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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육 목사는 1965년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나 서울 배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지난 1984년 감리교신학대학을 입학, 1993년 감리교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1992년부터 2007년까지 그는 기독교대한감리회 중부연회에 소속되어 강화 교동에서 목회를 하던 중 전쟁과 학살이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고민하게 되었다. 지난 2007년 목회를 접고 그는 민간인학살을 체계적으로 조사하기 위해 국가기관인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으로 활동하면서 민간인학살의 참상에 대해 더욱 심층적으로 알게 되었다.

그러나 학살사건을 조사하는 중 희생자 유족들과 만나면서 그는 정신적 상처를 많이 입었고 결국 지난 2009년 그는 진실화해위를 떠났다. 그 후 목원대학교에서 민간인학살과 기독교의 관계를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어서 그는 사단법인 한반도통일역사문화연구소 사무국장으로 재직하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학살의 문화에 대한 어느 목회자의 수기>를 집필했다.

최근 <태안 민간인학살 백서>를 펴내며 기자와 인터뷰하는 중 그는 "저로서는 태안서산 사건이 아직도 버거운 사건 인 것 같습니다. 기자님께서 주신 질문에 답변을 하기 어려웠습니다. 질문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이 사건을 기억하면 우울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서 입니다"라며 자신의 무거운 심정을 담담하게 술회하기도 했다.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은 "이 책이 태안 지역에 오랫동안 응어리져 있는 이웃 간의 한과 반목을 풀고 서로를 보듬는 소망을 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라는 감회를 밝히기도 했다. 지난 10월 20일부터 29일까지 최 목사와 이 책에 관하여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하여 싣는다.
 
최태육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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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흩어진 시신을 수습하는 소년에게 이웃의 의미는?

- 먼저 <태안 민간인학살 백서>를 발간하게 된 취지는 무엇인가?
"어느 날 질문을 한 번 해 보았다. 논에서 김을 매던 중 끌려가 며칠 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검게 탄 시체로 돌아온 아들을 바라보는 부모와 가족들은 국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인민군 점령기 지방좌익에게 척살당한 시신을 수습하는 가족들의 마음 속에 어떤 생각이 자리했을까? 수복 후 이웃 사람들에게 체포되어 처참하게 학살된 어머니의 흩어진 시신을 수습하는 13세 소년과 그 가족들에게 이웃은 무슨 의미였을까? 휴전 후 국가 권력과 지역의 치안기관이 유족들을 빨갱이로 규정하고 강력한 통제를 가하는 것을 보고 지역 주민과 유족들은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이런 질문을 하다 보니 휴전 후 이들의 삶이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해졌다. 전쟁 중 국가권력에 의한 학살과 주민들끼리 서로를 죽이는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의 삶은 어땠을지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백서 작성을 위해 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학살을 경험한 유족과 주민들에게 자리한 것은 국가와 이웃에 대한 깊은 불신과 두려움이었다. 국가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자기 가족과 이웃을 살해하는 것을 체험하였고, 제자가 스승을, 친구가 친구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함께 농사를 짓던 이웃이 이웃을 죽이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국가권력과 이웃에 대한 불신과 공포는 결국 지역주민들의 삶을 왜곡시켰다. 이웃을 신뢰할 수 없는 타자로 규정하고, 타자부정을 통해 자기생존을 이어가려는 강박이 자리하였다. 타인을 적대하고 배제하는 것이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위한 방법이라는 것을 체득한 것이다. 결국 배타와 적대문화가 지역사회에 자리했고, 이것은 새로운 형태의 갈등을 지속적으로 촉발시킨 것이다.

'68년이 지난 사건이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배타와 적대가 만연한 사회와 문화가 어디에서 촉발되었는지 그것을 파악할 때, 그리고 이것을 극복하고자 노력할 때 화해와 상생, 통일과 평화가 가능할 것이다. <태안 민간인학살 백서>는 '과거의 이런 일이 있었대'라고 이야기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정부, 국민, 그리고 지역주민에게 배타와 적대의 문화를 극복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리는 데 목적이 있다."

