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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에 빠진 아이를 본 사람의 심정은 어떨까.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타까운 마음이 들 것이다. 맹자는 이를 측은지심이라 일컬으며 인간이 가진 선한 본성이라고 봤다. 타인의 불행을 내 일처럼 여기기에 생기는 마음이었다. 사회가 아무리 각박해졌다 해도 측은지심은 여전히 인간의 내면에 존재한다. 다만 오늘날 측은지심은 내 자신, 멀어봐야 겨우 내 가족에 가닿을 뿐이다. 우리는 이를 경계 삼아 타인에 대한 높고 견고한 벽을 쌓고 있다. 우물에 빠진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니고서야 구해야겠다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지기 어려운 시대다.

인간의 본성이라지만 모두가 같은 범위의 측은지심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2018년은 우리 사회가 가진 측은지심의 한계가 뚜렷이 나타난 해였다. 우리는 내전을 피해 목숨을 구하고자 도망 온 난민을 외면했다. 우물에 빠진 아이를 구해주면 그 아이가 어떤 짓을 할지 모른다는 이유로 그를 내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때 측은지심은 민족단위를 넘지 못했다. 같은 민족이더라도 측은의 심정이 반드시 작용하지는 않았다. 미투 운동은 여성이 처한 우리 사회의 구조적 억압을 드러냈지만 그들의 고발을 부정하고 일부의 일탈이라 외면한 사람들이 있었다. 여성의 어려움에 공감하고 그들의 마음을 살피기에 앞서 남성에 대한 공격이라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이때 측은지심은 성별단위를 넘지 못한 것이었다.

우리 사회가 측은지심의 범위를 좁히고 있었다. 우리는 측은지심의 외면이 오히려 더 나은 결과를 낳기도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성공이 추구해야할 유일한 가치인 상황에서 이기심의 발로는 합리적 선택으로 인정받는다. 내 자리를 빼앗을 수 있는 난민과 여성은 배척해야할 대상이었다. 어느새 이기심은 우리 사회의 덕목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여기에서 개인은 나의 위기에 도움을 줄 곳이 결국 나와 내 가족뿐이라는 폐쇄성을 경험할 뿐이다. 이로부터 이기심은 더욱 강화된다. 최근에는 방어적 이기심을 넘어 공격적 혐오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나와 가족을 제외한 타인은 위험의 대상으로까지 여겨진다. 상대의 측은지심을 기대하지 않는 것은 물론 타인의 어려움을 외면하는 '나'라는 존재들이 점점 늘어날 것 같아 보인다.

측은지심의 범위를 넓혀야 한다.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의 측은지심을 경험할 때 사회는 더 안전한 곳이 되기 때문이다. 현재의 상황은 사회에 대한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반면 측은지심이 사회에 일상적으로 퍼져있을 때 이것은 일종의 사회 안전망 역할을 하게 된다. 예컨대 상대의 측은지심으로 위기에서 벗어난 경험을 통해, 그는 더 이상 나와 분리되는 남이 아니게 된다. 나의 측은지심의 범위가 넓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사회 구성원들의 측은지심이 연쇄작용을 일으키게 된다. 이것이 겹치고 겹쳐 위기에 대응하는 단단한 방어망이 마련될 수 있다. 도움이 필요할 때 가장 먼저 공동체를 생각하게 되는 사회로의 변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맹자는 우물에 빠진 아이를 보며 느끼는 안타까운 심정이 곧바로 아이를 구하는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했다. 측은지심은 그저 어진 행동(仁)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의 원천일 뿐이다. 그것이 아이를 구하는 실질적 행동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측은의 마음이 개인의 모든 행동을 지배하는 원칙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결국 본성 깊숙이 숨어있는 측은지심을 발굴하고 키우는 노력이 가미돼야 한다. 상대의 어려움에 안타까움을 느끼는 감정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일상화된 측은지심으로부터 실제 타인을 돕는 선행이 가능하다. 이런 경험을 누적한 사회 구성원들은 공동체의 안전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될 수 있다.

태그:#측은지심, #미투, #난민, #사회 안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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