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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 선유동
 청천 선유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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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늘 아쉬움이 남는 이유

글을 쓰다 보면 늘 아쉬움이 남는다. 그것은 글 자체의 부족함에서 연유하기도 하고, 또 꼭 써야할 내용을 쓰지 못한 자책 때문이기도 하다. 글의 부족함은 하루아침에 극복되는 것이 아니니 할 수 없지만, 중요한 내용을 빠트린 것은 잘못이고 실수이기 때문이다. 이번 연재에서도 몇 군데 빠트린 곳이 있다. 대표적인 곳이 청천 선유동이다. 선유동은 화양동과 함께 화양천의 쌍벽을 이루는 절경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괴강가에 있는 애한정과 화암서원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괴강삼거리에 있는 농업역사박물관은 이야기하고, 더 오랜 역사를 가진 정자와 서원을 이야기하지 않다니, 이만저만한 실수가 아니다. 애한정은 조선중기 이후 괴산과 충주를 찾은 시인묵객들이 꼭 들러 시를 남긴 대표적인 정자이기 때문이다. 화암서원은 광해군 때인 1622년 창겅된, 괴산에서 가장 오래된 서원이다.
 
요도천과 달래강의 합류 지점
 요도천과 달래강의 합류 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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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로 달천과 달래강을 이야기하면서 지류를 완벽하게 다루지 못한 점이 아쉽다. 그것은 지류가 너무 많고 또 현장답사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지류를 너무 짧고 수량이 적어 갈수기엔 건천으로 남아있는 경우도 있다. 이런 저런 연유로 지류를 다 다루지 못했지만, 달래강의 최하류에 있는 요도천 스토리를 다루지 못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이다. 그것은 요도천에 아주 특별한 스토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 세 군데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다루고자 한다.

청천 송면의 선유동 이야기
 
선유동 입구: 선유동문(왼쪽)과 경천벽(오른쪽)
 선유동 입구: 선유동문(왼쪽)과 경천벽(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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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 선유동은 화양동 상류에 있다. 신선이 놀만 한 곳이라 해서 선유동이라 이름 했다. 선유동은 수석(水石)이 기이하고 경치가 빼어나 경승으로 꼽힌다. 조선 중기 선유팔경으로 불리다, 조선 후기 구곡이 설정되면서 선유구곡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하류의 제1곡 선유동문(仙遊洞門)에서부터 상류의 제9곡 은선암(隱仙巖)에 이르기까지 선경을 이루고 있다. 특히 상류쪽 기국암(棋局巖: 제7곡), 구암(龜巖: 제8곡), 은선암이 한데 어우러진 풍경이 절경이다.

제1곡 선유동문은 선유구곡으로 들어가는 입구 왼쪽에 있다. 30m 정도 되는 바위 아래로 굴이 있고, 바위 윗부분에 선유동문이라는 큰 글자가 새겨져 있다. 선유동문 건너편으로는 하늘로 우뚝 솟은 바위산이 있다. 바위의 형상이 마치 하늘을 떠받드는 것 같아 경천벽(擎天壁: 제2곡)이라 이름 붙였다. 제3곡은 경천벽 상류에 있는 학소대(鶴巢臺)다. 학이 둥지를 틀만한 바위다.
 
기국암, 구암, 은선암
 기국암, 구암, 은선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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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곡 연단로(鍊丹爐)는 선유1교에서 보이는 큰 바위다. 평평한 바위 위가 움푹 패 있어, 금단(金丹)을 만드는 화로 같아서 연단로라는 이름을 붙였다. 금단은 신선이 먹는 불노장생의 신약이다. 제5곡 와룡폭(臥龍瀑)은 용이 누워 놀만한 폭포라는 뜻이다. 물이 바위 사이를 흘러내리며 폭포를 이루고 그 아래 못을 형성해 용이 머물만하다.

6곡 난가대(爛柯臺)에서 9곡 은선암은 이웃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야기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 난가대는 기국암과 한 쌍을 이룬다. 기국암에서는 바둑을 두고, 난가대에서는 이들 대국을 관전했기 때문이다. 기국암은 바둑판 바위라는 뜻으로, 이곳에서 신선들이 바둑을 두었다고 한다. 난가는 '도끼자루 썪는다'는 뜻으로 신선들의 바둑을 지켜보던 사람이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서 있던 곳을 말한다.

구암은 말 그대로 거북이처럼 생긴 바위다. 거북이 머리를 하늘로 쳐든 모습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목 아래 부분에는 비늘 형태의 귀갑(龜甲)이 분명하게 보인다. 바위 중간에 구암이라는 초서체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은선암에도 초서체 글씨가 새겨져 있다. 기국암과 구암에 비해 우뚝 솟아 있다. 은선암 뒤쪽에는 관찰사 조명정(趙明鼎)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조명정(1709-1779)은 영조 때 충청도관찰사를 지냈다.

괴강 다리 건너 만나는 애한정과 화암서원
 
애한정
 애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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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읍에서 괴강교를 건너면 감물면과 칠성면으로 나뉘는 삼거리다. 그곳에 괴산농업역사박물관이 있다. 농업역사박물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강쪽으로 가다보면 박상진(朴商鎭) 효자문을 만날 수 있다. 박상진은 함양박씨로 평생 효를 행동으로 실천해 고종 28년(1891) 조봉대부 동몽교관이라는 벼슬과 함께 효자정문을 받았다고 한다. 박상진의 9대조가 박지겸(朴知謙: 1549-1623)으로 이곳 괴강가에 애한정(愛閑亭)이라는 서당을 짓고 후학을 가르쳤다.

