇌었다고 한다. 80여 점 그의 자화상은 그의 일대기를 보여주는 자서전이다. 어떤 글로도 표현할 수 없는 내면의 아우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카라바조가 사용하는 빛은 명암 대비가 극도로 대비되어 비현실적이다. 베르메르의 빛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광을 그림에 넣어 사진보다 현실적이다. 렘브란트의 빛은 그 중간 어디쯤에 있으며 빛을 통해 사건이나 상황을 보여주는 것 뿐 아니라 인물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게 하는 힘이 있다.

실로 마법 같다.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남은 예술혼을 자화상에 짜 낸 빛의 화가 렘브란트는 그렇게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말라비틀어진 빵 쪼가리로 목숨을 연명했던 그의 옆에는 어린 딸 코르넬리아만 남았다.

참고서적-렘브란트(스테파노 추피.미로니에 북스), 렘브란트(로베르타 다다외,예경) 시대의 우울(창비,최영미), 미술사를 바꾼 100인의 예술가(이 진숙, 예술의 전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