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가영 영화감독

2014년 단편 <혀의 미래>를 시작으로 10여 편의 단편 영화를 만들어온 정가영 감독이 두 번째 장편 <밤치기>로 관객과 만난다. ⓒ 권우성

 
우디 앨런,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를 좋아했고, 막연하게 <출발 비디오 여행> PD를 꿈꿨던 작가 지망생이 약 4년 만에 10여 편의 단편을 만들어낸 감독이 돼 있었다. 1990년생, 적다면 적을 나이에 벌써 두 번째 장편의 개봉을 앞둔 정가영 감독을 지난 30일 오후 서울 을지로3가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오는 1일 개봉하는 영화 <밤치기>는 정 감독의 첫 번째 장편 <비치 온 더 비치>와도 연결된다. 그가 선보인 단편의 상당수도 마찬가지다. 감독 본인이 직접 출연해 상대 배우에게 사랑과 연애, 섹스에 대해 거침없이 생각을 내뱉는다. 

<밤치기>에선 영화감독 지망생인 주인공 가영의 입을 빌렸다. 남자에게 호감이 있지만 정작 그 남자에겐 오래 사귄 여자친구가 있다. 가영은 영화 시나리오를 위한 자료 조사를 핑계로 남자를 불러내 여러 질문을 던지는데 자위 횟수부터 성적 취향까지 상당히 노골적이다. 그리고 최종질문으로 이어진다. '오빠랑 자는 건 불가능하겠죠?'  

꾸준히 던지는 화두

"<비치 온 더 비치>가 일종의 성공담이었다면 이번엔 실패담을 찍고 싶었다"며 정가영 감독이 운을 뗐다. 지금의 제목 역시 점프를 해서 달을 치려고 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붙인 것이었다. 그는 "제 스스로도 실패한 많은 구애의 밤들을 보냈기에 그런 처절한 이야기를 하게 됐다"며 "힘겨워 보이지만 힘찬 느낌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저도 그렇고 20대들의 주 관심사가 사랑, 연애, 남녀의 성 이런 것이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뽑아내려 했다. 사실 이야기의 신선함 딱 하나만 생각했다. 이 이야기를 신선하게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그게 제가 찾는 재미와도 연결된다. 성적인 이야기, 사랑 이야기가 공통적으로 담겨 있긴 하지만 애초에 의도한 건 아니다. 지금 현재 제가 재밌게 할 수 있는 게 그런 이야기였다."
 

 영화 <밤치기>의 한 장면.

영화 <밤치기>의 한 장면. 배우 박종환과 정가영 감독이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또한 단편 <병구> 등으로 주목받은 형슬우 감독 또한 이 영화에서 종환의 지인으로 깜짝 출연했다. ⓒ 레진엔터테인먼트

 
감독의 말에서 알 수 있듯 영화 속 가영에는 상당 부분 본인이 투영돼 있다. 동시에 상상과 어떤 희망도 섞여 있다. 상대 남성에게 끈질기게 구애하는 모습은 왠지 의뭉스럽지만 동시에 마냥 미워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매력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제 이야기 속 가영은 저보다 재밌고 긍정적이고 매력적인 아이였으면 했다.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제가 갖고있는 판타지 같다. <밤치기>속 그 남자는 여자친구가 있다면서 가영의 요구를 강하게 거부하잖나. 제가 생각한 이상적인 남성상이기도 하다. 그런 것들을 많이 녹여내려고 했고, 그 하룻밤 자체가 재밌는 그런 현실을 만들어내고 싶었다. 던지는 말과 상대의 리액션과 상황이 재밌는...

시나리오는 빨리 쓰는 편이다. 인물을 구상하는 과정을 길게 갖기보다는 쓰기 시작하면서 만드는 편이다. <밤치기>에선 '여자가 그 날 밤 안에 무조건 그 남자를 꾀어야 한다. 애인이 있든 그가 튕기든 말든!' 이 강력한 하나의 줄기에서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써내려가면서 인물들은 어느 정도 개성 있고 매력적인 인물로 담긴 것 같다."


