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1991, 봄>의 권경원 감독  다큐멘터리 <1991, 봄>의 권경원 감독

▲ 다큐멘터리 <1991, 봄>의 권경원 감독 다큐멘터리 <1991, 봄>의 권경원 감독 ⓒ 이정민

 
인터뷰를 하러 온 기자가 1991년생임을 알리자 91학번인 권경원 감독은 반색했다.

"1991년생 분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보셨을지 정말 듣고 싶다. 내가 1972년생인데 정작 나는 유신에 대한 감각이 없다. 내게는 1991년이 아직 생생한데 기자에게는 마치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 같은 거 아닌가."

권경원 감독은 1991년생인 아이돌 레드벨벳의 아이린을 언급하며 '1991년에 태어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가늠하고 있었다. 권경원 감독이 유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기자 역시 1991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알지 못 한다. 권경원 감독은 1991년 4월 29일 등록금 시위에 나선 강경대씨가 전경들의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한 날, 자신이 다니던 대학 후문에서 전경에게 린치를 당했다고 기억한다. 하굣길이었다.

"전경 두 명이 내게 어제 시위 현장에 있지 않았냐면서 때렸다. 그저 '내게 분풀이를 하는구나' 싶었다. 위협을 느꼈고 이렇게 맞다가 다치겠다 생각했다. 그날, 죽은 강경대의 사진을 보았다. 나랑 비슷하게 생겼더라. 1991년은 신입생이라면 막연하게 혼란스럽고 분노하게 되는 시절이었다. 세상이 변한다 어쩐다 그랬지만 정작 중요한 걸 챙기지 않는 시기였다. (1987년의) 광장이 펼쳐졌는데 정작 사람들을 밀실에 가두었던, 질식할 것 같은 시기 말이다."

사상 최초로 '분신 정국' 말한 영화  
 
 영화 < 1991, 봄 > 스틸 사진

영화 < 1991, 봄 > 스틸 사진 ⓒ 필앤플랜

 
 영화 < 1991, 봄 > 스틸 사진

영화 < 1991, 봄 > 스틸 사진 ⓒ 필앤플랜

  
지난 18일 영화 < 1991, 봄 >의 언론 시사를 마친 바로 다음날 권 감독을 만났다. 자연스럽게 1991년 봄 무렵의 이야기가 먼저 나왔다. 고 강경대 열사의 죽음 이후 1991년 5월까지 9명이 국가에 저항하며 분신했다. 1991년 5월 8일에는 전국민족민주연합(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씨가 몸에 시너를 뿌린 뒤 투신했다. 김기설씨의 죽음의 배후로 27살의 강기훈씨가 지목된다. '강기훈 유서 대필 조작 사건'의 시작이다. (관련 기사: 1991년 '분신정국' 최초로 다룬 영화... 강기훈은 말했다) 24년이 흐른 뒤인 2015년이 돼서야 51살의 강기훈씨는 최종 무죄를 선고받는다.

권경원 감독이 다룬 '분신 정국'의 1991년은 아직 한국 영화 사상 다루어진 적 없는 시기이기도 하다. 권 감독은 이를 두고 "서로 이야기를 꺼리는 주제일 것"이라고 말했다.
 
- 역사로 불리기에는 이른 과거라 영화로 제작하기 힘들었던 건 아닌가.
"그렇기도 하지만 (6월 항쟁이 있었던) 1987년과 고작 4년차가 나는데 1987년에 비하면 1991년은 언급조차 안 되고 있다. 1991년에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패배감과 좌절감, 혼란 이런 것들로 점철돼 있었다. 다들 인터뷰도 꺼렸다. 꽤 오랜 시간 걸려서 한 분 한 분 만나 설득하는 과정을 거쳤다."