박지겸은 '애한정기'에서 애한정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이야기하고 애한정이라 이름 지은 연유를 설명했다. 그는 애한정에서 독서하고 후학을 가르치면서, 여가를 이용해 가야금도 켜고 바둑도 두고 시조도 짓고 낚시도 하는 즐거움을 누렸다고 한다. 이곳 애한정에 흔적을 남긴 사람으로는 월사 이정구(李廷龜), 우암 송시열, 직재 이기홍(李箕洪), 장암 정호(鄭澔) 등이 있다.
 
애한정 옆 괴강
 애한정 옆 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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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구의 애한정 팔영(八詠) 시가 당시의 풍정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괴강 포구에 떠 있는 상선에게 한양의 소식을 묻고, 괴탄 여울에서 낚시하며 정자를 찾는 손님과 술잔을 나눈다. 그중 여섯 번째 노래 '강 포구에 떠 있는 상선(江浦商船)'을 인용해 보자. 이를 통해 괴강이 한강과 통함을 알 수 있다.
 
포구에 때때로 점점이 뜬 배들이 보이더니         浦口時看點點篷
안개 걷히자 노 젓는 소리 속에 말소리 들리누나. 霧開人語櫓聲中
배를 불러 대궐 소식을 묻고자 하는 것은           呼船欲問東華信
이 앞강이 바로 한수와 통하기 때문일세.           爲是前江與漢通
 
화암서원
 화암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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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한정이 행정구역상 괴산읍 검승리에 있다면, 화암서원(花巖書院)은 칠성면 송동리에 있다. 화암서원은 1622년(광해군 14) 이 지방 유림의 공의로 이황(李滉), 이문건(李文楗), 노수신(盧守愼), 김제갑(金悌甲), 유근(柳根)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다.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이황, 영의정을 지낸 노수신, 좌찬성을 지낸 유근은 전국적인 인물이고, 승지를 지낸 이문건과 충청감사를 지낸 김제갑은 괴산과 연고가 있는 인물이다.

1738년(영조 14) 허후(許詡), 전유형(全有亨), 박세무(朴世茂), 이신의(李愼儀)가 추가 배향되었다. 그 중 박세무는 중종 때 학자다. <동몽선습>을 저술한 것으로 유명하다. <동몽선습>은 조선 후기 서당에서 천자문을 떼고 난 후 배우는 기본교재로 사용되었다. 1744년에는 애한정을 짓고 후학을 가르친 박지겸(朴知謙)을, 1746년에는 수찬을 지낸 허조(許慥)를 추가 배향했다. 그러므로 화암서원에 배향된 선현은 모두 11명이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 훼철되었다가 1956년 박동찬(朴東燦)을 중심으로 한 지방유림에 의해 복원되었다. 경내의 건물로는 4칸의 사우(祠宇), 4칸의 재실(齋室), 정문(正門) 등이 있다. 사우에는 이황을 주벽(主壁)으로 10현의 위패가 좌우에 배향되어 있으며, 정문 밖에 있는 재실은 유생들의 학문토론장소로, 향사 때 제관들의 숙소로 사용되고 있다. 매년 9월 중정(中丁)에 추계제향을 지낸다.

배극렴(裵克廉)을 찾아 요도천을 건넌 이성계 이야기
 
요도천이 만들어낸 들판
 요도천이 만들어낸 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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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도천(堯渡川)은 임금이 건넌 하천이다. 그것은 임금 요, 건널 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럼 요도천을 건넌 임금이 누굴까?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다. 정확히는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 배극렴을 정치에 끌어들이기 위해 이곳 충주의 어래산(御來山: 394m)을 찾아온 것이다. 어래산은 현재 충주시 주덕읍과 괴산군 불정면을 경계 짓는 산이다. 어래산은 이름 그대로 임금이 온 산이다.

왕이 되기 전 이성계는 왜구 토벌과 여진족 토벌을 통해 세력기반을 다졌다. 배극렴은 1380년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어 이성계 휘하에서 왜구 토벌에 참가했다. 그러나 그는 이천년(李千年: 외조부), 이인임(李仁任: 외종육촌), 조민수(曺敏修) 등 고려시대 권문세도가와 인척관계 때문에 잠시 이성계의 휘하를 떠나 충주 어래산에 은거한다. 배극렴의 도움이 필요했던 이성계는 어래산을 세 번이나 찾게 된다. 그래서 어래산 아래 주덕읍과 불정면에는 삼방리(三訪里)라는 마을이 있다.
 
어래산
 어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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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의 삼고초려를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한 배극렴은 개경으로 올라간다. 1388년 고려의 요동정벌 때 배극렴은 우군도통사(右軍都統師)인 이성계의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참전한다. 그리고 위화도회군에 동참해 친원파인 최영 중심의 구세력을 추방하는데 앞장선다. 1392년 7월 조선이 개국할 때 그는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한다. 이어서 그는 조선 초대 영의정이 되었고 그해 12월 세상을 떠난다. 그의 묘는 어래산에서 멀지 않은 증평군 두타산(頭陀山) 대아봉(大雅峰)에 있다.

태그:#청천 선유동, #애한정, #화암서원, #요도천, #배극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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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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