특별한 위로

지난 언론 시사회 자리에서 정가영 감독은 SBS 과거 예능 프로 <짝>을 언급했다. 해당 프로를 보면서 나름의 위로를 받았는데 <밤치기>에서도 관객들이 그런 위로를 받았으면 한다는 취지였다. 닫힌 공간에서 일정 기간 서로 다른 남녀가 상대를 탐색해 가는 이 프로가 감독에겐 어떤 위로와 영감이 됐던 걸까. 

"<짝>이 불미스러운 일로 종영하는 바람에 (말하기) 조심스럽긴 한데 제가 좋아했던 프로 중 하나였다. 마치 제겐 '길티 플레저(죄의식을 동반하지만, 했을 때 즐거운 일) 같았다. 좋아하는 에피소드는 열 번, 스무 번도 넘게 보곤했다. 왜 이렇게 내가 집착할까? 이 프로의 매력이 뭘까 생각했다. 

어떤 인간이 누군가에게 빠져서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감정으로 애걸복걸하는 그런 모습이 제겐 어떤 면에서 위로가 되더라. 본인은 마음이 아프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제겐 그 사람이 살아 있는 순간으로 느껴졌다. 사랑에 빠져 있는 순간이니 말이다. 저도 그런 걸 영화로 담아낼 수 있을까 생각했다."


주관적인 이유였지만 그의 영화를 본 관객들, 특히 여성 관객들이 꽤 열광하는 모양새다. 정가영 감독의 지인 중 한 명은 그런 광경을 보고 '난 너를 알기에 영화를 재밌게 봤는데 널 모르는 다른 사람들도 재밌게 봐서 이상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만큼 지극히 개인적인 것 같으면서 보편성을 갖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겠다.
   

 정가영 영화감독

"제 이야기 속 가영은 저보다 재밌고 긍정적이고 매력적인 아이였으면 했다.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제가 갖고있는 판타지 같다." ⓒ 권우성

  
정가영 감독 작품은 여성이 구애 행동에 적극 나선다는 점에서도 꽤 신선하다. 흔히 국내 영화와 드라마에서 사랑의 대상이자 구애의 대상으로 그려지곤 했던 여성이 망가지고 무시당하는 걸 감내하면서 적극적으로 상대방에게 자자고 한다? 이 자체로 기존 문법의 전복 아닐까. 현실 같은 상상, 상상 같은 현실을 영화로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일각에선 그에게 '여자 홍상수'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사실 처음부터 어떤 전복을 의도하거나 남자, 여자에 대한 주제의식을 갖고 만든 건 아니지만 적어도 제가 한국에서 살면서 어떤 불합리나 부조리를 느낀 건 맞다. 감독을 하면서 제 안에 쌓여 있던 불만과 어떤 느낌이 만난 것 같다. 여성이 적극적으로 구애할 수도 있고, (실패해서) 지질하게 될 수도 있고, 남자에게 차여서 슬퍼할 수도 있다. 기존 드라마에서 다루지 않은 걸 다루면 신선할 것 같았다.

(여자 홍상수라는 별명에 대해) 음, 홍상수 감독님을 워낙 좋아하고 존경한다. 홍 감독님 작업 방식으로 하는 작가들이 워낙 없다 보니 그런 비슷한 시도를 하는 사람에게 '포스트 홍상수' 이런 수식어를 붙이시는 것 같다. 그런 수식어, 부담이나 그런 건 없다. 감독님의 작품을 보면서 저도 늘 힘을 얻기에 감독님이 기분 상하시지만 않는다면 그렇게 절 불러주시는 건 영광이다."


