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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017년은 촛불혁명의 승리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해이고, 내년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울 동작구를 '동작 민주올레'라는 이름으로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탐방은 총 6개 길(대방길, 노량진길, 흑석길, 상도길, 현충원길, 신대방길)로 나누어 진행하며, 코스별로 6~7회에 걸쳐 연재한다. '대방길'과 '노량진길' 연재를 마치고, 이번에는 '흑석길'이다. - 기자 말

▶ 코스안내 : ①흑석고개(동양공고·동양공전 터) - ②학도의용병 현충비 - ③효사정문학공원(+심훈생가터) - ④중앙대학교 - ⑤은로초등학교 - ⑥오연상 내과 - ⑦평화의 소녀상 - ⑧조선일보 뉴지엄

'효사정문학공원'에서 내려와 '심훈생가 터'를 구경하고, 흑석동 로타리를 지나면 중앙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지역주민과 더 가까워지고 싶어서일까? 2008년 두산그룹에서 학교를 인수한 후 예전과 달리 담장을 없애고 개방형으로 재편했다. 

하지만 두산이 인수한 후 기업식 구조조정을 하면서 중앙대는 경영대 중심으로 재편되고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학과는 폐과 또는 대폭 축소됐다. 이 과정에서 중앙대는 대학 본연의 자세를 잃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2010년에는 학과 강제통폐합에 반대해 노영수 학생(당시 독어독문학과)이 공사 중이던 타워크레인 꼭대기에 올라 고공시위를 벌이다 퇴학 처분을 당하기도 했다. 노영수 학생은 이후 퇴학무효 처분 소송에서 승소해 퇴학 처분을 취소시키고 학교에 다시 다닐 수 있었다.

그럼에도 두산그룹의 중앙대 구조조정 움직임은 이후에도 지속됐다. 겉과 속이 꼭 일치하는 게 아니라는 걸 중앙대 캠퍼스는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중앙대의 시작은 언제인가?
 
영신관 중앙대의 흑석동시대를 연 1938년에 처음 세워진 건물이다. 실질적인 설립자 임영신의 이름을 따서 영신관이라 이름 붙였다. 입구에는 임영신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 영신관 중앙대의 흑석동시대를 연 1938년에 처음 세워진 건물이다. 실질적인 설립자 임영신의 이름을 따서 영신관이라 이름 붙였다. 입구에는 임영신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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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가 이곳 흑석동에 자리 잡은 것은 1938년의 일이다. 하지만 중앙대의 뿌리는 더 깊다. 현재 중앙대는 자신의 역사를 1918년 인사동 중앙교회 부설 중앙유치원의 설립에서 찾고 있다. 1916년 정동교회 유치원의 분원으로 시작해 1918년에 독립한 것이 중앙대의 시작이라며, 100주년기념관 건립과 함께 100주년 기념우표도 발행했다. 지난 10월 11일에는 중앙대 설립 100주년 기념행사도 벌였다.

그런데 대학의 시작을 유치원에서 찾는 것은 왠지 옹색해 보인다. 그보다는 유치원 교사를 양성하기 위해 1922년부터 운영한 중앙유치원 사범과에서 중앙대의 시작을 찾는 편이 더 합리적으로 보인다. 실제로 1935년 11월 12일 자 <동아일보>는 중앙보육학교가 창립 13주년 기념축하회를 본교 대강당에서 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중앙보육학교는 중앙유치원 사범과에서 독립하여 1928년에 정식으로 인가를 받아 세워진 학교다.

이 중앙보육학교가 이어 중앙여자전문학교(1945), 중앙여자대학(1947), 중앙대학(1948)을 거쳐 마침내 종합대학인 중앙대학교(1953)가 됐다.

중앙보육학교 교장 박희도, '민족대표 33인 중 가장 타락한 분자'

중앙대의 역사에서 중앙보육학교 시절의 박희도(1889~1952)는 반드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1919년 3·1혁명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명이었던 박희도는 장두현, 신태화, 김상돈 등과 함께 중앙보육학교를 인가 받은 공동설립자 가운데 한 명이었고, 초대 교장을 지낸 인물이다.

박희도는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간사를 맡고 있던 당시 기독교계를 대표해서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해 2년 넘게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감옥에서 나와서는 기독교계에서 활동을 하면서 <신생활>이라는 잡지 사장도 맡았다. 이 <신생활>은 조선 최초의 사회주의 잡지로 평가받는다.

