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많은 소녀> 스틸컷

<죄 많은 소녀> 스틸컷 ⓒ CGV 아트하우스

  
경민이라는 소녀가 실종되고 경찰은 수색에 나선다. 경찰은 경민이 실종되기 전날 영희와 함께 했다는 걸 알게 되고 그녀를 가해자로 의심한다. 영희는 자살을 꿈꾸는 경민에게 자살과 관련된 말 한 마디를 했다는 이유로 가해자가 된다. 경민의 어머니, 사건을 해결하고자 하는 경찰, 이 상황을 빨리 끝내고 싶은 담임, 친구 한솔까지 모두 그녀가 경민을 죽였다고 몰아붙인다. 그리고 영희는 '죄 많은' 소녀가 된다.
 
영화 <죄 많은 소녀> 속 영희의 모습에서 영화 <줄리안 포>의 줄리안이 떠오른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바다를 향해 여행 중이던 줄리안은 차가 고장이 나 조그마한 시골 마을에 머물게 된다. 외부인의 갑작스러운 방문을 의심하는 마을 사람들은 줄리안을 추궁한다. 그 추궁에 당황한 줄리안은 '자살'을 위해 이 마을에 왔다고 거짓말을 해버린다. 영희와 줄리안은 주변 사람들의 추궁에 거짓을 말한다. 그리고 이 거짓은 두 사람을 옥죄는 낙인이 되고 만다.
 
줄리안이 마을 사람들의 예상치 못한 추궁 때문에 얼떨결에 거짓말을 했다면 영희는 그녀를 둘러싼 환경 때문에 진실을 숨긴다. 그 이유는 경민의 죽음 후 주변의 반응을 통해 나타난다. 어른들은 '원인'이 아닌 '범인'을 밝히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들은 경민이 살해당한 게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 책임을 누군가에게 지게 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 대상으로 지목된 이가 영희다. 경민의 죽음 후 수학 선생은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누군가의 죽음은 잠시지만 성적은 평생을 간다며 너희 인생을 신경 쓰라고 말한다.
  
 <죄 많은 소녀> 스틸컷

<죄 많은 소녀> 스틸컷 ⓒ CGV 아트하우스

 
어른들이 만든 입시라는 고통과 경쟁이라는 원인을 선생들은 덮으려고 한다. 경민의 어머니는 딸에게 신경 쓰지 못한 자신의 책임을 덜기 위해 영희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려 든다. 경민에게 신경도 쓰지 않던 학생들은 누구라도 범인을 만들어 그 사람을 탓하고 괴롭히고 싶어 한다. 이런 환경 속에서 영희는 차마 경민이 자살을 꿈꾸었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그 숨겨왔던 이야기는 경민의 장례식에서 밝혀진다. 그리고 영희는 그 말을 한 것을 후회한다. 그 결말은 그녀의 예상대로이다.
 
책임을 회피하기에 급급한 이들은 영희의 말을 거짓으로 몬다. 그녀가 범인이 되어야만 그들이 만든 원인은 지워진다. 선생도, 형사도, 경민의 어머니도, 친구들도 영희의 말을 믿지 않고 들어주지 않는다. 그녀가 범인이 되어야만 경민은 추모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영희가 주변의 침묵으로 인해 범인이라는 낙인이 찍혔다면 줄리안은 주변의 강요로 자살이라는 낙인을 받게 된다. 거짓말 이후 영희가 주변으로부터 고통을 받은 반면 줄리안은 행복을 얻게 된다.
  
 <줄리안 포> 스틸컷

<줄리안 포> 스틸컷 ⓒ Cypress Films

 
샐러리맨인 아버지 때문에 이사를 자주 다녀야 했던 줄리안은 누군가의 기억에 남는 이가 아니었다. 그런 그가 이 마을에서는 관심의 대상이 된다. 신부는 그에게 죽음 후에 대한 의견을 묻고, 이발사는 자신이 아티스트라며 자살의 예술성에 동참해 달라고 말한다. 마을 사람들은 줄리안이 죽기 전까지 행복한 기억만 품고 가게 해주기 위해 그를 환영하고 선물을 준다. 그리고 사라라는 여인은 자신도 자살을 꿈꾼다며 줄리안에게 다가오고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진다. 인생의 황금기가 자살이라는 거짓말 때문에 펼쳐진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줄리안의 자살을 기다리며 이를 두고 내기를 벌이는 마을 사람들의 잔혹함이 숨어 있다. 경민의 죽음에 의해 영희가 가해자가 된 것처럼 거짓말 때문에 줄리안은 '꼭 자살을 해야 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 행복을 주지만 동시에 죽음이라는 공포를 강요한다. 줄리안에게 주어진 행복이란 죽음을 앞둔 순간까지의 제한된 순간일 뿐이다.
 
영희와 줄리안.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건 주변의 환경이다. 아무 죄도 없는 소녀가 죄 많은 소녀가 된 건, 죽기 싫은 남자가 자살을 꿈꿔야 되는 건 그들을 둘러싼 환경이 찍은 낙인에 의한 강요 때문이다. 인상적인 점은 서로 다른 낙인이 찍힌 두 주인공이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는 점이다. 그 분위기의 정체는 죽음이다. 경민의 장례식장에서 영희는 락스를 입에 부으며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된다. 학교에 돌아온 그녀는 수화로 '여러분 앞에서 가장 멋진 죽음을 완성하러 왔습니다'라는 섬뜩한 말을 하고 뜻을 모르는 학생들은 박수를 친다.
  
 <줄리안 포> 스틸컷

<줄리안 포> 스틸컷 ⓒ Cypress Films

 
영희가 친구들에게 폭행을 당했을 때, 그녀의 아버지는 상처 입은 딸을 보고 왜 그러고 사냐는 식으로 말을 내뱉는다. 학생의 입장에서 감싸주어야 될 학교는 담임이 앞장서서 영희를 몰아세운다. 자살을 꿈꾸었다는 경민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영희의 삶에서 그녀를 지켜주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 이는 줄리안 역시 마찬가지다. <줄리안 포>의 가장 큰 의문은 '왜 줄리안이 바다로 여행을 떠났는지'이다.
 
영화는 끝까지 줄리안이 왜 바다를 향했는지에 대해 밝히지 않는다. 어쩌면 줄리안이 내뱉은 '자살하러 왔다'는 말은 강요에 의한 거짓이 아닌 얼떨결에 튀어나온 진심일지도 모른다. 줄리안을 연결해주는 존재는 마을 외부에 존재하지 않으며 그는 이 마을에서 가장 큰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원하는 자살이 마치 운명인 것처럼 말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변할 수 있는 거 아니냐는 줄리안의 외침이 애절하게 느껴지는 건 죽음이 운명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본다.
 
<죄 많은 소녀>와 <줄리안 포>는 말 한 마디 때문에 끔찍한 낙인을 짊어지게 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 낙인을 찍은 건 집단으로 이루어진 사회라는 어두운 그림자이다. '원인'이 아닌 '범인'을 원하는, '변화'가 아닌 '결과'를 강요하는 사회의 분위기를 조명한다. <죄 많은 소녀>와 <줄리안 포>는 주인공이 짊어진 낙인의 무게가 만든 무거운 발자국이 마음 깊이 남는 영화라 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준모 기자의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 루나글로벌스타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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