조인성을 설득하다
 


그의 전작 중 눈에 띄는 제목이 있다. <조인성을 좋아하세요>라는 단편인데 말 그대로 이 영화에 조인성이 목소리로 실제 출연했다. 친구와 연애 얘기, 새로 구상하는 영화 얘기를 하다 조인성에 대해 사담을 나누고, 그러다 정말로 조인성에게 전화가 오게 된다는 이야기다. 소소한 이야기지만 스타 배우를 섭외한 정가영 감독의 섭외력에 새삼 놀라게 되는 대목.

"영화 <더 킹>을 보고 나서 꿈에 조인성씨가 몇 번 나왔다. 그래서 <조인성을 좋아하세요> 시나리오를 후다닥 쓰게 됐다. 그리고 검색해서 조인성씨 소속사에 전화해서 단편 시나리오를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매니저 분에게 이메일로 시나리오를 보냈다. 근데 보내고 나니 '아, 내가 나의 욕망으로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거 아닌가. 제발 조인성씨가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 

그리고 다음날 밤 11시에 술 먹고 있는데 조인성씨에게 직접 전화가 왔다! 시나리오 너무 재밌게 잘 봤다면서 언제 찍는지 물어보시더라. 끊기 전에 제게 멋있다고 말씀해주셨다(웃음). 그 뒤로 3일 밤을 못 잤다. 기분이 주체가 안 되더라. 엄마가 걱정할 정도였다(웃음). <밤치기>를 준비하고 있던 때였는데 곧바로 <조인성을 좋아하세요>를 찍었지. 행복한 지난해를 보냈다. 조인성씨도 영화를 재밌게 보신 것 같았다. 이후엔 못 뵈었고, 촬영하면서는 같이 술은 마셨다. 소탈하시고 좋더라(웃음)."


영화 소개 프로 피디가 되고 싶어 신문방송학과를 택했다가 중퇴, 이후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들어갔으나 역시 중퇴한 뒤, 소설가 데뷔를 꿈꾸며 수십 편의 습작을 남긴 그다. 2014년 첫 단편 <혀의 미래> 이후 꾸준히 영화를 만들었다. 그는 "실시간으로 관객들이 재밌다고 반응해주시는 게 너무 좋았다"며 영화 작업에 빠진 계기를 전했다. 
   

 정가영 영화감독

"여성이 적극적으로 구애할 수도 있고, (실패해서) 찌질하게 될 수도 있고, 남자에게 차여서 슬퍼할 수도 있다. 기존 드라마에서 다루지 않은 걸 다루면 신선할 것 같았다." ⓒ 권우성

 
"소설가나 싱어송라이터도 되고 싶어서 진지하게 준비했었다. 근데 공모전에 다 떨어지고, 친구들의 반응도 별로였고. 의욕이 떨어지더라. 근데 영화는 찍어서 보여주면 반응이 오니까... 결국 재미가 제 동력인 것 같다. 관객이 재밌게 봐주시면 기분이 좋아진다. 만약 영화도 소설처럼 반응이 없었다면 계속 하진 못했을 것 같다.   

첫 번째 장편은 제 돈 300만원을 들여서 했는데 다행히 <밤치기>는 투자사의 투자를 받았다. 얼마 전 세 번째 장편을 찍었는데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을 받아서 할 수 있었다. 이석형 배우와 제가 출연하는데 불륜에 대한 이야기다. 찍다 보니 그림에 대한 고민도 생기고, 제 돈으로는 더는 못 찍겠더라. 지난해까지만 해도 서빙 등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는데 이제 슬슬 전업을 고민 중이다. 항상 잔고가 절 위협하고, 목구멍이 포도청이지만, 동시에 잔고 바닥이 보여야 또 헝그리정신이 나오지 않나 싶다(웃음). 지금은 상업영화 시나리오를 준비 중이다."


대화에 예민하고 상대 반응에 민감한 사람. 정가영 감독은 본인의 일부분을 이렇게 설명했다. 주고받는 말의 맛과 어떤 특정한 상황과 분위기를 잘 잡는 감독. 지금까지 그가 보여온 장기다. 이런 재기발랄함이 상업영화에서도 꽃피길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정가영 밤치기 박종환 형슬우 조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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