이는 박희도가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편집장을 맡았던 제주도 출신 사회주의자 김명식의 영향 때문이었다. 박희도는 잡지 <신생활>이 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 2년간 감옥살이를 더 하기도 했다. 이렇듯 박희도는 1930년대 초반까지는 사회운동가이자 교육가로 이름이 높았다.

그런 박희도가 1930년대 중후반부터는 친일파로 돌아서서 친일성향 잡지인 <동양지광>을 창간해 주간을 맡는다. 이로 인해 광복 후에 친일잔재 청산을 목적으로 한 반민특위에 회부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박희도는 '민족대표 33인 중에서 가장 타락한 분자'로 평가받는다.

그런데 박희도의 타락은 단지 친일파로 전락했다는 데만 있지 않았다. 박희도는 1934년도에 언론에 대서특필된 <에로교장 Y선생 사건>으로 유명세를 치른다. 1930년대 초 중앙보육학교 교장 시절 박희도와 같은 학교 여제자 간에 발생한 성폭력 사건이 세간의 관심사로 떠올랐던 것이다. 결국 이 사건으로 박희도는 교육계를 떠나게 된다. 당시 언론은 박희도가 여제자와 '키스내기 화투'를 하다가 정조까지 유린했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이 사건은 나중에 그 여제자가 "남편의 폭력과 협박에 못 이겨 박희도와의 일을 허위로 폭로했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미궁으로 빠져든다. 사건 폭로 후 전개되는 방식이 요즘의 미투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이 놀랍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박희도는 교장직을 내놓고 설립자 전원이 사퇴하면서 중앙보육학교는 학생들의 신뢰를 잃어 폐교 위기에 몰리기까지 한다.

중앙대의 실질적 설립자 승당 임영신
  
임영신 동상 1938년에 흑석동에 처음 지어진 건물 영신관 앞에는 중앙대의 실질적 설립자 임영신의 동상이 있다.
▲ 임영신 동상 1938년에 흑석동에 처음 지어진 건물 영신관 앞에는 중앙대의 실질적 설립자 임영신의 동상이 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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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에 들어가면 잔디밭 건너편에 오래돼 보이는 건물이 보인다. 중앙대가 흑석동에 처음 자리 잡을 때인 1938년에 지어진 건물이다. 위기에 몰린 중앙보육학교를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임영신이 1935년 인수한 후 흑석동으로 옮겼던 것이다.
   
그때 처음 지어진 건물을 임영신의 호를 따서 '영신관'이라고 부른다. 건물 앞에는 임영신 동상이 세워져 있다. 임영신은 사실상 중앙대를 설립한 인물로 평가받는데, 정확히는 1935년에 중앙보육학교를 인수하고 발전시켜 오늘에 이르게 한 인물이다.

임영신은 1919년에 전주와 천안에서 3.1혁명에 참여한다. 1918년 전주 기전여학교를 졸업한 임영신은 곧바로 천안에 있는 양대소학교의 교사가 됐는데, 다음 해 3.1혁명이 시작되자 3월 12일 전주시내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에 주도적으로 나섰다가 일경에 잡혀 온갖 고문을 받은 후 징역 7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그해 6월에 가석방될 때까지 3개월간 감옥 생활도 한다.

임영신은 감옥에서 나온 후 몰래 일본으로 가서 히로시마기독여자전문학교를 다녔다. 1921년에는 귀국해서 공주 영명여학교의 교사가 되고, 그후 이화학당의 교사로 출강하다가 1924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이때 임영신은 미국에서 이승만을 만나게 되는데, 이승만의 견해에 깊이 공감하면서 이승만이 죽을 때까지 평생 그를 돕는 역할을 하게 된다. 1931년 임영신이 대학원을 졸업할 무렵에는 이승만이 제3자를 통해 청혼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임영신 나이가 32세일 때인데, 이때 이승만의 나이는 56세였다. 임영신은 고심 끝에 "저는 조선의 독립과 결혼하겠어요!"라면서 거절했다고 전해진다.

임영신은 1936년 말 중앙보육학교의 운영자금을 모으기 위해 다시 미국으로 간다. 이때 한순교와 결혼하지만, 곧 파경을 맞는다. 1940년에 귀국한 임영신은 1941년 12월 13일 발족한 친일단체 조선임전보국단에 중앙보육학교의 대표로 참여한다. 하지만 임영신은 김활란, 모윤숙 등과는 달리 소극적으로 활동한 인물로 분류된다.