- 하긴 얼마 전 영화 < 1987 >이 제작되기도 했고 2016년부터 시작된 '촛불혁명'도 상업 영화 속에서 은유적으로 많이 쓰이는 걸 보면 단순히 이른 과거라 영화로 제작되기 어려운 건 아닌 듯하다.
"더더욱 나는 1987년과 2017년의 연관성이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1987년이 대표적으로 광장이 만들어진 해인데 거기 모인 사람들의 조직력이 쌓여 민주적인 역량이 축적된다. 1991년은 1987년에 모인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운동의 주체로 성장한 때이다. 그때는 '100만 학우'라는 말을 해도 되는 시기였다.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1987년 8월 결성)이 한 번 집회를 하면 학생들이 10만 대로 모였으니까. 그런데 이들이 마치 한 번에 청소를 당하듯 했던 것이다. 하다 못해 그 시대에 대한 예민한 성찰, 가장 기초적인 자료적 성찰도 쓰여있지 않다. < 1991, 봄 >의 예고편조차도 영화의 감정을 전달하기보다 시대가 어땠는지, 사건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데 머무르게 된다."
 
다큐멘터리 <1991, 봄>의 권경원 감독  다큐멘터리 <1991, 봄>의 권경원 감독

▲ 다큐멘터리 <1991, 봄>의 권경원 감독 다큐멘터리 <1991, 봄>의 권경원 감독 ⓒ 이정민

 
다큐멘터리 <1991, 봄>의 권경원 감독  다큐멘터리 <1991, 봄>의 권경원 감독

▲ 다큐멘터리 <1991, 봄>의 권경원 감독 다큐멘터리 <1991, 봄>의 권경원 감독 ⓒ 이정민

 
- < 1991, 봄 >이 소위 '분신 정국'을 모르는 나 같은 세대에게도 친절하게 설명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감독도 언론 시사 당시 10대나 20대들도 이 영화를 많이 봤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고.
"여러 장치들이 있다. 이 영화는 단순히 '그 시절이 분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만든 영화는 아니다. 최소한의 설명들이 영화 초반 집중적으로 이뤄진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내레이션과 자막, 도표, CG 등이 들어간다. 공유해야 할 정보가 많은 다큐멘터리에는 친절한 설명이 필요하다. 다만 어느 정도의 거리감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동영상보다 스틸 사진을 더 많이 썼다. 인형극도 마찬가지다. 강기훈 유서 대필 조작사건을 모르는 사람들이 효과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장치가 뭘까 고민하다가 인형극을 선택했다."

- 영화의 소재는 굉장히 뜨겁다. 그런데 대의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영화 < 1991, 봄 > 자체는 그리 뜨겁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다.
"우선 '열사'라는 단어를 최대한 배제했다. 그 당시 돌아가신 분이 영화 속에 나온 11분 빼고 더 계신다. 계속 분신이 이어졌다. 다친 분들도 많다. 누군 열사라 호칭하고 누군 아니고의 문제도 있지만, 열사라 호칭했을 때 쓸데없이 불거지는 논쟁이 마음에 걸렸다. 그 분들의 죽음, 희생만 두고 보자는 것이다. 열사라는 이름을 붙여서 정치적 입장에 가두려는 시도와 열사니까 보편적 인간으로부터 떨어트려 신화하려는 시도 모두 나쁘다. 둘 다 죽음의 기억을 쉽게 잊어버리는 태도로 보았다. 보편적으로 보기 위해서 그 말을 최대한 안 쓰려고 노력했다.

어디에나 커다란 모순들이 해결되지 않고 고여있을 때 희생이 일어나고 연약한 부분들이 터지기 마련이다. 그 징후를 막지 못했다는 것이 중요하지 그 죽음을 개인적인 선택으로 몰아붙이는 건 미성숙한 인식이다. 아직도 그 죽음이 개인적이냐 사회적이냐는 논쟁이 있고 27년이 지나도록 논쟁을 거쳐야 한다는 건 이 시대에 대한 해석이 부재했다는 것이다. 젊은 분들에게 그 정도의 거리감에서 이 죽음들이 어떻게 보이십니까, 사회적으로 어떻게 남겨야 할까, 헛된 죽음일까, 이런 질문을 해봐야할 때가 아닌가 싶다."

