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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집이 즐비한 군산 째보선창 부근
 점집이 즐비한 군산 째보선창 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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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 하구에 자리한 군산(群山)은 예로부터 포구가 많았다. 나포, 서포, 월포, 경포, 죽성포 등으로 지금도 곳곳에 포구 흔적이 남아 있다. 포구를 낀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정초에 당제(풍어제)를 지냈다. 포구가 아닌 마을들도 대부분 금강 지류와 바다를 접하고 있었으므로 풍어와 주민들의 안녕을 비는 동제(洞祭)가 열렸다.

굿도 성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1960~1970년대만 해도 ㅇㅇ작명소, ㅇㅇ철학관 등의 간판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점집들이 처마를 맞대고 있는 '점집 골목'도 조성되어 있었다. 회사를 설립하거나 가게를 개업해도 작명소를 찾아 상호를 정하고, 갓 태어난 아기도 이름을 잘 지어줘야 무병장수한다고 믿었던 것.

옛날 사람들은 마을 이름에도 신경을 쏟았다. 군산 지역 지명에서도 잘 나타난다. 자연환경, 즉 산천초목, 암석, 고개 등에서 비롯된 것과 인간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만든 것(시장, 주막 등), 신앙생활 관련, 유적과 위치 생김새에 따라 정한 것(풍수지리설), 촌락 발생 시기에 따라 정한 것, 설화에 등장하는 것 등 다양하다.

안타까운 점은 개항(1899) 이후 일제에 의해 격자형으로 조성된 원도심권에서는 전통 지명을 찾아보기가 극히 어렵고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일본식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복웅 원장
 이복웅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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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군산역사문화연구원 이복웅 원장은 "전통은 오랜 생활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다. 역사가 있는 곳이면 반드시 그 지역의 독특한 문화가 존재하고, 문화가 있는 곳에 전통이 있게 마련이다. 현재 호칭 되는 마을 유래를 분석해보면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원장은 시인으로 군산문화원장을 지냈다. <군산의 지명유래> 저자이기도 한 그에게 내초동, 오식도동, 버들리, 돌머리, 쌍봉리, 등의 지명과 그 유래를 들어보았다.

예전엔 섬이었던 내초동, 오식도동
 
억새가 무성한 내초동 공원
 억새가 무성한 내초동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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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에서 선유도나 비응항에 가려면 공단 부근의 내초동(內草洞)을 지난다. 내초동은 본래 옥구군 미면에 속한 자그만 섬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군산시로 편입되는 1989년 전까지 '내초도', '초도', '새섬' 등 다양하게 불렸다.

"본래 이름은 '새섬'이다. 나이든 노인들은 지금도 새섬이라고 한다. '새'는 하늘을 나는 새가 아니라 고어로 '풀'이라는 뜻이다. 풀(草)이 많은 섬이어서 '새섬'이라 불렀다. '새섬'을 한자로 표기하면 '풀 초(草)'를 써 초도(草島)이다. 섬이 오식도(오식도동) 안쪽에 위치해 '안 내(內)'를 앞에 붙여 내초도(內草島)라 부르게 됐다.

오식도 역시 옥구군에 속했다가 1989년 군산시로 편입됐다. 조선 시대 나라의 소를 이곳에 방목해서 오식도(筽食島)라 했으며, 오죽도(筽竹島), 오죽도(梧竹島)로도 불렸다. 옛날에는 시누대가 많아 그 대나무를 깎아 피리를 만들고 노래를 부르며 즐겼다고 해서 요죽도(樂竹島)라 불렸다는 전설도 내려온다."


당나라군과 백제군의 1차 전투 벌어졌던 버들리
 
옥산면 당북리에 위치한 칠다리
 옥산면 당북리에 위치한 칠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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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면 버들리(내유리, 외유리, 평유리)에 대해서도 정리가 필요할 것 같다.

"옥산면 칠다리에서 쭈~욱 가면 금성산성이 나오는데 그 아래가 버들리다. 옛날에는 칠다리까지 버들리였다. 수양버들이 많은 동네라서 '버들리'란 이름을 얻었다. 마을이 바구니처럼 금성산(125m)을 등지고 있다. 산 안쪽에 위치한 마을은 내유(內柳), 바깥쪽에 위치한 마을은 외유(外柳), 평평한 들 가운데 마을은 평유(平柳)라 하였다. '외유리'는 마을 바깥에 있다고 해서 '밖버들'로 불리기도 한다.