해방 후 임영신은 김활란, 박현숙, 최은희, 이은혜 등과 함께 대한여자국민당을 창당하여 당수가 된다.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될 때는 초대 상공부장관을 지냈으며, 1949년에 치러진 안동 보궐선거에서는 장택상을 물리치고 당선해 기염을 토하기도 한다. 이승만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임영신은 1952년과 1960년의 정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으로 출마하기도 했다.

임영신의 호가 '이승만이 머무는 집'이라는 뜻이 담긴 승당(承堂)이라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1959년에 세워진 중앙대중앙도서관의 처음 이름은 이승만의 호를 딴 '우남기념도서관'이었다.

중앙보육학교 출신 독립운동가, 박차정

중앙보육학교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이름을 남긴 인물은 많이 확인되지 않는다. 여성독립운동가들이 많이 발굴되지 않은 이유와 관련된 것인지는 좀 더 확인이 필요하다.

다만, 경남 양산시에서 제공하는 '디지털양산문화대전'의 양산유치원 편에 아래와 같은 대목이 나와 주목된다.

"1923년 2월 8일 양산 유지들의 발기로 청년회관에서 양산유치원 발기회를 개최하였다. (중략) 서울 중앙보육학교에서 내려온 2명이 교사로 일했다. 그 중 1명인 여성운동가 박차정은 동래 출신으로 독립운동가인 김약수·김두봉과 친척이었고, 김원봉의 아내였다."(디지털양산문화대전, 양산유치원 중)

독립운동가 박차정(1910~1944)이 중앙보육학교에서 내려와 양산유치원의 교사를 했다는 내용이다. 박차정은 1929년에 민족협동전선 신간회의 자매단체인 근우회 중앙집행위원도 지냈는데, 이때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1930년 1월 서울에서 전개된 여학생 시위사건을 배후에서 지도하다가 허정숙과 함께 구속되기도 한다. 이때 참가학교는 이화, 숙명, 배화, 동덕여고와 근화, 실천, 정신, 태화여학교, 그리고 여자미술, 경성여자상업, 경성보육학교 등 11개 학교였다.
  
박차정과 김원봉 박차정과 김원봉은 1931년 3월 결혼하였다.
▲ 박차정과 김원봉 박차정과 김원봉은 1931년 3월 결혼하였다.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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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중국으로 망명한 박차정은 의열단 단원이 돼 활동하다가 약산 김원봉과 결혼했다. 그리고 민족혁명당 부녀부 주임(1936)과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 단장(1938)도 맡았다. 박차정은 1939년 2월 강서성 곤륜산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기도 하는데, 1944년 돌아가시는 것도 이때 얻은 부상후유증이 컸다고 한다.

1929년 중앙보육학교를 졸업한 최정희(1912~1990)는 제1회 여류문화상(1964), 제17회 대한민국예술원상(1972), 제24회 3.1문화상(1983) 등을 수상한 소설가이다.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계 예술인들의 모임인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회원이었다. 1931년 10월 단편소설 <정당한 스파이>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1934년 2월에는 카프사건 2차 검거 때 카프맹원과 연루된 혐의로 전주형무소에 구속되기도 하는데, 8개월 만에 무죄로 풀려난다.

하지만 최정희는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제에 적극 협력했다. 조선문인협회 간사(1941~1942), 임전대책협력회의 채권가두유격대 활동(1941),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과 평의원 활동(1941~1942)을 했고, 조선임전보국단 결전 부인대회(1942)에서 <군국의 어머니>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일제를 찬양한 작품도 많이 남겼는데, <어머니의 마음>(1939), <환영의 병사>(1941), <장미의 집>(1942), <군국의 어머님들>과 <군국모성찬>(1944), <징용열차>(1945) 등이 대표적이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했다.

중앙보육학교의 빙상선수 출신 양수복(1935년 졸)은 프로핀테른 극동책임자 출신으로 1930년대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을 이끌던 권영태 그룹의 독서모임에 참가했다. 권영태 그룹은 1934년 혁명적 노동조합활동에 기반한 '공산주의자 그룹'을 준비하다 일제에 체포돼 와해됐다. 

이후 양수복이 독립운동에 계속 나선 모습은 확인되지 않는다. 양수복은 이후 공주에서 유치원 교사로 재직하며 독창회도 개최하는데, 성악에도 천재적인 재질이 있었다고 한다. 예술과 체육방면에 모두 뛰어난 재주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앙대 학생이 한강을 건너면 역사가 바뀐다!"

