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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도 항쟁일까? 동국대 강정구, 순천대 주철희 교수의 답변은 "그렇다"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에서 폭력은 있었으며, 그 중에 우리가 "항쟁"이라 부르는 정당한 폭력도 있다. 그리고 승자인 권력자에 의해 왜곡된 기록마저 존재한다. 

교육부와 순천KBS가 후원하고 한국연구재단이 주최, 순천시와 순천대학교 여순연구소가 주관한 여순사건 70주년 기념 인문주간행사가 지난 10월 29일부터 11월 2일까지 열렸다.

10월 31일 순천대 약대 신관 죽호홀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는 "폭력도 항쟁인가?"라는 질문이 등장했다. 
 
여순 70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인문주간행사 중 학술대회에서 강정구 동국대 교수가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여순 70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인문주간행사 중 학술대회에서 강정구 동국대 교수가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 배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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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반란군'으로 부르는 이들이 저지른 폭력에 대해서 항쟁이라 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즉, '제주 4·3의 진압'이라는 민간인에 대한 폭력을 거부하여 출동 명령을 어겼다는 제14연대도 그 과정에서 폭력을 행했으며, 이것이 과연 항쟁이라고 정당성을 둘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에 강정구 교수는 폭력이 바람직하지는 않으나, 역사적인 흐름에서 폭력이 수반되지 않았던 혁명이나 사건 등이 거의 없음을 설명했다. 그리고 여순사건의 경우 10·19라는 아주 짧은 특정 기간이 아닌, 해방공간의 전체적인 폭력구조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를 할 필요가 있다고 대답했다.

주철희 교수는 "폭력을 반대하면서 왜 봉기군이나 좌익이 사람을 죽였나? 왜 항쟁이냐?"라는 질문이 전국적으로 유포되는 현상에 우려를 나타냈다. "항쟁에는 반드시 폭력이 수반된다. 항쟁은 지배 권력자의 억압에 맞서 싸우는 것"이라며 "가만히 앉아서 이거 해주쇼 하니 들어주는 것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항쟁이 개인적으로 잘못되었으니 사회에 요구하기, 거절 후 집단적으로 나서기, 요구가 정당하면 대중이 함께 일어서는 3단계 과정을 거쳐 항쟁이 된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여순항쟁이 발발하면서 굉장히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가 떠돈다. 반군이나 지방의 좌익들이 천 명의 우익을 죽였다라는 말이 떠돈다"고 했다.

주 교수는 팩트 체크로 '국가공훈록'을 예로 들었다. 그는 "국가유공자를 지정하면 국가공훈록을 만드는데 무얼 하다가 언제 죽었나 기록이 된다"며 "그들이 말하는 '반란군'에 죽은 사람들은 전부 국가공훈록에 기록돼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여수 경찰이 72명이 죽었다고 충헌탑에 쓰였다. 이 72명을 반군이나 지방 좌익에게 학살되었다라고 하지만, 국가공훈록에는 딱 1명만 학살되었다. 71명은 교전 중에 사망이라고 되어 있다'고 밝혔다.

이에 "지속적으로 반공주의나 우익에서 (반란군 등이) 엄청나게 잔학한 행위를 했다는 것을 알리며 학살이라고 기록하는데 마치 사실인양 받아들인다"라며 왜곡된 기록을 시민들이 그대로 믿는 것을 걱정했다. 
 
10월 31일 순천대학교에서 열린 여순 학술대회에서 여순 연구의 권위자인 주철희 순천대 교수가 발언을 하고 있다.
▲ 주철희 교수 10월 31일 순천대학교에서 열린 여순 학술대회에서 여순 연구의 권위자인 주철희 순천대 교수가 발언을 하고 있다.
ⓒ 배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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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단재 신채호 선생이 무장 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다며 <조선혁명선언> 마지막에 "민중은 우리 혁명(자주독립)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라 했음을 언급했다. 이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무기인 폭력으로 싸울 때만이 독립을 쟁취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동학운동의 전봉준 사례를 들며 "먹고 살 것이 없는데 지배 권력자가 아무 것도 않는데 그냥 죽을 것이냐? 짱돌을 던지든 화염병을 던지든 뭐라든 우리가 살 길을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것이 바로 6월 항쟁"이라고 말했다. 끝으로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에 주눅들 필요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한편, 10월 19일에 여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청와대국민청원이 올라왔다. 하지만, 정작 유족들은 고령인 데다 배운 것도 짧아서 인터넷 사용도 못하여 동의를 어떻게 하는지조차 모르는 이가 대다수이다. 또 편견이 무서워 무려 70년을 여전히 숨어 지내는 유족들이 많다. 11월 18일이 마감인데, 2일 20시 25분 기준 5207명만이 동의한 상태다.