"1991년은 거대한 노래방 같은 해"

- 1991년이 대학교 신입생이던 권 감독에게는 어떤 해인가. 제작 노트에서는 '대학교 1학년 때 목격한 유서대필 조작 사건의 기억이 서른 살 넘어까지 트라우마로 남았다'는 말을 했다. 그 트라우마가 뭔가.
"제작 노트에도 밝혔듯 내게 1991년은 거대한 노래방 같은 해다. 재미있는 데 놀러 가자고 해놓고 어두운 방에 들어가서 서로의 얼굴보다 노래방 책과 화면을 더 많이 보게 되는 해. 신입생으로 설렘을 갖고 대학에 들어갔는데 세상은 예상을 뛰어넘는 곳이더라. 해결되지 않은 것들이 너무 많고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패배자들 같은 기분. 실제로 노래방 기계가 한국에 최초로 들어온 것이 1991년 여름이라더라. (웃음)

트라우마와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고 강경대님의 죽음 이후로 이뤄진 연쇄적인 분신들에는 반드시 이전의 죽음이 연결돼 있다. 5월 22일에 전남대병원 영안실 옥상에서 투신한 정상순 열사의 유서를 보면 '철수야, 철수야 이 못난 선배를 용서해다오'(관련 기사: "철수야, 철수야 이 못난 선배를 용서해다오")라는 말이 나와있다.

사람들이 제정신일 수가 없는 것이다. 당시 시위 현장에 나갔던 사람들이 당사자적인 트라우마를 겪는 것이다. 죽음 근처에서 살아남은 사람들도 국가 폭력의 피해자들이다. 그런데 오히려 '죽음의 배후가 있다'면서 피해자들을 샅샅이 가두고 이 혼란의 책임을 죽은 사람들에게 전가했다. '87년 운동권은 순수했는데' 그러면서 부정의한 국가에 저항하는 사람들에게서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완전히 빼앗아갔다. 군사 독재 정부를 엎어버렸는데, 더한 사람들이 왔단 말이다. 말이 길어졌는데, 내 요점은 그것이다. 잘못된, 해결되지 않은 죽음들이 방치되거나 곡해되고 있다."
 
 영화 < 1991, 봄 > 스틸 사진

영화 < 1991, 봄 > 스틸 사진 ⓒ 필앤플랜


- 영화 <1991, 봄>은 11명의 죽음을 다루는 과정에서 강기훈씨의 기타 연주를 배경 음악으로 삽입한다. 죽음들이 방치되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죽은 이들을 추모하는 방식으로 강기훈씨의 기타연주를 삽입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영화 속에 나오는 강기훈 선배(권 감독은 줄곧 강기훈씨를 선배라 불렀다-기자 말)의 연주에는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나는 죽은 사람들을 추모하는 연주라 읽었다. 애도의 마음이 단단히 쌓인 연주라고 말이다. 강기훈 선배의 기타 연주 곡목을 보면 '아멜리아의 유서', '눈물', '망각', '이별의 전주곡', '사라방드' 이렇다. 다큐멘터리 영화가 객관적인 사실을 다루는 것 같지만 사실 편집의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작가의 해석에 가깝다. 애도하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를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게다가 이 영화는 2014년 4월 세월호가 가라앉을 때 제작을 결심한 영화이기도 하다. 4월 17일에 강기훈 선배의 두 번째 기타 연주회가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날이 강기훈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겠다는 결심하고 난 뒤 첫 촬영이었다. 사회적으로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기억해야 하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영화 속에 세월호 참사를 담은 건 사건이 1991년을 지나 현재에까지 가닿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서 한 사회의 수준이 보인다. 죽음을 혐오하고 조롱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을 떠나보내는 과정이 아름다우면 산 사람도 위로를 받는다. 사실 그게 진짜인데." 
 