중앙대생들은 해방이후 민주화운동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4.19혁명 당시 중대생들은 이승만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설립자 임영신의 뜻과는 달리 영신관 앞 '루이스 가든'에 4000여 명이 모여 "의에 죽고 참에 살자"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한강인도교를 건너 내무부 앞으로 진출했다. 
  
4.19혁명 당시 시위에 나선 중앙대생들 중앙대에서 모인 4천여명은 결의대회를 마친 후 한강을 건너 을지로 내무부 앞으로 진출하였다. "의에 죽고 참에 살자"는 중앙대의 교훈이 담긴 플래카드가 보인다.
▲ 4.19혁명 당시 시위에 나선 중앙대생들 중앙대에서 모인 4천여명은 결의대회를 마친 후 한강을 건너 을지로 내무부 앞으로 진출하였다. "의에 죽고 참에 살자"는 중앙대의 교훈이 담긴 플래카드가 보인다.
ⓒ 중앙대민주동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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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을 건너는 중앙대생들(1991년 5월) "중앙대 학생들이 한강을 건너면 역사가 바뀐다!"는 신화는 1960년 4.19혁명 때부터 생겨났고, 이후 중요한 역사의 고비마다 중앙대생들은 대오를 형성하여 한강을 건넜다.
▲ 한강을 건너는 중앙대생들(1991년 5월) "중앙대 학생들이 한강을 건너면 역사가 바뀐다!"는 신화는 1960년 4.19혁명 때부터 생겨났고, 이후 중요한 역사의 고비마다 중앙대생들은 대오를 형성하여 한강을 건넜다.
ⓒ 중앙대민주동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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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고병래, 김태년, 송규석, 지영헌, 전무영 학생이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숨지고, 서현무 학생은 경찰에 연행돼 고문을 당한 후 고문 후유증으로 7월 4일에 숨지는 등 6명이 세상을 떠난다. 중앙대는 서울대와 더불어 4.19혁명 당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학교였다. "중앙대 학생이 한강을 건너면 역사가 바뀐다!"는 신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중앙대생들은 4.19혁명 정신을 기리기 위해 중앙도서관 앞에 '의혈탑'(1960)을 세웠고, 중앙대는 영신관 오른편에 4월학생관(현 교양학관, 1962)을 건립했다.
 
의혈탑 중앙대중앙도서관 앞에 세워진 의혈탑. 4.19혁명에 참여한 중앙대생들의 뜻을 담아 6명의 열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 의혈탑 중앙대중앙도서관 앞에 세워진 의혈탑. 4.19혁명에 참여한 중앙대생들의 뜻을 담아 6명의 열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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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혈탑' 옆에는 '6열사비'도 있다. '6열사비' 앞 추모석에는 '제46회 졸업생 일동' 명의로 아래와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꽃은 피어 지나 뿌리가 깊고 씨를 맺어
긴 겨울 지나 새싹 틔워 꽃무리 이루니 
여기 꽃다운 젊음을 조국과 민주의 제단에 바쳐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젊은 혼들이 있으니 
민족의 대지에 피와 살을 묻어 통일을 잉태케 하나니
우리는 이를 '義血'이라 부른다

  
<6열사비>와 <이내창열사비> 중앙대중앙도서관 앞에는 4.19혁명 당시 희생된 6명의 열사와 1989년 의문의 죽음을 당한 이내창 열사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 <6열사비>와 <이내창열사비> 중앙대중앙도서관 앞에는 4.19혁명 당시 희생된 6명의 열사와 1989년 의문의 죽음을 당한 이내창 열사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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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중앙대생들은 역사의 중요한 순간마다 학생들의 민주화 열망을 담아 학생운동에 나서고 한강을 건너 시내로 진출한다.

6.3한일회담 반대운동(1964~1965), 6.8부정선거 규탄투쟁(1967), 삼선개헌 반대투쟁(1969), 교련교육 반대운동(1971), 반유신 투쟁(1973~), 1980년 '민주화의 봄'과 이어진 광주학살 진상규명투쟁, 6월 민주항쟁(1987)으로 이어진 민주화운동의 역사에는 늘 중앙대생들이 그 중심에 있었다.    