태안 지역의 배타적 문화와 학살의 관계

- 지난 노무현 정부 시절 정부기관인 진실화해위원회에서 태안에서 발생한 민간인학살 사건에 대한 보고서를 낸 적이 있는데, 이 백서와 정부기관 보고서의 차이점은?
"정부에서 낸 보고서는 사건규명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 백서는 현재 태안 지역사회의 배타적 문화와 학살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태안학살 사건에 나타난 현상과 정체를 밝히고자 했다. 지역사회 안에 내재해 있던 갈등이 국가권력의 공산주의, 혹은 제국주의 적대정책과 맞물리면서 학살을 크게 증폭시킨 것이다. 특히 공산주의 적대정책은 휴전이후 그 형태를 변화시키면서 자신과 다른 입장을 지닌 개인과 집단을 배타시하는 문화로 발전했고, 지역사회에서 지속적인 갈등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보았다."

- 태안 민간인학살 유족 중에 "그 집 애라는 손가락질이 싫어서 고아원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웠던 시절도 있었습니다"라고 한 분이 있다. 이 유족은 왜 어린 시절 고아원 아이들을 그렇게 부러워했다고 보나?
"같은 동네 사람들과 친구들로부터 빨갱이 자식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자랐기 때문이다. 이 분의 경우 삼촌이 한국전쟁 개전 직후 보도연맹원으로 학살당했다. 이후 같은 동리의 사람들이 인민군 점령시기 내무서원과 지역좌익에게 학살되었고, 1950년 10월 초순 군경이 이 마을을 수복한 후 다시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삼촌이 학살되었다. 이 마을에서는 지방좌익에 의해 학살된 주민들이 전쟁 이후 마을의 주도권을 장악한 반면 보도연맹원 및 부역혐의 피학살자 유가족은 연좌제에 의한 강력한 통제를 받았기 때문에 그야말로 숨죽이면서 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빨갱이 자식이라는 소리를 듣느니 차라리 이런 사실을 모르는 고아원에서 사는 것이 행복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 한국전쟁기 태안 민간인학살이 휴전 이후 태안 지역사회의 정체성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하는지?
"전쟁과 학살은 이 지역 사람들의 생존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학살은 사람의 상식과 정상적인 생각, 그리고 그에 따른 행동을 파괴했다. 생존이 모든 생각과 행동의 기준이 된 것이다. 내가 상식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반공을 표방한 국가권력의 진영에 편입되는 것이 중요했다. 국가권력은 자신의 입장에 동조하지 않는 개인과 집단을 적으로 규정하고 배제, 제거했다. 이런 강제 하에서 주민들은 반공노선을 선택함으로 자신의 삶을 보호하고자 했다."

태안 민간인학살의 가해자는 누구인가

- 이 책에서 "어떻게 그렇게 잔혹하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라고 자문을 했는데 태안 민간인학살 당시 잔혹했던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하면?
"사람을 불에 태워 죽인 것, 확인사살을 한다며 참나무 몽둥이로 희생자들의 머리를 쳐서 훼손한 것, 쇠스랑으로 반복해서 사람들을 찍어 살해하거나 총을 난사한 후 확인 사살하는 과정에서 죽창으로 시신의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게 훼손한 것, 총을 난사한 후 수류탄으로 확인사살을 하는 것 등이다."

- 학살 희생자 유족 중 시신 수습을 못한 분도 많은 데 왜 희생자 유족들은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했다고 보나?
"보도연맹원의 경우 시신들이 불에 탔기 때문에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또한 인민군과 지방좌익에게 학살된 경우 다수의 주민들이 서산 양대리에서 집단학살 되었기 때문에 시신을 확인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고, 결국 다수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 수복 후에는 보복학살로 가족전체가 살해된 경우, 수장을 당한 경우, 각 면에서 이송되어 태안읍에서 학살된 경우 많은 사람들이 시신을 찾지 못했다."

