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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위령탑 1살 젖먹이, 4살 5살 어린이가 빨치산 내통자라는 이름으로 학살당했다.
▲ 추모위령탑 1살 젖먹이, 4살 5살 어린이가 빨치산 내통자라는 이름으로 학살당했다.
ⓒ 이명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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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먹이 아이를 품에 안은 젊은 엄마는 총탄에 쓰러지면서도 아기를 품에 안고 차마 눈을 감지 못한 채 쓰러졌다. 젊은 부녀자들을 끌어낸 군인들은 욕정을 채운 뒤 사살했다. 1951년 군인에 의해 무차별 집단 학살당한 거창군 신원면 이야기다. 거창군 신원면에서는 세 차례에 거쳐 공식집계 720명이 학살당했다.
  
총탄 바위 총탄 자국이 선명하다.
▲ 총탄 바위 총탄 자국이 선명하다.
ⓒ 이명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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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박산골 계곡에서는 총 517명이 집단 학살을 당했다. 박산골 총탄바위에는 지금도 총탄 자국이 무수히 남아있다.

11사단 9연대장 오익경은 1951년 '작전 명령 제 5호 견벽청야'라는 빨치산 소탕 작전을 기획한다. 견벽청야란 '성벽을 견고히 지키고, 들의 작물을 거두거나 가옥을 철거하여 쳐들어오는 적에게 양식이나 쉴 곳의 편의를 주지 않는다'는 뜻으로 우세한 적에 대한 작전 수단을 말하는 손자병법이다.

1951년 2월 5일 제 11사단 9연대 3대대(대대장 한동석)는 신원면 청연마을에 들이닥친다. 어린이와 부녀자, 노약자만 남아 있던 마을에서는 준비한 설음식을 군인들에게 대접해 돌려보냈다.

빨치산의 흔적이나 연계를 발견할 수 없었던 한동석은 그대로 돌아갔고 오익석에게 꾸지람을 들은 한동석은 2월 9일 다시 신원면 청연마을로 들어온다. 한동석은 청연마을 주민 모두를 빨치산과 내통했거나 내통할 위험이 있는 통비분자라며 전 가옥에 불을 지르고 84명의 주민을 눈 쌓인 들판으로 끌어내 총살한다. 84명이 숨졌고 기적처럼 6명의 어린이가 살아남았다.

1951년 2월 9일 1차 집단 학살
장소: 청연마을 앞 논들
인명피해 : 84명 사망
생존부상자 : 남자 2명(김은섭. 김은출) 여자 4명(정영자. 김미순. 김경순. 이시점)
주택 전소: 78동
가축피해: 소 27두


2차로 2월 10일 신원면 괴정리, 대현리, 중유리, 와룡리에 들이닥친 3대대는 마을을 방화하고 주민들을 끌어내어 신원초등학교로 연행하던 중 걸음이 느린 어린이와 노약자, 부녀자 100여 명을 근처 계곡으로 몰아넣고 사살한다.

1951년 2월 10일 2차 집단 학살
장소: 탄량골 계곡
인명피해 : 100여 명 사망
생존자: 1명(임분임)
중유리: 주택전소 196동 가축피해 소 60두
대현리: 주택전소 366동 가축피해 소 366두, 돼지 176두
와룡리:  주택전소 215동, 가축피해 소 67두, 돼지 29두


주민 1000여 명을 신원초등학교로 밀어 넣은 한동석과 대대원들은 젊은 부녀자들을 끌어내어 욕정을 채웠다. 군경가족을 골라낸 뒤 남은 인원을 2월 11일 박산골 계곡으로 데려가 집단 학살을 자행했다. 사망자들은 대부분 어린아이와 부녀자, 노약자였다. 3차 집단 학살이다.