버들리는 금강과 만경강이 합수하는 지역으로 당나라군과 백제군의 1차 전투가 벌어진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서기 660년 소정방이 대군을 이끌고 그곳으로 쳐들어왔다. 그런데 뻘이 많아 군사들이 상륙할 수 없게 되자 마을 버드나무 가지와 잎을 따가지고 역어 갯바닥에 깔아놓고 상륙했다고 전한다."
 

이 원장은 "칠다리에서 버들리에 이르는 지역은 왜적을 방어하는 요새이기도 했다. 또한 강줄기가 이곳까지 이어져 있었으며 제방을 쌓아 농지를 만들어 넓은 들이 생기자 '들땅리'라 부르기도 했다"며 "물줄기가 '일곱 칠(七)자' 형으로 흐른다고 해서 칠다리, 다리 난간 받침을 나무로 세워 옻칠해서 '칠(漆) 다리'로 부르게 됐다"고 부연했다.

옛날에는 옥산면 쌍봉리까지 배 드나들어
 
옥산면 남내마을 입구
 옥산면 남내마을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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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면 쌍봉리와 남내리는 대왕산(大王山), 왕재산(王在山), 대봉산(大鳳山) 등이 중심을 이룬다. 이 산들은 이름에 '큰 大'와 '임금 王'이 들어가는 게 특징이다. 그중 대왕산은 임금이 앉아 있는 형국으로 왕이 태어나거나 장군이 배출될 터였는데, 어느 때인지 중심부가 잘려나가고 도로가 나는 바람에 힘을 잃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옥산면 쌍봉리(雙鳳里)와 남내리(南內里)는 본래 '한마을'이었다. 그중 쌍봉리 본래 이름은 '돌머리'다. 옛날에는 만경강 물이 그곳까지 올라왔는데 육지화 되어 배가 더는 올라가지 못하고 뱃머리를 돌렸다고 해서 돌머리가 됐다고 한다. 지금도 마을에는 밧줄로 배를 묶어놓던 바위가 있다.

쌍봉리는 북내(北內), 접산(蝶山), 봉동(鳳東), 봉서(鳳西), 평사(平沙), 당뫼 등이 마을을 이뤄 지역이 매우 넓다. '북내'는 남내리와 갈라질 때 생긴 이름이고, '접산'은 산이 나비 날개 모양이라서 '나비 접(蝶)'을 쓴다. 봉동과 봉서는 위치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평사(마을)는 기러기가 모래밭에 앉는 모습의 '평사낙안'에서 유래했으며 '당뫼'는 당산이 있는 동네라서 이른 말이다."


"그 옛날 군산은 섬이었고, 시내는 대부분 갯벌이었다."
 
10년 전 경포천 모습(물줄기 왼편이 서쪽이다.)
 10년 전 경포천 모습(물줄기 왼편이 서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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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웅 원장 설명에서 서기 660년 당시 옥산면 버들리 부근은 바닷물이 드나드는 갯벌이었고, 그곳에서 당나라군사와 백제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으며, 쌍봉리(돌머리)까지 배들이 들어왔다는 대목은 당시엔 금강과 만경강 지류가 맞닿아 있었고, 따라서 경암동 경포천을 경계로 서쪽 지역은 섬(島)이었음을 시사한다.

옛 노인들도 "개항 전 군산은 섬이었고, 시내는 대부분 갯벌이었다"는 말을 자주 하였다. <군산역사 이야기>(김중규 지음)도 '백제 시대 금강 하구는 현재 모습처럼 북에서 서쪽으로 서류하는 강줄기와 함께 군산 경암동 인근(경포천)에서 남향하여 현재의 만경강 하구에 유입하는 강줄기 역시 존재했다'는 일본인 학사 오오와라(大原利武) 주장을 소개한다. 군산은 본래 섬 모습이었다는 것.

지금의 경암동, 수송동, 평사뜰, 석교뜰을 거쳐 칠다리, 수산이곡평야, 만경강 하구에 이르는 지역은 과거 바닷물과 밀물·썰물의 영향권에 있었음이 1937년 조선총독부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특히 평사마을, 칠다리 근처, 내유마을 등은 내륙임에도 조개무덤이 발견됐고, 회현면 옛 지명이 '육지의 끝'을 뜻하는 회미(會尾)인 것도 지나칠 수 없는 대목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매거진군산 11월호에도 실립니다.


태그:#군산시 지명, #경포천, #이복웅, #육지와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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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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