다큐멘터리 <1991, 봄>의 권경원 감독  다큐멘터리 <1991, 봄>의 권경원 감독

▲ 다큐멘터리 <1991, 봄>의 권경원 감독 다큐멘터리 <1991, 봄>의 권경원 감독 ⓒ 이정민

 
- 이 영화는 강기훈씨가 주로 출연하지만 몇몇 대화를 제외하고는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강기훈의 기타 연주만 음악으로 삽입된다. 처음 촬영 들어갈 때부터 의도했던 건가.
"강기훈 선배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그의 연주가 대단히 전문적이라 해석할 의미가 있다는 그런 뜻이 아니다. 강기훈 선배는 원치 않은 관심과 혐오, 의혹 자체가 삶인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겠다고 하는데 심정이 어떻겠나(원래 권 감독은 1991년의 이야기를 극영화로 준비하던 중 강기훈을 만나게 돼 강기훈을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로 영화의 방향을 바꾸었다 - 기자 말).

이 영화에서는 나와 강기훈 선배와의 거리가 가장 중요했다. 나는 영화의 감성들을 강기훈 선배의 연주에 의존해도 관객들이 이를 읽어낼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다름 아닌 내가 그렇게 읽으니까 말이다. 음악에는 그런 힘이 있다. 사실 <1991, 봄>의 최초의 제목은 '강기훈의 선곡'이었다."

- 제목이 4번 바뀌었다. <강기훈의 선곡>에서 다음 스토리펀딩을 진행할 때는 <강기훈 말고 강기타> 그리고 부산영화제에서 관객들에게 선보일 때는 <국가에 대한 예의> 개봉판은 < 1991, 봄 >으로 말이다.
"처음에는 강기훈이라는 이름이 1991년을 불러낼 수 있는 가장 큰 매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강기훈이라는 이름 자체를 모르더라. 그래서 1991년생과 그 세대들이 이 이야기를 많이 봐주셨으면 좋겠다. 해치지 않는다고. (웃음) 또 강기훈 선배가 사람들 입에서 이러쿵 저러쿵 오르내리는 게 싫었다. 그 다음에는 가해자의 이름을 영화 제목으로 써볼까 싶어서 '국가에 대한 예의'를 사용했다. 그러다가 더 고민을 해서 '1991, 봄'으로 선택하게 됐다. 사실 후원자 분들에게 너무 창피하다. 계속 제목이 바뀌니까."

- 의도치 않은 홍보 효과가 있을 수도 있다.
"이 몸부림이 홍보 효과로 비쳤으면 좋겠는데 '그만 좀 제목으로 낚시하라'는 댓글도 있더라. 내가 처절하니까 그렇다. 그렇지만 한 번도 '이런 제목을 쓰면 사람들이 영화를 더 볼까'라는 관점을 지닌 적은 없었다. 단지 이 영화의 본질을 잘 드러낼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면서 찾아낸 제목이다. 영화의 후원자들이 계시다 보니 < 1991, 봄 >이 나 혼자만의 영화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대신 만든다고 생각하고 만들어주십시오' 이런 메시지를 받는데 정말 대신 만든다고 생각하고 만들었다."
 
 영화 < 1991, 봄 > 스틸 사진

유서 대필 조작 사건의 피해자 강기훈씨 ⓒ 필앤플랜

 
- 강기훈씨는 언론 시사 당일 서울에 있었지만 시사회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 영화 안 본다고 하셨다. 이 영화를 강기훈씨에게 보라고 하는 건 피해자에게 네 피해 과정을 영상으로 보라는 이야기와 똑같다. 분신한 전남대 학생 고 박승희님을 직접 옆에서 간호한 분을 인터뷰했다. 전남대 교지 선후배 사이라고 하는데 그 분도 그 일 때문에 자기 고향인 광주에 돌아가지 못하신다. 고향이자 자기 학교가 있는 그쪽으로 아예 발길을 하지 않으신다. 그래도 강기훈 선배가 영화 만들어줘서 고맙다는 말은 하셨다. 내 두 번째 영화는 보겠다고 하셨다. 그 말이 좋더라."