- 태안 민간인학살의 가해자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이제라도 밝힐 수 있나?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의 가해자는 내무부 치안국장(장석윤)과 충청남도 경찰국 사찰과, 태안경찰서다. 인민군점령기 가해자는 서산 주둔 인민군, 내무서, 지방좌익이다. 부역혐의 학살 사건의 가해자는 대전 주둔 충청남도CIC와 이들이 주도하는 군검경합동수사본부, 충청남도 경찰국 사찰과, 태안경찰서 사찰과다. 특히 부역자심사위원회 조직과 시행을 주도한 군검경합동수사본부와 내무부 치안국, 그리고 자위대(치안대) 조직과 집행을 지시한 이승만 대통령이다."

- 1950년 10월 8일 안흥항에서 우리 해군이 민간인을 학살했는데 그 경위와 이유는?
"미군과 한국군의 서해안 봉쇄작전의 일환으로 발생한 사건이다. 1950년 7월 미군과 한국 해군은 남해안에서 동해안과 서해안을 따라 북진하면서 인근 섬과 해안지역을 장악하는 작전을 세웠다. 인민군이 후퇴할 무렵 해군은 현지우익과 유족을 중심으로 무장대를 조직했고, 이런 과정에서 고남면, 안면, 안흥 등지에서 학살이 발생했다."

- 당시 태안 지역에서 학살당한 민간인의 수는 몇 명으로 추정하고 있나? 또 그 이유는?
"최소 약 1200명으로 추정된다. 이중 보도연맹원 및 부역혐의자로 군경에게 희생된 이들이 1049명이고, 인민군 및 내무서원에게 희생된 이들은 136명이다. 그러나 이들은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들에 불과하다. 실제로는 더 많은 주민들이 희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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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를 없애기 위해 시신을 불태웠다

- 학살사건 당시 시신들이 불에 타서 식별하기 어려웠다고 하는 유족들의 증언도 있는데 가해자들이 시신을 불태운 이유는 증거를 없애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다른 무슨 이유가?
"몇 사람은 증거를 없애기 위해 시신을 불에 태웠다고 증언했고, 몇 사람은 살해과정에서 사람들을 불에 태우면서 총으로 쏘았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명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증거는 확보하지 못했다. 학살에 참여했던 경찰이나 학살과정을 목격한 목격자의 증언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어떤 유족들은 학살 후 시신수습을 하려고 갔었는데, 경찰이 아예 시신수습을 못하게 하더라는 증언도 있는데 왜 경찰은 희생자들의 시신조차 수습 못하게 했다고 생각하나?
"시신 자체가 처참하게 훼손되었기 때문에 가해자들은 이 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 학살 희생자 중엔 남자는 얼마 안 되고 가정주부나 어머니들 많았다는데, 가해자들은 왜 남자보다 가정주부나 어머니들을 많이 죽였나?
"전형적인 보복학살의 경우다. 이 동리의 경우 보도연맹원 학살과 부역혐의자 학살을 통해 대부분의 남자들은 모두 학살되었다. 그러나 가정주부나 어머니들을 학살한 경우는 남자들에 대한 학살이 거의 끝난 이후에 지방우익과 인민군점령기 희생자 유족들을 주도로 행해졌다. 바로 이점 때문에 이들에게 있어서 학살이라는 것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도 지속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주민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경험을 했기 때문에 사건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적대의식과 갈등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3대가 흘러 그 실상을 잘 몰라도 이러한 적대의식과 갈등은 다른 형태로 유전되고 있다."

- 오는 11월 3일 태안 민간인학살 위령제를 개최하는데 위령제의 의의, 내용과 프로그램을 소개하면?
- 3일 오후 1시부터 태안군청에서 위령제가 있고, 2시부터 백서 출판기념회가 있다. 이번 백서는 태안에서 발생한 보도연맹원사건, 적대세력사건, 부역혐의사건 모두를 담았다. 갈등의 삶을 화해와 상생의 삶으로 변화시키자는 소망을 담았다."

태그:#최태육, #학살, #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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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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