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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하 전 한국기원 이사
 노영하 전 한국기원 이사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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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수정: 31일 오후 6시 30분]

한국 바둑계의 원로가 '내부 고발자'가 됐다.

지난 10월 1일 한국기원 기사게시판에 원고지 87매 분량의 공개서한이 올라왔다. 작성자는 한국기원의 52년차 원로기사 노영하 9단이다.

"제가 맡은 일에서 물러나게 되더라도 할 수 없습니다, (한국기원에)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라는 말로 시작된 공개서한에는 ▲집행부의 독단적 경영 ▲절차를 무시한 사업추진 - 배임과 횡령의 우려 ▲심각한 인권침해 ▲근로기준법 위반 ▲ 성차별 발언 ▲코세기 디아나 초단의 성폭행 폭로 사건 등 현 집행부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내용이 상세하게 담겨 있었다.

그는 이날 공개서한을 올리고는 한국기원 임원직 사직서를 제출했다.

67년에 입단한 노영하 9단은 2013년까지 KBS바둑왕전 해설을 했으며 이어 한국기원 이사, 운영위원 등의 중책을 맡아왔다.

지난 18일 한국기원 앞에서 그를 만났다. 이날은 한국기원 소속 프로기사들의 의결기구인 '기사 대의원회의'에서 한국기원 부총재와 사무총장에 대한 해임건의안이 이사회에 상정된 날이었다. 기사 대의원회의를 마치고 기자를 만난 그의 얼굴에는 조금 지친 기색이 묻어났다.

참고로 기사 대의원회의에서 지난 18일에 상정한 사무총장과 부총재에 대한 해임건의안은 29일 한국기원 임시기사총회에서 부총재 찬성 141표, 사무총장 찬성 124표로 통과됐다. 이에 최종 해임안이 기사회 명의로 한국기원 홍석현 총재에게 전달될 예정이다.

"전기도 안 들어오는 곳에 대기 발령자들 몰아넣어"

- 사직서까지 제출하면서 이 글을 쓴 이유가 무엇인가.
"한국기원 앞에 놓인 소송만 6개다. 바둑계에서는 기사들뿐만 아니라 바둑 팬까지 들고 일어섰다. 이런적은 기원 70년 역사상 처음이다. 한국기원이 이렇게까지 망가져가는 걸 잠자코 보고 있자니 도저히..."
 
한국기원 외관 사진
 한국기원 외관 사진
ⓒ 강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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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서한에 '심각한 인권침해'라는 말이 있다.
"작년 말 구조조정을 한다는 이유로 사무국 직원들을 대기발령 낸 일이 있었다. 이때 문제가 된 인권침해가 주 내용이다."

- 전기도 안 들어오는 곳에 대기 발령자들을 넣어놨다고.
"이들이 해직권고에 불응하니까 사무실 입구에 책상 4개를 덩그러니 놓더라. 전기도 끊어버렸다. 콘센트가 있었지만 빨간 실리콘을 발라 입구를 막아버렸다. 고의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게 한 거다. 전기가 없으니 노트북은 물론이요, 난방기구조차 사용할 수 없었다. 이들은 계속 멍하니 앉아 있어야만 했다. 이런 인권침해에 대기발령자 중 한 명이 참다못해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건 거다."

- 소송 결과는 나왔나. 
"대기발령자가 1심에서 승소했다. 당시 법원이 복직 판결을 내린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여전히 복직이 안 된 상태다."

- 승소했는데도 여전히?
"그래서 2차 소송을 건 거다. 그게 지금 걸려 있는 소송 건이다. 현 정부의 정규직화 추세에도 역행하는 모습 아닌가."
  
"헝가리 출신 바둑기사 성폭행 사건, 기원측 대처 미흡"

그는 이어 김성룡 9단 성폭행 사건을 언급했다. 지난 4월 17일 한국기원 프로기사 전용 게시판에 헝가리 출신 바둑기사 디아나 코세기(Koszegi Diana) 초단이 '2009년 6월 김성룡 9단에게 성폭행 당했다'는 내용의 글을 올린 것이 계기가 되어 한 차례 '바둑계 미투' 운동이 일었다. 폭로 이후 한국기원 이사회는 7월에 윤리위원회를 발족해 내부 조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조사가 끝난 후에도 잡음은 끊이지 않았다. 조사 과정에서 윤리위원회가 피해자에게 2차 가해성 질문을 한 것은 물론 피해자가 제출한 자료의 채택을 거부한 정황이 드러난 것.

이에 지난달 14일 프로바둑기사 223명은 윤리위원회 보고서가 잘못됐다며 해당 사건 재조사를 요구하는 내용의 성명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해당 성폭행 사건 또한 여전히 해결된 바가 없다.