2015년 민중총궐기 대회에서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사경을 헤매다 2016년에 끝내 사망한 백남기 농민도 중앙대 출신이다. 백남기 농민은 중앙대 부총학생회장 시절이던 1980년 5월 14일 송기원 등과 더불어 중앙대생들이 유신잔당과 전두환 신군부세력의 몰락을 상징하는 상여를 메고 교정을 출발하여 한강을 건너 서울역 앞에 집결한 후 메고 간 상여 화형식을 주도적으로 벌인 인물이기도 하다. 망월동 묘지(구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제12회 박종철인권상 수여식 장면 중앙대 출신 백남기 농민은 2016년 제12회 박종철인권상을 수상하였다. 사진은 백기완 선생과 사경을 혜매고 있는 백남기 농민을 대신해 수상한 따님 백도라지 씨.
▲ 제12회 박종철인권상 수여식 장면 중앙대 출신 백남기 농민은 2016년 제12회 박종철인권상을 수상하였다. 사진은 백기완 선생과 사경을 혜매고 있는 백남기 농민을 대신해 수상한 따님 백도라지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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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투쟁에 나선 중앙대생들

중앙도서관 앞 '의혈탑' 옆에는 '광주민중항쟁기념비'도 있다. 중앙대생들이 5·18광주민중항쟁을 얼마나 중요시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기념비다. 사실 1980년대의 학생운동은 80년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운동이기도 했다. 이때 중앙대생들도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한 투쟁의 전면에 나선다.

학내에 사복경찰이 진주하고 있던 시절이던 1983년까지 중앙대생들의 시위는 주로 중앙도서관에서 유인물을 배포하고 밧줄을 타고 내려오며 시위를 벌이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1981년 3월 23일에는 중앙대생 박문수, 김증래가 도서관 3층 열람실에서 유인물 배포하며 시위를 주도했고, 같은 해 5월 7일에는 박영관과 이상이 같은 방식으로 시위를 주도했다. 1982년 9월 9일에는 이근원과 임재선이 도서관 4층에서 <학우에게 보내는 글>을 배포하고 밧줄시위를 벌였고, 같은 해 11월 3일에는 김연명이 교내시위를 이끌었다. 1983년에도 마찬가지였다. 5월 25일과 6월 1일, 10월 6일과 10월 27일에 연이어 교내시위가 벌어졌다. 이들 시위는 모두 1980년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한 시위였다.

1984년부터는 시위의 양상이 바뀌었다. 1983년 12월 전두환 군사정권이 발표한 '학원자율화 조치'에 따라 교내에 상주하던 사복경찰이 나가면서 학내에서는 이제 대중 집회와 시위가 가능해졌다. 이제 중앙대생들은 '루이스가든'에 모여 집회를 한 후 교문을 막고 있는 경찰에 맞서 투석전도 벌이며 시위를 벌일 수 있게 됐다. 

이때 중앙대생들은 '광주학살 진상규명과 학살원흉 처단' 등을 요구하면서 시위를 벌였고, 다른 대학 학생들과 함께 시내에서 기습 가두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중앙대총학생회장 이내창의 죽음, 그 진실은 아직도 규명되지 않고

'6열사비' 옆에는 또 하나의 비가 나란히 서 있다. 바로 '이내창열사비'다. 이내창은 1989년 당시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 총학생회장이었다. 그해 8월 15일에 남해안에 있는 섬 거문도 해변에서 변사체로 발견돼 충격을 주었다.

그해 봄 안기부는 걸개그림 <민족해방운동사>를 빌미삼아 그림을 그린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선배 차일환과 화가 홍성담을 북한의 간첩으로 조작하려고 한 일이 있었다. 그때 공안당국은 차일환을 심문하면서 중앙대학교 총학생회가 그 자금을 댄 경위도 수사했다. 안성캠퍼스 총학생회장이었던 이내창은 정권의 집중 감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사망 전날인 14일 학교에서 나중에 안기부 직원으로 밝혀지는 젊은 여성과 남성이 이내창과 심각하게 얘기를 나누는 게 목격되기도 했다. 사건 당일 15일 오전에는 이내창이 여수 여객터미널에서 이들 2명과 함께 있는 것이 목격되기도 했다. 이내창은 바로 그날 오후에 거문도의 한적한 해변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됐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구성돼 활동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는 이내창의 죽음의 진실을 규명하지 못했다.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조만간 출범하면 반드시 규명해야 할 의문사 사건이다.

이렇게 '동작민주올레 - 흑석길'의 중앙대 탐방을 마친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학규는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공동대표 겸 소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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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정치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