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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낙안읍성 민속마을의 가을. 돌담에 걸린 호박 넝쿨에 누렇게 익은 호박이 고향마을의 정취를 선사한다.
 순천 낙안읍성 민속마을의 가을. 돌담에 걸린 호박 넝쿨에 누렇게 익은 호박이 고향마을의 정취를 선사한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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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정지용의 시 '향수'가 떠오른다. 금세 이동원의 목소리로 들려온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김영랑의 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에 선율을 그린 동요도 절로 흥얼거려진다.
 
낙안읍성 민속마을의 골목. 옛 옷차림을 한 주민이 고샅을 걷고 있다.
 낙안읍성 민속마을의 골목. 옛 옷차림을 한 주민이 고샅을 걷고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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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 민속마으릐 초가와 골목 풍경. 가을날 오후의 햇살이 초가지붕에 비치고 있다.
 낙안읍성 민속마으릐 초가와 골목 풍경. 가을날 오후의 햇살이 초가지붕에 비치고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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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샅을 뉘엿뉘엿 하늘거린다. 돌담에 햇발이 속삭이고, 하늘에는 실비단이 떠다니는 10월의 어느 멋진 날이다. 옛 친구들이 생각난다. 고만고만한 어깨를 걸고 골목을 누비던 깨복쟁이 친구들이다. 담장 너머에서 누군가가 깨금발을 하고 나를 부를 것만 같다. '돈사마! 노올자.'

가을 한낮에 추억여행으로 이끄는 곳은 전남 순천 낙안읍성 민속마을이다. 민속촌처럼 부러 만들어놓은 마을이 아니다. 양반마을도 아니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았던,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는 초가 마을이다. 집도 다닥다닥 붙어 있다.

가난해서 불편했던 그때 그 시절의 풍경이다. 한없이 정겨운 그 시절의 일상이 살아있는 일기장처럼 눈앞에서 펼쳐진다. 집도, 사람도 모두 문화재급이다. 마을이 통째로 박물관 같다.
 
순천 낙안읍성 민속마을의 안과 바깥 풍경. 가운데 성곽을 따라 마을의 안과 밖이 구별된다.
 순천 낙안읍성 민속마을의 안과 바깥 풍경. 가운데 성곽을 따라 마을의 안과 밖이 구별된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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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의 성곽. 성곽의 돌 하나하나가 바위처럼 크다.
 낙안읍성의 성곽. 성곽의 돌 하나하나가 바위처럼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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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은 1397년(태조 6년) 이 고장 출신 김빈길 장군이 처음 쌓았다.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다. 1626년(인조 4년)에 낙안군수로 부임한 임경업 장군이 석성으로 고치고 넓혔다. 성곽의 길이 1410m, 높이는 4m 남짓 된다.

성 안에는 120여 세대 280여 명이 살고 있다. 집은 저마다 툇마루와 부엌, 토방을 갖추고 있다. 옛날에 고을을 찾아온 손님을 맞던 객사와 수령의 숙소였던 내아도 오롯하다. 행정과 송사를 다루던 관가도 있다. 옥사와 형틀도 복원돼 있다.

성곽을 싸목싸목 돌아보는 것도 흥미롭다. 성곽이 조금 높지만 길이 넓어 누구라도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다. 이순신 장군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장군이 심었다는 고목을 만나는 것도 행운이다.
 
낙안읍성 민속마을 풍경. 감이 주렁주렁 열린 고샅을 따라 마을의 훈장이 걸어가고 있다.
 낙안읍성 민속마을 풍경. 감이 주렁주렁 열린 고샅을 따라 마을의 훈장이 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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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 민속마을의 감나무. 가을햇살에 당도를 더해가는 감이 나무에 주렁주렁 걸려 있다.
 낙안읍성 민속마을의 감나무. 가을햇살에 당도를 더해가는 감이 나무에 주렁주렁 걸려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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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이 낙안읍성을 찾은 건 1597년 8월 9일(양력 9월 19일)이었다. 칠천량에서 와해된 조선수군을 재건하면서 보성으로 가는 길이었다. 낙안 백성들이 줄지어 반겼다. 마을의 원로들은 술독을 통째 갖고 와서 장군에게 올렸다. 이순신은 백성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당산나무에도 술 한 잔을 부어줬다. 백성들은 이 나무를 '장군목'이라 불렀다.

