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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여운택씨. 대법원 최종 승소 소식을 듣지 못하고 2013년 12월 사망했다.
 고 여운택씨. 대법원 최종 승소 소식을 듣지 못하고 2013년 12월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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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이 30일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기업 신일본주금(구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최종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준 가운데, 승소의 기쁨을 함께 듣지 못한 피해자들이 있어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지난 2013년 12월 사망한 원고 여운택(1923년생)씨가 바로 그 비운의 주인공이다..

여씨가 고향인 충남 논산을 떠나 평양에 발을 디딘 건 17살 때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가까이 있는 삼촌마저 살림이 풍족하지 못해, 어느 한 곳 의지할 데가 없었다. 고향에서 한 일본인 가게의 점원으로 일하고 있던 도중, 하루는 평양근처 탄광에서 직원을 모집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공작소에서 일하면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것. 500리가 넘는 머나 먼 길이었지만 마다할 처지가 아니었다.

"탄광 기숙사에 가서 보니 거짓말이었죠. 사람 얼굴이 아니라 꼭 귀신덩어리 같았죠. 물이 없어서 그런지 꼭 시커먼 숯 덩이리에요."

체구가 큰 사람들부터 차례로 막장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처음 얘기와는 다르지 않느냐"며 "못 간다"고 완강히 버텼다. 나이도 어린데다 유난히 왜소한 체구 탓일까.

"그래. 아직 공부나 할 아이지, 너는 아직 탄 캘 나이가 아니다".

더 할 말이 없던지 노무과장도 결국 수긍했다. 그렇게 해서 채탄작업을 하는 대신 쇠를 녹여 기계를 만드는 일에 배치됐다. 이렇게 평양에 3년여를 있었다.

"하루는 신문을 보니 일본제철 대판(大阪. 오사카) 제철소에서 직원을 모집한다는 광고가 실렸어요. 100명을 모집하는데 2년간 와서 기술을 습득하면 자격증을 주고, 사택도 제공하고, 일본인과 똑같이 월급도 준다는 거예요. 거기에다 2년이 지나 조선에 나오면 일본제철 사업장이 있는 회사에 기사로 편입까지 시켜준다니 누가 마다해요. 당장 가려고 하지."

그의 나이 스무 살 때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평양에서부터였다. 공장 직원을 모집한다는데, 이상하게도 군복을 주고 1주일여 간 군인과 같이 제식훈련을 시켰다. 그 속사정은 일본에 도착해서야 알았다. 1943년 9월 10일이었다.

"강도 같은 게 일본이야. 가보니 앞가슴에 징용장을 붙여주더라고. 자유라고는 일절 없고, 순전 노예나 다름없어. 기숙사에 집어넣더니 밥 먹을 때도, 잠잘 때도, 군대식 점호를 하고. 만약 눈에 거슬리는 사람이나 잘못한 일이 있으면 그날은 아주 죽어. 본인이 잘못했다고 기어나올 때까지 저녁 내내 잠을 안 재우고 곤봉으로 때리고…."
 
 일본 외무성을 상대로 제기한 한일회담 문서 공개 소송 재판이 끝난 뒤 도쿄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피해 사실을 주장하고 있는 여운택씨.
 일본 외무성을 상대로 제기한 한일회담 문서 공개 소송 재판이 끝난 뒤 도쿄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피해 사실을 주장하고 있는 여운택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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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일본제철은 여씨가 도착하기 한해 전인 1942년 충북 청주에서 1기로 100명, 1943년 2기 평양지역 100명, 1944년 3기 강원도 지역에서 100명의 노무자들을 차례로 제철소로 끌고왔다. 처음엔 모집이라는 형식이라도 취했지만 전쟁 막바지인 1944년엔 사실상 강제연행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석 달 동안의 견습 과정을 거쳐 1000℃가 넘는 뜨거운 용광로를 옆에 두고 기중기를 조작하는 일을 맡았다. 고된 일이었다.

"'내가 왜 왔나'하고 한탄하고 통곡해도 소용없었지. 1000℃가 넘어야 쇠가 녹는데, 뜨거운 열에 작업은 고되지, 잠은 못 자지, 먹는 것은 양도 안 차지…. 고생고생 말도 못해."

그 뿐이 아니었다. 노무자들에 대한 감시도 삼엄했다. 그러나 다른 방도가 없었다.

"따질 입장이 안 되지. 그렇게 따져봐야 매 밖에 돌아온 건 없어. 도망간 사람 한 두 명 있었는데, 잡히면 그냥 죽어. 그러니까 아예 도망갈 생각을 안 하지. 잡히면 반은 죽어야 되니까."

월급이 없진 않았다. 그러나 명목상이었다.

"30일 한 달 되면 월급이라고 손에 쥐여주는 게 아니야. 지도원이나 감독 네댓 사람이 숙소로 와서 얼마인지도 모르고 월급봉투만 보여줘. 고향에 본인이 부양하지 않으면 안 될 가족이 있는 경우는 그래도 몇 푼 부쳐준 것 같은데, 독신은 담배 값이나 할 정도 용돈만 주고 강제로 저금을 시켰지."

그마저도 밥값이다 뭐다 이런저런 명목으로 절반에 가까운 돈은 처음부터 공제한 금액이었다.

1945년 들어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미군 B-29 폭격기의 출몰이 시작되더니, 급기야 1945년 6월경 폭격에 의해 회사가 거의 전소하다시피 한 것이다. 연합군 입장에서 제철소는 가장 먼저 무력화시켜야 할 제1의 타격 목표였다.