- 디아나 초단 성폭행 폭로가 바둑계에서 처음 일어난 일은 아니었을 것 같다.
"그렇다. 하지만 당시(현 홍석현 총재 이전)에는 기원이 최소한의 징계를 하거나 어떻게 하겠다는 방침이라도 표명했다. 또는 가해자 본인이 스스로 은퇴하는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 되기도 했다. 이번 사건은 대처부터가 너무 미온적이었다. 가장 큰 잘못은 빨리 조처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국기원의 대표인 홍 총재가 소속 기사 문제와 관련해 최소한 어떻게 하겠다 정도는 밝혀야 했는데 그런 것이 없었다."

"'방송계 퇴물, 벗는 것만이 살아남는 길' 성희롱 발언도 버젓이"

"일부 인사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노영하 9단이 성명서를 올린 지 열흘이 지난 후(11일) 한국기원은 기자 간담회를 열어 위와 같이 말했다. 이어 '노영하 九단 공개서한에 대한 한국기원의 입장'이라는 제목의 반박문을 배포했다.
    
노영하 9단 공개서한에 대한 한국기원 측 반박문
 노영하 9단 공개서한에 대한 한국기원 측 반박문
ⓒ 강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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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반박문에 대해 묻자 그는 "예상했던 일"이라며 "더 말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성명문을 낸 지) 거의 2주가 돼서야 반박문이 나왔다. 내용은 전부 구체적인 반박 없이 '우리는 그런 적이 없다'는 식이다. 지적한 사안들에 대해서도 대부분 부인하기보다는 '추후에 해결했다'며 축소해서 답변하는 식이었다. 결국 스스로 그런 문제가 있었음을 인정하는 셈이다."

- 지적한 부분에 대해 '사실무근'이라 반박한 부분도 있던데.
"바둑 TV 여성 진행자들에게 한 성희롱 발언("너희들은 나이 먹어서 이미 방송계의 퇴물이다. 앞으로 벗는 것만이 살아남는 길이다"라고 말한 내용)에 그렇게 답한 것으로 알고 있다. 당사자들이 불이익을 받을 것을 감수하면서 직접 한 말인데 사실무근일 리가 있나. 물증이 없다고 그렇게 반박한 것 아니겠나."

"잘못된 점 있으면 상의하려는 태도라도 보여야"

 
노영하 전 한국기원 이사
 노영하 전 한국기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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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기원이 이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을 들자면? 
"모든 문제는 결국 '소통 단절'과 '독단적 운영' 때문이다. 집행부가 귀를 막고 독단으로 사업을 진행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한국기원 대주주인 '사이버오로'와의 사업 중단이다."

- 기원이 사이버오로와 한 계약을 원천무효 한다는 통보를 했다고 들었다.
"그렇다. 사이버오로는 20년이 넘도록 함께 사업을 이어나간 인터넷 회사이자 한국기원 지분을 20% 넘게 소유한 대주주다. 한국기원 권유로 사이버오로 지분을 소유한 프로기사들도 있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이사회에서 사이버오로와의 사업을 돌연 중단했다. 우리가 통보를 받았을 때는 이미 다른 인터넷 사업체와 계약을 맺은 상태였다."

- 홍석현 총재가 바둑계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다는 말도 했는데.
"과거에 중앙일보사에서 주최했던 기전(바둑경기)이 있었다. 가장 큰 기전이었지만, 현재는 폐지된 상태다. 홍 총재는 취임 후 총재사(중앙일보)가 주최하던 기전을 부활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 어떻게 다른 곳에 기전을 늘리라는 요구를 할 수 있겠나. 기전을 확충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으니 바둑에 대한 애정이 없다고 보는 거다."

- 오랫동안 기원에 몸 담았기에 공개서한을 올렸을 때 심경이 복잡했을 것 같다.
"마음이 좋았겠나. 어쨌든 치부를 드러낸 건데. 평생 직장이자 얼굴이었는데..."

- 소송도, 성폭행 사건도 해결된 게 없다. 공개서한도 이대로 묻히는 것 아닐까.
"그렇게 버틸 경우 더 큰 후폭풍이 일어날 것이다. 중요한 건 모두가 문제를 인지하고 있다는 거다. 팬들도 최소 11월까지 농성을 지속할 예정이라더라."

-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려면 기원이 어떻게 해야 하나.
"기사들의 의견을 최소한이라도 반영하고 기사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어야 한다. 잘못된 점이 있으면 상의하려는 태도라도 보여야 한다. 결국은 소통이다. 앞으로는 누가 대표로 들어오든 기원과 기사들 전체의 목소리를 듣고 수렴해서 방향을 결정하면 좋겠다. 지금의 홍석현 총재 또한 그래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

한편 한국기원 차영구 홍보팀장은 19일 기자와 한 통화에서 "한국기원 관련한 보도내용 중 상당 부분 왜곡된 부분이 많다"며 노영하 9단의 공개서한과 관련해서는 "더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이어 디아나 초단의 성폭행 사건에 대한 윤리보고서에 대해서도 "법적인 하자가 없는 범위 내에서 보고서를 재작성 하는 방향으로 논의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태그:#한국기원, #노영하, #바둑,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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