- 2011년 강기훈씨를 만나고 나서 7년이 지났다. 영화 촬영도 편집도 오래 걸렸다. 그동안 권경원 감독 안에서 강기훈씨에 대한 이미지가 바뀐 것이 있나.
"그간 강기훈 선배에게 너무 많은 변화가 있었다. 처음 2011년 극영화를 찍겠다면서 만났을 때는 직장인이었는데 뭔가 남다른 직장인이라고 생각했다. 2012년에 간암에 걸리고도 사람에 대한 배려는 정말 그대로이고 사건에 대해서는 여전히 예민하고 하나하나를 다 기억하신다. 강기훈 선배의 최후진술서를 보면 '기억 나는 다섯 장면을 말씀드리겠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때 누가 어떻게 했고 뭐가 어떻게 됐고 그런 것들이 다 들어가있다. 자기 몸에 위기가 왔는데도 티를 잘 내지 않는다. 그것들과 싸우는데 많이 힘들까 싶은데도 철저하게 숨긴다. 강기훈 선배는 그런 사람이다. 자기 삶을 한 번도 툭 놔버리지 않은 사람."

- 엔딩곡에 비틀즈의 록 음악이 쓰였다. 영화 전체에 쓰였던 강기훈씨의 기타 곡과는 대조적이다. 다만 그 비틀즈 노래의 가사가 영화 전체의 주제와 잘 맞더라.
"그렇게 봐주시니 다행이다. 처음 록 음악이 퉁겨나오는 게 이 영화의 분위기랑 맞냐는 이야기가 있었다. 엔딩에서 관객들이 눈물을 흘릴 가능성이 많은데 이 영화는 제발 좀 슬퍼하라고 만든 영화가 아니다. 아마 강기훈 선배에 대한 미안함을 가진 분들이 이 영화를 처음 와서 봐주실 텐데 조금이라도 위로받으셨으면 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지개하는 듯한 음악을 넣었다. 내가 원래 좋아하는 노래다."

- 영화 속에서 인터뷰어들의 눈가가 젖어있으면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기억하기 싫은 현실을 복기할 때는 되도록 우는 과정을 모두 빼야 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눈물을 흘리게끔) 유도하거나 의도한 적이 없다. 인터뷰를 하면서 기억을 더듬다보면 다 터지는 부분들이 있다. 특히 강기훈 선배의 기타 연주를 생각하면서 많이들 우시더라. 울기 때문에 촬영을 중단한 적도 있었다. 울다가 붉어진 눈으로 인터뷰를 하기도 하고 눈물이 고인 채로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공통적인 것은 이 분들 모두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쓰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셨다. 보여주고 싶은 것이 눈물이 아닌 것이다. 27년이 지났음에도 그렇게 고인 슬픔이 있다는 게 가슴 아프다. 물론 울 수밖에 없는 이야기지만 절제하는 생존자의 힘이 좀 더 단단하게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경원 감독과 헤어지면서 다음 영화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 1991, 봄 >은 권경원 감독의 첫 번째 장편 연출 영화다. 권 감독은 "내가 영화를 만드는 게 다행인 거지 첫 장편 영화라는 개념은 내게 전혀 없다. 마지막 영화일 가능성이 높지"라면서 웃었다. 권경원 감독은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16기로, 1997년 영화 <넘버3>의 제작부로 처음 영화 일을 시작했다.

그는 촬영을 시작한 2014년 이후 "4년 내내 이 영화만을 바라봤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인터뷰 하나하나가 절실하다"고도 했다.

"내가 너무 절실해 보이나? 절실한 사람이랑 하는 인터뷰가 기자들에게 제일 나쁘다던데." 

영화 <1991, 봄>은 31일 개봉한다.
 
다큐멘터리 <1991, 봄>의 권경원 감독  다큐멘터리 <1991, 봄>의 권경원 감독

▲ 다큐멘터리 <1991, 봄>의 권경원 감독 다큐멘터리 <1991, 봄>의 권경원 감독 ⓒ 이정민

  
1991 봄 분신 정국 강기훈 국가에 대한 예의 권경원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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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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