"회사가 홀랑 다 타버렸어. 더 일 할 상황이 못 되자 우리들을 청진으로 다시 보내더라고. 청진에도 일본제철소가 있었으니까. 그러다 몇 달 후 해방 직전 소련군이 포를 쏘고 상륙하더라고. 돈 한 푼 못 받고 뿔뿔이 헤어져 산을 타고 걸어 걸어서 서울까지 왔지."

공습 부상자에 마취도 없이 톱으로 다리 절단
 
 외교부 앞에서 일제 피해자들과 함께 기자회견을 갖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여운택씨. 2010년 1월
 외교부 앞에서 일제 피해자들과 함께 기자회견을 갖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여운택씨.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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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제철에서의 끔찍했던 기억은 지금도 뚜렷하다. 2살 남짓 나이 어린 평양 출신 류대근이라는 사람이었다. 일본말로 야나기 다이콩이었는데, 상냥하고 민첩했다. 현장 지도원은 이 친구를 굉장히 아껴 회사와 기숙사를 오가는 연락병 역할을 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심부름을 하다가 B-29에서 퍼붓는 육각탄에 허벅지를 맞아 다리가 온통 박살이 나버렸지. 그때는 전기가 어디 있나? 병원에 갔더니 촛불을 켜놓고 있더라고. 병원에서는 목숨을 구하려면 하는 수 없이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는데, 세상에 위아래 손발을 묶어 마취도 않고 쇠톱으로 다리를 썰더라고. '어머니, 아버지' 부르며 차라리 자기를 죽여달라고 통곡하는데, 차마 못 보겠더라. 나도 같이 엄청 울었지."

그러나 결국 그는 그 이튿날 사망하고 말았다. 시신은 곧바로 화장터로 보내졌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류씨의 행방을 알게 된 것은 1997년 무렵이었다. 뒤늦게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하던 중 일본을 방문할 때였는데, 어느 절에서 2차 대전 때 죽은 조선인들을 화장한 유골을 보관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것.

"소송 도중에 신일본제철을 찾아가 당시 같은 동료 중에 이렇게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있다고 호소해도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제철은 아예 모른 체 하더라고. 그러다가 당시 화장했던 절을 찾아 갔더니 그곳에서야 명단이 있더라고…"

2004년 연금탈퇴 수당금 신청하자 일본정부 316엔 지급
 
 여운택씨가 일본 후생노동성으로 받은 후생연금 탈퇴수당금 316엔.
 여운택씨가 일본 후생노동성으로 받은 후생연금 탈퇴수당금 316엔.
ⓒ 이국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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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의 재판은 2003년 10월 최고재판소 기각으로 최종 패소했다. 오랜 재판으로 심신도 지칠 데로 지칠 무렵 또 한 번 억장이 무너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후생연금 내역을 조회한 뒤 그 탈퇴수당금을 신청했는데, 한 참 뒤인 2004년에서야 후생노동성에서 당시 액면가 그대로인 316엔을 보내온 것. 그동안의 물가 변동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해방 당시 액면가만 지급한 것이다.

"당시 큰 황소 한 마리가 52엔, 53엔 할 때였어. 316엔이면 소 6마리도 사고 남아. 그런데 받아보니 60년 전 당시 그 돈으로 보내온 거야. 세상에 이럴 수가 있어? 소 6마리 값이 다방 커피 한 잔 값도 안 돼 돌아왔는데,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느냐고?"

일본 패소에 굴하지 않고 2005년 2월에는 국내에서 두 번째로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여씨를 포함해 원고 4명이 소송에 나섰다. 구순의 나이였지만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한 발걸음에는 일본도 마다하지 않고 누구보다 앞장서 왔다.

일제피해자들이 2009년 1월부터 서울 강남구 대치동 미쓰비시중공업 한국사무소 앞에서 진행한 금요시위에도 단골 멤버였고, 대표적 청구권 수혜 기업 중 한 곳이자 신일본제철의 주주이기도 한 포스코 앞에서의 시위 현장에도 빠짐없이 참석해 왔다.

거듭 패소의 쓴 잔을 마셔야 했던 좌절의 시간 끝에 드디어 희소식이 들려왔다. 2012년 5월 24일 대법원에서 2심 결과를 뒤집고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주면서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낸 것이다. 이어 2013년 7월 10일 서울고등법원은 피고 신일본제철이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각각 1억 원씩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일본에서의 법정투쟁으로부터 장장 16년 만에 승소 소식을 듣게 된 여씨는 법정을 나서면서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

"하느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 은혜 꼭 잊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재판거래 농단에 여씨 등 원고 4명 중 3명은 사망
 
 서울 일본대사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마친 여운택 어르신이 일본대사관에 항의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자 경찰이 제지하고 있는 모습. 2009년 12월.
 서울 일본대사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마친 여운택 어르신이 일본대사관에 항의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자 경찰이 제지하고 있는 모습.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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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에서 이미 한번 다뤄진 사건인데다 대법원 판단에 따라 배상 판결이 난 사건이었다. 그러나 재상고 되더라도 쉽게 결론 날 것이라고 믿어왔던 대법원 판결은 어떤 일인지 차일피일 미뤄졌고, 안타깝게도 그해 12월 여씨는 사망하고 말았다. 향년 91세. 일본기업을 상대로 법정투쟁을 시작한 지 16년째, 국내소송만 8년째였다.

이어 서울고등법원 승소 소식까지 함께 들었던 원고 신천수, 박규수씨마저 차례로 숨지면서, 4명 원고 중 법정에서 승소 소식을 들은 유일한 원고는 이춘식(94.광주)씨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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