1951년 2월 11일 3차 집단 학살
장소: 박산골 계곡 
인명피해: 517명 사망(연행 중 도로변 16명 사망)
생존자: 현장 남자 3명(문홍준. 신현덕 . 정방달)
과정리: 주택전소 109동. 가축피해 소 38두. 돼지 38두
청수리; 주책전소: 88동. 가축피해 소 2두
덕산리: 주택전소 2동, 가축피해 소 2두. 돼지 1두


 
역사 탐방에 함께 한 어린이가 설명문을 가리키고 있다.  517명이 총살당한 박산골 계곡 총탄 바위
▲ 역사 탐방에 함께 한 어린이가 설명문을 가리키고 있다.  517명이 총살당한 박산골 계곡 총탄 바위
ⓒ 이명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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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 인명을 위해 학살 후 시신을 불태우고 3년간 출입금지 구역으로 정해 완전 범죄를 획책하지만 1951년 거창 출신 신중목 의원에 의해 거창양민학살사건이 국회에서 폭로된다. 온갖 협박과 합동조사단 피습에도 불구하고 로이터통신 등을 통해 외국에 학살 사실이 알려지면서 조사가 시작된다.

1954년 박산골 유골 수습에 들어가 큰 뼈 남자, 중간 뼈 여자, 작은 뼈 어린이로 구분해 화장해 합동묘지를 만든다.

"1살, 4살, 5살 빨치산 무장 공비를 보신 적 있나요?"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묻고 싶은 말이다.

야만의 부끄러운 역사 현장에 유족의 손으로 세워진 위령비마저 '반공'을 국시로 삼은 박정희 정권에 의해 훼손을 당한다. 박산합동묘역 파괴 사건이다. 경남지사 최갑중은 개장명령서를 하달하고 비는 파괴하여 땅 속에 묻는다. 유골은 군경이 유족에게 강제 분배해 517기 묘는 완전히 파괴된다.

1967년 음력 8월 20일 파괴된 함동묘를 다시 수습해 남녀 묘소를 만들었다. 아이들 묘는 봉분을 만들지 않았다.
   
아이들 합동묘지 봉분조차 없이 학살당한 아이들 유골이 잠들어 있다.
▲ 아이들 합동묘지 봉분조차 없이 학살당한 아이들 유골이 잠들어 있다.
ⓒ 이명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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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동묘지는 길가에 남자들 묘지, 좀 작은 봉분의 여자들 묘지 그리고 봉분조차 없이 초라하게 묘지석 하나 달랑 세워진 아이들 묘지로 나뉘어 있다. 야만의 나라에 태어나 영문도 모른 채 죽임을 당했던 아이들은 봉분도 없이 쓸쓸하게 자리하고 있다.

 
  파괴한 자들 손으로 일으켜 세우길 요구하고 있지만 정부는 답이 없다.
  파괴한 자들 손으로 일으켜 세우길 요구하고 있지만 정부는 답이 없다.
ⓒ 이명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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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의 민긴인 학살을 끝까지 감추고 싶었던 박정희 쿠데타 정부는 위령비 비문을 정으로 쪼아 내용을 알 수없게 한 뒤 유족들 손으로 땅 속에 파묻게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민주화 이후 땅 속에서 다시 파낸 위령비를 파묻게 만든 자들 손으로 다시 세워달라는 유족의 요구에 정부는 여전히 대답이 없어 위령비는 현재도 쓰러진 상태로 놓여있다.

"국가여 응답하라! 국가여 사죄하라!"

 "베를린 학술제에 갔을 때 독일에서 일어난 야만적인 사건 이야기를 들었어요. 유대인 남자와 결혼한 독일 여성에게 강제 이혼을 종용하거나 함께 학살을 했대요. 억지로 아이들과 독일에 남겨진 여성들은 아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몸을 파는 일마저 했다고 하더군요. 한국에서 벌어진 찬상이 겹쳐지네요. 가족을 이념으로 나누고 아무런 죄없는 사람들이 희생되고요. 전쟁은 여성과 아이들, 노약자에게 가장 큰 피해를 준다는 점에서 절대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역사 탐방에 함께 한 이정아씨의 말이다. 

덧붙이는 글 | 흥사단 교육운동본부 청소년역사문화탐방동아리는~
새로운 백년의 주인이 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2019)을 준비하며 임시정부 경로를 따라 '청소년독립여행'을 다녀왔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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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