지금 장군목은 사라지고 없다. 읍성에 오래 산 나무가 여러 그루 있을 뿐이다. 그 가운데 푸조나무와 은행나무가 눈길을 끈다. 객사 뒤에 비스듬히 누운 푸조나무는 이순신 장군이 손수 심었다고 전해진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승리를 기원하며 심었다는 설이다. 1598년 광양만에서 조·명 연합군과 소서행장이 이끄는 일본군과의 전투를 앞두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승전을 기원하며 심었다는 설도 있다.

안내판에는 후자, 예교성(왜성) 전투를 앞두고 심었다는 얘기가 실려 있다. 이순신 장군은 예교성 전투에서 일본군 배 30척을 격파하고 11척을 나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낙안읍성에 있는 푸조나무.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이 직접 심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낙안읍성에 있는 푸조나무.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이 직접 심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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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 민속마을의 푸조나무와 성곽. 푸조나무는 이순신 장군이 직접 심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낙안읍성 민속마을의 푸조나무와 성곽. 푸조나무는 이순신 장군이 직접 심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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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조나무는 질곡의 역사를 묵묵히 견뎌왔다. 몇 해 전 불어 닥친 태풍 볼라벤에 한쪽 가지를 잃고, 남은 한쪽 가지로만 비스듬히 버티고 있다. 지금껏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한 처지를 대변한 듯하다. 최근에야 존재가 알려졌다. 나무 앞에 조그마한 설명판도 세웠다. 제목이 '이순신나무(푸조나무)'로 붙여져 있다.

관심도는 여전히 낮다. 조선수군을 재건하던 이순신 장군이 많은 군량미를 손에 넣은 곳이 조양창이다. 지금의 보성 고내마을이다. 설명판에는 '보양창고'로 적혀 있다. 감춰진 사료를 찾아내 알리지는 못할망정, 밝혀진 사실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난전에 있는 은행나무는 '은행나무신'으로 불린다. 임진왜란 때 낙안에서 좌수영으로 가던 이순신 장군이 이 나무 아래에서 마차의 바퀴를 고치고 길을 나섰다. 순천으로 가는 길의 큰 다리가 무너져 있었다. 이순신 장군이 낙안에서 마차의 바퀴를 고치지 않았더라면….

하지만 설득력은 없다. 나무의 나이가 그에 미치지 못한다. 설로 전해지는 얘기일 뿐이다. 그래도 솔깃하다.
 
낙안읍성 민속마을 풍경. 초가집과 어우러진 감나무 풍경이 한 폭의 그림 같다.
 낙안읍성 민속마을 풍경. 초가집과 어우러진 감나무 풍경이 한 폭의 그림 같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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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 민속마을 풍경. 초가 지붕 위에 열린 호박이 누렇게 익어가고 있다.
 낙안읍성 민속마을 풍경. 초가 지붕 위에 열린 호박이 누렇게 익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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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고샅을 따라, 성곽을 따라 솔방솔방 계속 걷는다. 성곽이 우람하다. 성문을 이루는 누각은 고풍스럽다. 켜켜이 쌓인 초가지붕도 정겹다. 빨랫줄에 걸린 이부자리가 가을햇살에 고슬고슬해진다. 마당에 말려놓은 고추도 여유를 선사한다. 토방과 마루에도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아 있다.

세월의 무게는 고샅 돌담에서도 묻어난다. 얼기설기 담쟁이 넝쿨이 어여쁘다. 호박도 누렇게 익어 단내를 머금고 있다. 돌담에 기대 선 고목도 모나지 않게 잘 어우러져 있다. 돌담 아래 남새밭에선 푸성귀가 파릇하다.

가족과 함께, 연인과 함께 두런두런 얘기 나누며 다시 걷고 싶은 고샅이다. 추억 속에 자리하고 있는 아련한 고향집 같다. 언제라도 마음속까지 편안해진다. 발길이 오래 머문다. 시간도 멈춰서 쉬어 간다.
 
순천 낙안읍성 민속마을의 초가집과 장독대. 발길이 오래 멈추고 시간도 잠시 쉬어가게 만든다.
 순천 낙안읍성 민속마을의 초가집과 장독대. 발길이 오래 멈추고 시간도 잠시 쉬어가게 만든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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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낙안읍성, #이순신나무, #민속마을, #정지용의 향수, #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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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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