순천시는 아예 지자체 명으로 직접 현수막을 내걸고 청원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며, 여순 행사를 적극 지원하고 있다. 순천시장이 직접 제안하여 여순창작가요제 예산을 별도로 책정했으며, 순천시의회는 여순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조력하고 있다. 
 
 
 
10월 20일 순천 팔마체육관에서 열린 여순위령제에서 임채선 유족이 "특별접을 제정하라" 외치고 있다.
▲ 임채선 유족 10월 20일 순천 팔마체육관에서 열린 여순위령제에서 임채선 유족이 "특별접을 제정하라" 외치고 있다.
ⓒ 배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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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일 학술대회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가 넘도록 진행이 되어서 참석자들은 여순연구소에서 배부한 식권으로 순천대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참석자들 중에는 유족들이 상당했다. 학생들은 갑자기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우르르 나타나자 다소 놀라워했다. 그때 기자와 동석했던 할아버지 두 명도 유족이었다.

그 두 분 중에 지난 10월 20일에 팔마체육관에서 열린 위령제에서 기자의 눈에 들어왔던 이가 있었다. 당시 "특별법을 제정하라" 소리치는 모습이 강하게 와닿아 촬영을 했다. 도대체 어떤 사연이 있기에 저렇게까지 할까 궁금했으나, 촬영을 계속 하느라 미처 인터뷰를 할 시간이 없었다. 이름도, 어디에서 온 지도 알 수 없어 그저 여순 행사가 있을 때 다시 만나길 고대했는데, 이처럼 만나게 되어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즉석에서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임채선씨는 1950년 생으로 광양 옥룡 추산리 출신이다. 순천에 거주한 지는 45년이 되었다. 당시 14연대가 백운산으로 이동했고, "산의 사람"이 민가로 내려와 식량을 가져갈 때 부친이 젊은이라 어쩔 수 없이 짐을 짊어진 것이 화근이 되었다.

졸지에 '부역자'가 되어 6,7개월 숨어 살아야 했다. 그러다 1950년에 정부가 국민보도연맹으로 좌익을 색출할 때, 뭣도 모르고 자수해서 3일 만에 순천 구랑실에서 학살되었다. 그나마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임씨는 보도연맹이라는 것이 있는지도 몰랐다가 유족회에 들어가서야 알게 되었다. 부친이 24살인가에 모친과 혼인신고도 하지도 못해서 졸지에 법적으로 "총각"으로 사망했다. 그래서 "6.25둥이" 임씨는 결국 작은아버지 호적으로 올려졌다.

어려운 가정환경에 초등 2학년에 중퇴를 하고 먹고 사느라 갖은 고생을 했다. 부모복은 없어도, 사업운은 있었는지 돈을 제법 벌어 결혼도 하고 자녀 셋 모두 대학까지 보냈다. 훗날 임씨의 아들이 학사장교를 간다고 하자, 옥룡면사무소에서 조사를 세 번이나 왔다. 임씨는 "니는 못 간디. (아들에게) 말을 못해도... (직원이) 못 찾고 갔다. 아들이 군대를 갔다. 군대를 못 갔으면 내가 뭔 소리를 들었을지 모른다"라고 털어놓았다.

연좌제로 엮어서 아예 못 될 거라 여겨서 말렸는데, 그나마 생부가 '총각'이고, 자신의 호적은 작은아버지로 되어 있어서 아들이 무사히 군에 갈 수 있었다.

고향 선배의 소개로 광양유족회에 들어갔으나, 활동이 너무 저조하여 순천유족회로 옮겼다. "여그(순천)뿐만이 아니라요, 광양에가요, 너무 많은 숫자가 죽었어요. 근디 회원이 30명도 안돼요. '반란군'이라 손가락질 받을까봐 안 나타나요. 그래 억울해요." 당시 재가를 한 모친은 현재 생존해 있는데 "숨어서 지내라"며 유족 활동을 극구 말렸다. 그리고 처자식들도 "그간 벌어둔 돈도 있으니 그냥 편히 살지"라며 나서는 것을 반대했다. 하지만 "억울해서 참을 수가 없어"라며, 부인도 말리는 것을 이젠 포기했다며 허탈하게 웃었다.
 

태그:#여순 10.19, #여순항쟁, #여순학술대회, #여순유족, #여순 특별법 제정 국민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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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어로 '좋아할, 호', '낭만, 랑', 사람을 뜻하는 접미사 '이'를 써서 호랑이. 호랑이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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